‘아프리카 바늘두더지 딜레마’ 란 얘기 아니?  

바늘두더지의 경우, 상대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하려 해도 

몸을 대면 댈 수록 온몸의 바늘로 서로를 상처입혀 버리지

인간에게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어. 


지금의 신지군은 마음의 어딘가에서 아픔을 두려워 해서 겁이 많아진 거겠지. 


그러다 알게 되겠지.

어른이 된다는 건


다가가든가, 멀어지든가 하는걸 반복해서,

서로가 그다지 상처입지 않고 사는 거리를 

찾아내는 것 이란걸...


                                                                                                 _신세기 에반게리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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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 2호가 나왔습니다.

이번호의 주제는 여러가지 '사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럼 오늘도 많이 노셔요~~!!


차례

2호 - 사이

여는글 ----- 7

주제파악 ----- 8

<놀다가 책> -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 9

<놀다가 음악> - 나는 우리 사이를 깨달았어 ----- 15

<놀다가 아트> - 사이에 머무르는 시선들 ----- 22

<놀다가 영화> - '사_이_' 그 멀고도 가까운거리 ----- 28

쓸데 없는것 배우기 - 손뜨게 가방 ----- 32

산초의 방구석 탐방 ----- 42


(* 파일을 분할압축 했습니다. 두개의 파일을 모두 다운받으셔야 압축을 푸실수 있습니다.)

놀다가, 2호-사이.z01


놀다가, 2호-사이.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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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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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어떤 한 사람의 관심사와 취향, 성격 등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축소판 이라 생각한다. 신기한 나라, 신기한 세계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친구에 집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토끼를 따라 구덩이로 들어간 앨리스처럼 누군가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_놀다가_ 


   

나는 일반인이다. 조그마한 책장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 나는 적지 않은 책과 적지 않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다른 일반인의 책과 관심사에도 흥미가 많다. <산초의 방구석 탐험>은 사진으로 읽고 보는 소소한 메모장이다. 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한때 시를 많이 읽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헌책방에서 틈틈이 사서 모으고 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창비 시선 그리고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좋아한다. 소설의 경우, 지금도 많이 좋아하지만 특별히 사서 읽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최인훈, 황순원, 도스또예프스키,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좋아한다. 옛날 세로 읽기 책을 모으고 있다.



80년대 학생운동 조직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의 역사를 찍은 사진책이다. 이미 내가 학교다니던 시절엔 한총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어떤 이름의 조직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지났다. 앞 커버는 소위말해 팔뚝질을 하는 모습. 지금봐도 그때의 신념과 패기가 느껴지는 멋진 포스의 사진이다.



역사와 문화는 오랜 관심사였지만, 여행은 다른 분야에 비하면 오래된 편은 아니다. 특히 전문 여행서적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되지 않았다.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세계 오지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최근에 아름다운 가게 헌책방에서 <북극탐험>이란 책을 득템했다. 중앙일보가 1981년도에 초판 발행한 책으로 주간중앙을 구독하는 독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표지사진과 글꼴이 아주 옛스럽다.




예술은 모든 분야, 영역을 가리지 않고 관심 갖고 있으며 좋아한다. 사진, 만화, 영화, 클래식, 미술사, 음악사, 미학, 한국 리얼리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안도 타다오, 영화 <말하는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 그리고 한옥. 인테리어, 캘리그라피, 땅콩집, 목공예, 식물, 장난감...


   

그밖에 분류하고 정리 할 수 없는 수많은 책, 사전, 수첩, 사전, CD, 레코드판... 


   

대학교선배형이 선물한 시집앞의 메모. 그때는 선배가 후배에게 책선물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는 그 전통을 잘 잇지 못한 것 같다.  _산초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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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은 의외로 꽤 쓸쓸하다. ‘당연한 기쁨’ 이 강요된 덕분에 ‘외로움’ 이 더 두드러진 탓이다. 언젠가는 생일을 맞을 당신을 위해(이미 맞았거나, 아무튼) 여기 한편의 꽤 쓸쓸한 영화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작품. 전작으로는 <불량공주 모모코(下妻物語 Kamikaze Girls, 2004)>가 비교적 유명하다. 영화는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감,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 덕에 무아?의 경지, 나를 잊는 경험을 선사한다.(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마츠코는 사랑받고 싶은 어린소녀다. 병약한 동생 덕에 집안에서는 늘 순위가 밀린다. 근심 가득한 아빠를 밝게 웃게 하고픈 어린 소녀는 인생은 아마도 디즈니 동화의 다른 모든 공주들의 삶처럼 반짝일 거라 믿는다. 가족이 바라는 대로 교사가 된 23살의 마츠코는 사소한? 실수와 오해로 인생의 모든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나.락.을.


   생일에 느끼는 쓸쓸함은 인생으로부터 전해지는 쓸쓸함과 맞닿아 있다. 생일이니까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은 나 자신과의 괴리로부터 오는 쓸쓸함 말이다. 태어났으니까, 살아 가야 하니까, 아마도 행복한 생(生)일 꺼라 기대하지만, 나와 당신의 삶이 막상은 그다지 신나지 않아서 아마도 더 외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마츠코의 삶이 그렇다. 인생은 아마 즐거울 것이며 적어도 나의 삶은 기대보다 더 빛날 것이라는 그녀의 꽃빛 공상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지의 현실로 바뀌었다. 


마츠코의 쓸쓸함


“쓸모없는 인생이었어.”

   

   자기 누이 마츠코의 죽음을 두고 그녀의 남동생은 말한다. 타인의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덜컹거린다. 동생이 보기에 삶의 나락을 기어 다니다 죽어버린 누이는 쓸모없는 생을 살다간 먼지 같은 여인네일 뿐이다. 혐오스럽다 불렸던 누나, 마츠코.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살아갈 동기가 필요했다. 나락에 던져진 후에는 그 동기가 더욱 간절해진다.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그 무엇. 어떤 고난과 역경도 절대 나 자신을 꺽지 못하게 할 그런 동기, 생을 버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마츠코에겐 살아갈 동기란 사랑 이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병약한 여동생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어서 그녀는 사랑을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전혀 회복될 수 없는 나락들이 에워싼 순간에도 무엇이 삶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사랑.


   사랑에 목을 매는 마츠코의 모습이, 타인의 멸시와 폭력, 지독한 태도들을 견뎌내며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려는 그녀는 한심하고 비참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여성비하적이라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혐오스럽고 처절한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다만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될 수 없으며 더욱이 내면의 기준을 흔들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철저하게 사랑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택한 여인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소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청년 류.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마츠코의 후회 없고 미련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 두렵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친 그로 인해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한다. 


   뒤늦게 류는 도망의 끝에서 마츠코를 통해 신을 만난다. 신의 사랑이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한없는 사랑이 꼭 그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코 버리지 않는, 뒤돌아서지 않는 그런 사랑.

   

   늘 고향의 강을 그리던 그녀, “다녀왔어” 라는 인사에 “어서와” 로 맞이해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랬던, 평생 사랑을 주기만 하다 스러져간 마츠코는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한 어느 밤, 고향을 닮은 강을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삶은 쓸쓸할지언정 쓸모없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죄송한 삶,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나의 외로움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생일이 특별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가만히 보니 기쁨에 대한 감각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의 감각들은 날로 예민해진다.


   개인적으로 생일이 불편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크리스천의 ‘강요받은 기쁨’ 에 기인한다. 생명, 그분의 희생은 나에게도 무엇보다 귀하지만 세상이, 또 내가 속한 교회의 환경이라는 것이 스스로 생명의 기쁨을 묵상하고 기뻐할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기쁨’ 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참’ 기쁨을 누리라니. 기뻐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범하는 것 같아서 영 그렇다. 안 그래도 죄 될 것이 많은 세상 아닌가. 생일의 기쁨도 이와 비슷한데,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든 달까.

   

   생일은 왠지 더 쓸쓸하고 생(生)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마츠코의 그토록 지독한 외로움이, 그녀의 처절한 삶이 그 외현은 아닐지라도 나의 속 깊은 외로움과도 닿아있다.


   근본적으로 외로운 족속인 우리는 스스로가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마츠코는 자신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온 몸으로 내뱉고 철저하게 인정한다. 때문에 그녀는 더 처절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쏟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는 것은 자기를 배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극단에서 궁극의 삶에 도달할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가 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느낀다. 현재의 나의 외로움은 나 자신을 더 이해하고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할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이 착각 역시 또 다른 ‘디즈니 월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꿈을 꾸는 건 자유지만 어디로 가도 앞은 깜깜하기만 하더라고. 하지만 그 깜깜함을 빛낼 단 하나를 마츠코는 찾았다.

   생일, 우리가 태어난 이 토양은 이미 너무 상해버렸지만, 계절도 불분명하여 늘 상 몸을 사리게 만들지만, 우리는 여기서 깜깜함을 빛낼 밝은 빛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극중에서 주인공 마츠코를 연기한 나카타니 미키(中谷美紀)는 “구부리고 펴서(まげてのばして / 마게테 노바시테)”라는 곡을  노래하는데 맘이 오묘하게 슬퍼진다. 가사는 이러하다.


구부리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구부리고 발돋움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구부려서 바람과 이야기하자

활짝 팔을 벌려 해님을 쬐어보자


모두들 안녕

내일 또 만나자


구부리고 펴다 배가 고프면 돌아가자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가자

     

   사랑을 향해 구부리고 펴기를 쉬지 않았던 그녀와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는 별님을 잡을 수도, 하늘에 닿을 수도 없지만 바람과 이야기하고, 해님을 쪼이며, 지치고 힘들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기쁨’ 의 강요, ‘두드러진 외로움’ 을 우리는 잘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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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에 묘한 불편함이 생겼다. 물론 여러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절친한 이들에게는 절친한 대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기억해줬다는 소심한 기쁨이 있다. 선물이나 케이크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기쁜 일이니. 하지만 이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불편함은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생일이 사실 내가 축하를 받을 날인가 하는 물음에서 스물스물 피어 올랐다.


   ‘생일 축하한다’ 는 메시지는 무슨 뜻인가? 물론 어렵게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온 데에 신생아였던 나의 노력이 없었다고는 못할 테다. 뭔가 용을 썼겠지. 하지만 여러 표현에서 나타나듯 내가 태어나게끔 된 것은 어머니가 나를 배고 태에서 키워 낳으신 덕분이니, 사실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에 나는 거저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을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건가 싶어서, (물론 축하하는 이는 이런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겠지만) 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래, 사실 우리말에서 ‘태어나다’ 는 표현은 확실히 내가 축하를 받을 만 하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그 어릴 적 온갖 애를 써서 태어났었노라 라는 성취의 느낌이 잔뜩 묻어난다. 열 달이 다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를 가르고 태어났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맥더프 정도가 된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만. 실제로 다른 언어의 경우를 찾아보면 ‘태어나다’ 는 동사는 우리말과 달리 수동태로 표현될 때도 많다. 나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이며 혹은 신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어찌됐든 내가 축하를 받을만한가 라는 지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생일 축하를 마다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생일을 기회로 간만에 나누는 상투적인 안부인사와 온갖 난리들이 싫지만은 않다. 이 글을 근거로 생일 축하하는 것을 멈추지는 말아달라. (어차피 내 올해 생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이를 테면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 생일일 필요가 그다지 없다면, 다른 의미의 생일, 혹은 다른 의미의 기념일을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것이 내가 기억지도 못하는 출생의 기억보다 진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생일에 대한 시와 그림을 각각 한 편씩 소개하고 싶다. 상투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혹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새 다이어리를 샀을 때 내 생일을 가장 먼저 체크하고 있다면, 일 년 달력에 내 생일만 눈에 번쩍 뜨인다면, 다른 의미깊은 날이 나한테는 없던가 한 번 돌아보는 재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로제티의 생일, 내 사랑이 찾아온 날


생일  -  크리스티나 로제티


내 마음은 물가의 가지에 둥지 튼

한 마리 노래하는 새입니다.

내 마음은 탐스런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한 그루 사과나무입니다.

내 마음은 무지갯빛 조가비,

고요한 바다에서 춤추는 조가비입니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A Birthday  -  Christina Rossetti


My Heart is like a singing bird

Whose nest is in a watered shoot:

My Heart is like an apple-tree

Whose boughs are bent with thickest fruit:

My Heart is like a rainbow shell

That Paddles in a halcyon sea:

My Heart is gladder than all these

Because the birthday of my life

Is come, my love is come to me....

(번역: 장영희)

   

   생일에 대한 여러 예술적인 해석들이 이렇게 존재한다.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생일>이라는 이 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는 사랑이 내게 찾아온 날이 생일이라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수 많은 연인들의 기념일이 여기에 속할 것도 같지만, 사귀기로 시작한 날이라든지 결혼한 날이 어떤 결심을 동반하는 날이라면,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내게 온 날은 이를 테면 내가 어머니에게로부터 ‘태어나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출생하게 됨으로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사랑이 내게 왔기에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 때문에 그 사랑이 오기 전에는 내겐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시인은 이야기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태아이던 우리는 출생의 순간과 그 환희를 우리의 부모님만큼 느낄 수 없었지만, 사랑이 오는 그때의 기쁨은 시인이 노래하는 새로, 한 그루 사과나무로, 무지갯빛 조가비로 빗대어 표현하듯 온 몸으로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생일’ 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기도 한 것이겠다. 화사한 봄의 꽃마냥 시인이 스물 일곱 살 때에 썼다는 이 시는, 사랑타령은 질리게 들어서 새로울 것 없을 것도 같지만, 과연 ‘생일’이라고 부를 만큼의 눈부신 사랑의 날이 있었던가 하고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봄은 타지 않기로, 조심하기로 해요 우리.) 


   사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그 사람과 헤어졌을는지도 모르겠다. 예순 일곱도 아니고, 스물 일곱에 썼다니까 사실 모를 일이다. 생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환희에 찼던 것이지, 결과적으로도 시인에게 그 날은 생일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을 어느 날,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선 주름진 손으로 연필로 사각사각 ‘돌아보니 이 날이 내 또 다른 생일이었지, 이 사람이 내게 왔던 그날’ 하며 주름 패인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생일이라면 하나 더 있다면, 오래 축하하고 싶을 것이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샤갈의 생일, 우리는 하늘을 날아올라서


   로제티의 시 <생일> 을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사랑을 만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환희와 기쁨은 어떤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을까. 여기, 사랑스러운 연인들과 낭만의 대기를 표현해낸 마르크 샤갈의 <생일> 이 있다. 로제티는 19세기의 영국시인, 샤갈은 20세기 러시아 출신의 화가, 각각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았던 이들이나 묘하게 어울리는 또 다른 생일을 감상해보자. 필시 21세기의 우리의 생일 혹은 우리의 사랑에 이어지는 지점이 있을 테니.

   

   마르크 샤갈의 <생일>이다. 샤갈1887-1985 은 러시아 국경마을인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혹은 조국의 현실 문제로, 혹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와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80여 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왔던 작가이다. 인상파와 입체파, 추상화 등 20세기의 주요한 예술 운동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만의 스타일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렸으며, 특히 러시아의 민속적인 색채와 더불어 시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하여,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2010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캔버스에 유채, 80.5x99.5cm, 뉴욕, 현대미술관


   사실 샤갈의 <생일>은 앞서 로제티가 썼던 ‘사랑이 찾아온 날’의 생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일>은 샤갈이 그의 연인이었고 아내였던 벨라와 결혼식을 올리기 몇 주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초상으로, 실제로 벨라가 샤갈의 스물 여덟 번째 생일을 위해 꽃다발이며 케익을 준비하고, 방 곳곳에 숄을 걸어놓아 그를 위한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정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결혼을 자축하는 결혼기념화이면서 일종의 관계의 초상이니, 로제티의 시에서 보여지는 맥락과도 일맥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 샤갈의 인생에서 벨라는 30여 년 동안 부인이자 영혼의 동반자였고, 그리고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샤갈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으니 이 생일은 결국 이 결혼은 생일 만큼의 혹은 그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재미난 점은 샤갈이 그리는 연인들이다. 그들은 중력의 법칙을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생일>이라는 작품에서도 그렇고, 2년 후에 그린 <산책>에서도 그들은 하늘을 붕붕 떠다닌다. 마치 생일이나 놀이공원에 가면 들고 다니는 헬륨 풍선처럼, 언제나 축제인 것처럼 그들은 하늘을 날아 다닌다. 현실의 연인을 그린 것이겠지만, 관계의 초상 안에서 그들은 함께이며, 그들뿐이며, 그들의 세상을 산다. 때문에 샤갈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분명‘생일’이라 부를만하다. 출생의 기억보다 진한 기억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래 살아갈 이를 만났으므로.


시간의 발견, 사건의 발굴


   생일은 아무리 그래도 기억하게 되는 날이다. 달력을 볼 때 내 생일이 번쩍 뜨이는 것은 별 다른 기대가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선물과 축하를 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생일을 제외하고서 누구보다 먼저 깊게 기념할 날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있는가? 굳이 지금의 연인을 만난 날이 아닐지라도, 잊을 수 없는 하루 하루가 있다면 기억 속에서 한 번 다시 발굴해보자.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고, (불교의 승려들은 불문에 들어간 날을 그들의 생일로 기념한다 한다.) 어떤 인식의 깨짐, 충격의 날일 수도 있겠다. 잊을 수 없는 만남의 순간, 혹은 불편했던 진실을 직면했던 날도 또한. 


▲ 마르크 샤갈, <산책>, 1917-18, 마분지에 유채, 170x183.5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와 유사하지만 더 나아가서 ‘진리 사건’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진리에 깨우치게 되었던 체험을 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난 후 회심하여 바울이 되었던 사건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68혁명 역시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면서 바디우는 충실하게 우리의 진리 사건과 이 시기에 임하라고 이야기 한다.


   고로 다시 돌아오면 ‘생일 축하한다’ 는 즐거운 인사 속에 우리의 기념할 것들을 다 흘려 보내지 말자는 것이다. 365일을 모두 기념하며 살아갈 순 없지만, 사랑을 만난 날이든 혹은 중요한 만남이 있었던 날이든, 혹은 인식이 깨졌던 날이든, 혹은 영적인 체험을 했던 날이든. 생일의 개념을 넓히고 새로운 생일을 발굴해보자. 더 나아가 알랭바디우의 표현대로 ‘진리 사건’ 의 때를 마주하자. 그리고 설령 그날에 누구도 ‘너의 새로운 생일을 축하해’ 라고 해주지 않아도 기념하자. 그렇게 알알이 시간을 조각해 보자. 로제티의 생일처럼 혹은 샤갈의 생일처럼, 혹은 생을 흔드는 ‘진리 사건’ 의 그날처럼. 

_꽤 애호가_






참고서적 및 자료:

 『샤갈』, 재키 울슐라거, 민음사, 2010.

『그늘』, 김응교, 새물결플러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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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1P ~ 11P

1호 - 생일 2013. 5. 1. 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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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날을 격하게 환영하며!! 


차례

여는글 ----- 7

주제파악 ----- 8

<놀다 설문> 당신의 생일 선물에 대한 단상 ----- 9

<놀다가 책> - 생일 날 책 선물 하는 것에 대하여 ----- 12

<놀다가 음악> -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 15

<놀다가 아트> - 생일 또 다른 생일 ----- 22

<놀다가 영화> - 생의 쓸쓸함에 대하여 ----- 29

쓸데 없는것 배우기 - 손뜨게 가방 ----- 34

산초의 방구석 탐방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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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가 1호.z01


놀다가 1호.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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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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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속 마음~

알림~ 2013. 4. 15. 09:55 |

<놀다가,> 본격 1호를 맞이 하야,

1호의 주제는 '생일' 입니다.


그리하여 생일에 관한 간단한 설문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 주시면 참 고맙습니다~


그럼 아래 링크로!!!!



https://docs.google.com/forms/d/1ihAUZHaLAv6EVk18QR4jwDj47ik2k0I_k3eqsgJWRXc/viewform?pl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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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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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톨의 무게

0.5호 2013. 4. 5. 11:36 |



0.

이 글에서는 흔히 말하는 ‘찬양’ 이라는 단어들은 ‘노래’로 바꾸어 썼다. 이유는 ‘노래’는 ‘노래’ 이지만 ‘찬양’이 꼭 노래만은 아니니까.


1.

사실, 이글은 ‘부활절에 더 이상 듣지(혹은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노래들’ 이라는 주제로 쓰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교회를 20년 넘게 다닌 나에게, 교회 사역도 남부럽지 않게 해본 나에게도 부활절에 더 이상 듣고 싶지 혹은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는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다고 부활절 즈음에 들려지고 부르는 노래가 흠 잡을 데 없이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활절 노래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당신도 이 시점에서 잠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부활절’ 하면 딱 하고 떠오르는 노래가 몇 곡이나 되는지. 많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혹시 고난주간 노래를 부활절 노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부활절 하면 쉽게 떠오르는 노래들은 대부분 고난주간의 노래들일 경우가 많다. 부활절 당일 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몇 곡이나 되는가. 내 추억을 좀 더듬어 봐도 부활절 당일에 부를 수 있는 노래, 별로 없었다.


2.

생각해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우리는 부활을 별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교회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다. 우리는 다이어트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가씨처럼 부활절 당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대 날을 기다리는 말년병장처럼 부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하긴..... 이렇게 간절하지도 않지....) 일단 부활절에 도달하면 결승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부활절이 되기 40일 전부터 우리에겐 고난의 옷이 씌워진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금식, 금주, 금연에 쇼핑과 TV, 인터넷 등등 소위 말하는 세상의 쾌락을 멀리 하기를 권유받는다. 우리는 40일 동안은 안했으면 하는 것들을 정확히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맘에 뭔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날들보다 ‘죄’ 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야 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부활절 당일은 그 모든 짐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짐이 한순간에 확 벗어지는 날이다. 무언가 끝이 나는 날이다. 부활이 새로운 시작이 아닌 무겁고 어두운 무언가에서 해방되는 날, 그동안의 쓴 고난을 끝내는 날이기에, 그날이 도달하면 그걸로 끝난다. 방학이 시작되면 더 이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3.

부활 전에 우리는 고난에 관해 쓰디쓰게 묵상하고 못이 박히게 이야기 듣지만 부활 후 에는 믿어야 하는 믿기 힘든 생물학적 부활만이 강조된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하고 끝인 거다. 마치 빚을 다 갚은 채무자처럼. 아무것도 없다. 삶은 계란이나 먹으며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나 듣는 것이다. 부활이 영광이고 기쁨이라면서 왜 부활이 영광이고 기쁨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수식어로 끝인 거다. 고난주간처럼 부활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권유 받는 행동이나 규약도 없다. 전도사님들과 교회 청년부 임원들은 부활절 행사를 끝내니 얼마나 좋을까. 그뿐이다.


4.

그러고 보면 교회는 해 보라는 건 없고 하지 말라는 것만 많다.


5.

그래서! 뭔가 해보라 말하고 싶다. 한 가지 제안하고 한다. 교회 높으신 분이 아니 하시니 낮고 비천한 내가 제안해본다. 이제는 고난의 길이와 부활의 길이가 같았으면 좋겠다. 부활절 전에 40일을 챙겼으면 부활절 후도 40일 챙기자. 너무 길면, 사순절의 기간을 단 한 주로 대폭 줄이고 부활절 후도 똑같이 한주를 챙기던지.

자, 그럼, 부활절엔 뭘 묵상할까? 나는 ‘생명’부터 묵상해 봤으면 좋겠다.(도대체 ‘생명’을 부활절에 묵상하지 않으면 언제 묵상하나?) 그저 무덤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도식화된 생명 말고, 우리 세상을 당신 주위를 흐르고 있는 수많은 죽음과 부활들을 묵상해 보자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삶들이 태어나고 죽어 간다. 인간은 물론이고, 식물, 동물, 자연 하늘의 별들 까지도 제각기 각자에 자리에서에서 살다가 죽어 간다. 심지어 당신 몸 안에 세포들도 당신의 생명을 위해 죽는다. 이런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고난-죽음-부활-승천-영생 같은 도식으로만 낭비하지 말자는 말이다.

한 가지 덧 붙여, 죽음이나 생명이 꼭 생물학적으로만 발생하는가? 우리시대에 편만한 돈 만능주의는(돈 파시즘?)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 혹은 ‘12년 동안 혈루 병 않은 여인’ 을 아주 손쉽게 ‘나면서부터 돈 없는 자’ 와 ‘12년 동안 빚더미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사람은 넘쳐 나는데 교회는 그 문제에 대해 무감각 하다. 마치 좀비처럼. 그리고 기도만 한다. 뭘? 어떻게 기도 하라고? ‘원컨대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6.

부활절에 묵상할만한 노래를 한 곡 추천한다. 홍순관의 [춤추는 평화]앨범의 수록곡 <쌀 한톨 의 무게> 라는 곡이다. 이 앨범은 현재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에서 [노래와 이야기 Live - 춤추는 평화 (엄마나라 이야기)]라는 앨범으로 음원을 다운 받을 수 있으며 그 음반 안에 이곡이 수록 돼 있다. 가사를 살펴보자. 최대한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쌀 한 톨의 무게 (홍순관 글/신현정 곡,편곡)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최대한 천천히 읽었기를 바라면서, 요즘 우리 가요는 물론 교회노래도 ‘시’를 잃어 버렸다. 요즘 노래들에서는 정말 시적을 가사를 찾기가 너무 드물다. 아니, 거의 불가능 하다. 그렇기에 이곡은 정말 보물이 아닐까 싶다.

이 아름다운 가사에 더 무언가를 보태고 싶지는 않다. 쌀 한 톨에서 시작해 생명, 평화, 농부를 거쳐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홍순관님의 묵상은 정말이지 깊다. 지금껏 살면서 쌀 한 톨의 무게를, 아니 쌀 한 톨을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 볼 생각조차 못해봤던 나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묵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가사처럼 우리는 우주를 매일 밥 먹듯이 먹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쌀 한 톨,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놔도 무게를 느낄 수도 없는 그 가볍고 조그만 쌀 한 톨이 지금 당신과 나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는 쌀 한 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 노래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니, 부활절이 되기 하루 전날 밤도 좋겠다. 3분 29초 동안의 무게는 또 얼마나 될까.


0′

그러니까, 밥 남기지 말자. 남길 것 같으면 애초에 덜고 먹던지!

_거의 편집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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