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다르덴 자매, 그러니까 내가 어릴(?)적에는 어쨌든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고로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보기 보다는 닥치는 대로 무슨 영화든지 보았다. 어떻게든 더 많은 영화를 보려고 어디든 쫓아다녔더랬다. 취향이라는 것이 쌓이기 이전에 꾸역꾸역 그 기반을 쌓았달까. 그렇게 대학에 간 후로는 어려운 영화들이 좋았다. 뭔가 있어보였고 생각할 줄 아는 것 같았고 ‘나 영화 좀 봐’라고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현재, 일개 직장인이 된 후로는 쉽고 편한 영화, 보고 나서 기분전환이 되는 가벼운 영화가 한동안 좋더니, 이제는 “불편한 영화”에 마음이 기운다.


   '불편함' 이라니 이렇게 주관적인 표현을 영화에 끌어와도 될까 싶지만 그런 개인의 불편함을 끌어내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각자의 불편함을 끌어내어 불편해하고 그 불편함을 끝까지 지켜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가능하면 그 불편함 이 어찌되면 해소될지를 고민해 보는 것, 해소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의 부채를 같이 짊어지는 것.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조금 무겁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나 싶지만 앞으로 우리 꼭지가 하려는 이야기들이 그러하므로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불편한 것에도 종류가 있을까?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편한 것도 다 각각이라 각자의 불편함이 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지점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또 사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해도 인간이라서 상할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 있다.

모두의 불편함을 담아낼 수는 없으니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들을 풀어봐야겠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쓰고 보니 꽤 추상적이지만 나에게는 꽤 확실하게 와 닿는 실체가 있는 것들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를테면,

단순하지 않은 것, 명쾌하게 딱 떨어지지 않는 것들.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 선악이 불분명해서 구별이 힘든 것.

어떤 측면에서든 결핍의 상태에 놓이는 것.

영원하다고 믿는 것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숨기려던 비밀이 드러나는 것.

세상과 기준이 달라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 그래서 외로운 것.

선함이 오만함으로 전복되는 것.

균형이 깨진 것.

폭력과 멸시에 둔감한 것.

결국엔 자유하지 못한 것,

나를 어딘가 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


   대충 이러한데, 실은 무수히 많지만 이쯤에서 정리해야겠다. 와 닿지 않을 당신을 위해 이 불편하고 거슬리는 감정을 좀 더 풀어보자.

“나를 매이게 하는 모든 것” 예를 들면 “가족”, 가족은 나에게 힘이 되고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인 동시에 나의 결핍의 원천이요, 나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오로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진 나를 매이게 하는 것. 이런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세상으로 끌어낸 많은 작품들이 있다. 예술로 승화된 많은 작품들 중 여기에서는 영화만 다루려 한다. 구체적인 영화들은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하하하하


   “폭력과 멸시에 둔감한 것”, 예를 들면 내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가는 타인의 불편함들. 그 폭력의 형태가 너무도 다양하여 폭력인지 알아채지 못해서 더 불편한 세상의 진실들도 영화에 담겨있더라. 구체적인 영화는 그 다음호를 기대하시라. (흐흐흐흐) 그런 불편함을 끝까지 지켜보고 느끼고 멋대로 생각해서 떠들어보자는 것이 당신이 시간을 들여 읽어줄 이 글의 목적이다.


0.5호, 부활절 그리고 불편한 영화들


   성금요일이 지나고 부활절에 발간될 우리 “0.5호”를 위해 첫 호 발간의 워밍업으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을 모았다. 2004년 개봉이래로 부활절 단골 영화가 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제외하고 예수의 수난의 비극과 수난의 전복,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한 영화!는!


딱히 없더라.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인간의 수난과 부활(?)로 비견하는 일 역시 나에게는 불편해서 다른덴 자매의 또 하나의 가족, 다르덴 형제의 영화 두 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면피를 해보고자 한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말이다.


다르덴 형제의 초기작인 <로제타(1999)>는 나에게 가장 불편한 영화이자 가장 보물 같은 영화이다. 이게 바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구나’ 각인된 작품이랄까. 제일 처음 본 작품은 <아들(2002)>이었는데 그 불편함이야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로제타>에 대한 연민이 나에게는 더 컸다. 어린 소녀 로제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태도에 굴하지 않아야 하고, 허기짐과 차갑고 시린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어린 소녀. ‘소녀’로의 삶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가엾다는 말도 민망한 소녀의 삶. 채찍이 없는 수난이 거기에 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부활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더 무겁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운 어린 소녀의 삶.


   

  

   감독의 카메라는 로제타와 딱 붙어서 숨을 헐떡이고 분주하게 흔들린다. 그런 감독의 시선은 로제타와 함께 하면서 로제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소녀의 삶을 위해 관객이 해줄 것 역시 그것 뿐 이리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는 시리고 아픈 배에 헤어드라이어의 작은 온기를 가져다 대므로 스스로를 보살핀다. 로제타는 지난 우리의 과거도 아니고 지난 추억의 회상도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로제타가 나 자신일수도 또는 그를 냉대하는 시선이 나로부터 비롯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수난이란 끊을 수 없는 결핍의 고리이며, 이 땅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 고단한 삶이다. 그녀의 수난은 자신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원죄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고) 그녀의 고단한 삶은 그저 주어진 자신의 생이다. 그 사실이 다시금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삶의 수난인 것이다.


   또 다른 영화 한편을 보자. 다르덴 형제의 최근작 <자전거 탄 소년(2011)>은 평소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매우 다른 따뜻한 영화다. 시릴이라는 소년을 끊임없이 믿어주는 사만다라는 여성을 통해 시릴의 삶이 새로운 ‘집’을 얻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초기의 다르덴 감독의 영화가 수난가운데 버려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그 수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따라다녔다면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사만다라는 이웃을 통해 구원받는다.



   부활이 왜 기쁜가. 부활의 기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쁨이라기 보다 또는 다시 태어남에 대한 기쁨이라기 보단 ‘나의 집, 본래 내가 속한 곳, 내가 돌아가야 할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이 아닐까 한다. 기독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미래는 이 땅에서 그곳에서 사는 것 같은 기쁨을 누리다 결국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 가정이란 그런 본향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그것’이다. 그것은 생육적으로 맺어진 가족의 의미가 아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정이 되어주는 약속이자 구원인 것이다. 시릴의 아빠는 아들을 낳았지만 진정한 ‘집’이 되어주지 않았다. 사만다는 시릴을 낳지도 기르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시릴을 만난 순간부터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돌보고 돌아갈 곳이 되어 주었다.


   우리의 수난은 돌아갈 곳, 의지할 곳이 있을 때에 구원받는다. 가여운 로제타의 수난은 세상 밖의 감독의 시선 외에는 어떤 위로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오로지 헤어드라이어의 온기만이 세상 속에서 그녀가 가진 모든 위안이다, 그 위안이 너무도 작고 볼품없어서 마음이 아리고 슬퍼서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다. 처절하게 가족에게서 가정을 요구하는 시릴은 사만다라는 쉴 곳을 얻으므로 구원받는다. 그 구원이 영원한 것인지의 여부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쉴 곳, 돌아갈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린 소년에게 쉴 곳이 되어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의 부활을 이뤘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영화를 떠올리니 다시 마음이 뭉클해진다. 어쨌든 이 두 영화를 보시라. 부활절과 연결하려는 억지가 드러나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불편함은 그러니까 불편해서 쓸모가 있다.


   불편한 지점에서 생각은 시작된다. 거기로부터 좋은 질문이 나오고, 좋은 질문으로부터 해답이 나온다. 제대로 된 질문은 언제나 해답을 갖고 있으니, 영화라는 완전하고 멋진 질문에서 나름의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정답이 아닌 나름의 해답을 원한다. 적어도 다르덴 자매는 그러하다. 영화를 대하고 그로부터 풀어낸 나름의 해답은 이왕지사 불편한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마치 불편함이라는 응축된 균을 미리 맞아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미리 정비하게 해주고 좀 더 제대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해주는 것. 그래서 안심(安心)하게 된다. 그렇게 함께 안심하고 또 다시 불편할 준비를 함께 해보자고 이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당신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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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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