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4 Les Essais

4호 - 4 2013. 8. 20. 11:34 |




思  사색과 수필

   개인적으로 명상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 사색에 빠지곤 한다. 어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것은 주로 어떤 ‘가능성’을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꿈을 꾸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면서 목적지 없이 표류한다. 자유롭게 흘러가는 생각들을 따라 가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다. 간혹 그 안에서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찰나의 반짝이는 영감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생각들을 실제 글로 옮겨보면, 대부분 하찮고, 정신 사납고, 알 수 없는 글이 되기 쉽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질서정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정돈된 글로 옮길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들을 찬찬히 뒤돌아보고, 기록하여 조금씩 다듬어 나가다 보면, 그 기록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시도를 통해 내어놓은 결과물을 나 자신이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시도의 결과물을 흔히 수필, 혹은 에세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던 위대한 수필집 한 권, 아마도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수필집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한다.


“독자들이여, 이 책은 제법 정성을 기울여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단지 나의 집안일이나 사삿일을 이야기하려는 것일 뿐, 그 밖의 다른 의도는 없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독자를 위해서거나 나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은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다. 다만 나의 일가권속이나 친구들이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조만간 그렇게 될 테지만- 이 책에서 나의 어떤 모습이나 감정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더욱 올바르고 생생하게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이 세상 사람들의 호의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면,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꾸미고 조심스럽게 검토한 다음 세상에 내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여기서 생긴 그대로의 나 자신을,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채로의 나 자신을 보아주기 바란다. 내가 묘사한 것은 곧 나 자신이다. 따라서 나의 온갖 결점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나는 되도록 숨김없이 타고난 나 자신을 그대로 내놓고 싶다.” 

- 몽테뉴‘수상록’서문 -


   단언컨대, 다양한 글쓰기의 구분 중에서 가장 그 범주가 넓고, 사실상 정의하기 어려운 분야가 수필일 것이다. 나는 굳이 구분하자면, 수필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매우 자유롭지만, 분명히 작가와 독자가 존재하고 작가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야 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누가 써도 상관없는 글이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은 우리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수많은 독자를 대면시켰다. 우리는 이제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꺼내 보이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보통 독자가 존재하는 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 채로, 글을 쓰는 것 같다. 


   수상록이란 말 자체가, 수필(essay)이라는 말이다. 이 수상록이라는 것은 하나의 명사로서 몽테뉴의 수필을 의미하기도 한다. 몽테뉴는 수필이라는 장르를 대중화시킨 첫 번째 인물로 알려졌다.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를 그만둔 직후부터 1592년 죽을 때까지 수많은 첨삭을 거쳐 탄생시킨 3권짜리‘수상록’은‘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원조가 됐다. 몽테뉴가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에세(Les Essais)’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시도, 경험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몽테뉴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사색의 결과물을 담았다는 집필 의도를 표현하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었고, 그것이 언젠가부터‘수필’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문학작품과 실용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글을 의미하는 뜻으로 확장된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두서없이 흘러가는 대화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돈되고 꾸며진 글에서는 그의 안에 숨겨진 생각의 파편들을 해석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잘 써진 수필들이 우리에게 친절한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몽테뉴의 수필에도, 몽테뉴가 던진 화두들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의 흐름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좀 더 쉽게 그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세계 속에서 나의 세계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이 독자에게 있어 수필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좀 더 치열하게 생각하고, 읽기와 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수필을 읽자! 그리고 수필을 쓰자! (이 무슨 선동 구호 같네)



死  죽음에 대하여

   한동안 빗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면, 온갖 것들이 다 가라앉는다. 먹먹한 기분에 잠겨 질식할 것만 같았다. 축축한 날씨, 눅눅한 공기는 나를 쉽게 아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함이나 고통은 나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지기 쉽게 만들어 준다.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삶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과 삶의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은 내가 유한한 인간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진다. 나는 오늘도 그저 살아가고 있고, 그것은 전혀 놀랍지도, 감동적이지도, 심지어 독창적이지도 않다. 나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한숨을 쉬고, 어쨌든 다시 그 사실을 가슴 깊숙이 묻어버린다. 그러나 인생에서 죽음만큼이나 명백한 것이 또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자각되는 순간 죽어가고 있다. 죽음은 나의 유일한 목적지, 존재가 도달하는 종착역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당연히 나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상상할 수도 없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많은 두려운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 노후의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에 대해서, 삶의 수많은 불행을 생각할 때, 또한 그것들을 견뎌낼 또 다른 삶의 희망들을 상상해 낼 수 있다. 절망적인 상상은 희망적인 상상으로 상쇄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사고가 존재로부터 출발한 바,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하는 일과도 같다. 거긴 어떤 기분도 없다. 그리고 어떤 기분도 아닌 기분이란 것은 없다. 그 불쾌함은 정말이지, 묘사하기 어렵다. 

   나는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나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는 아주 다른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타인의 경우에 비추어 반성하거나 본받을 수 없다. 이러한 불안은 나로 하여금 손쉽게 종교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믿는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이러한 방식으로 해소한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한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각주:1]


   종교의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종종 ‘사후세계’를 상상하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상상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잠에서 깬 내일의 일과를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죽음을 죽음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내가 믿는 종교에는 죽음이란 없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강력하지만, 폭력적인 선택지. 파스칼의 내기다.[각주:2] 하다못해 이것만으로 죽음에 대한 모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진다면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보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불안이 더 있다. 삶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로부터, 절망하거나 혹은 위안받는다. 그것을 통해 위안받는 사람들은 우리가 죽음을 통해 온전한 세계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죽음을 통해 온전해진 나는, 과연 나 자신일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불완전하므로, 그리고 바로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나 자신인 것 아닌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다면, 그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나’인가? 나는 결국 죽음의 공포가 망각의 공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망각의 일상을 통해서, 죽음의 단면을 엿본다. 삶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과거의 나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어쩌면, 내 삶의 잣대는 기억함에 있다. 나는 기억하기 때문에 ‘나’로서 살아있다. 어느 순간 내가 ‘나’라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가 나라는 존재의 죽음과 동일하다. 때문에,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망각이라는 가정이 더해졌을 때, 별로 다르지 않은 선택지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필에서, 죽음에 대해서도 긴 이야기를 했다. 사실 몽테뉴의 수필 중 많은 것들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노년에 이 수필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도 존재의 근원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생애의 목표는 죽음이다. 죽음만이 우리가 겨누는 필연적인 대상이다. (중략) 어떻게 사람이 죽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고, 어느 순간이건 죽음이 우리 목덜미를 잡고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몽테뉴‘수상록’중-

   

   몽테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도 좋으니 그리 해보라고 말한다. 비겁을 무기로 써도 좋다. 죽음을 외면하고, 죽음 자체를 망각해도 좋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소용 있을까? 결국, 몽테뉴는 죽음 그 자체에 당당히 맞서서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죽음을 범상하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음과 친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테뉴는 ‘지금부터 백 년 뒤에 우리가 살이 있지 않으리라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부터 백 년 전에 우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고 슬퍼하는 것과 같은 바보 같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없는 것들,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해 오히려 필요 이상의 걱정과 공포를 느낀다. 쇠약이나 질병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보다는 건강했을 때 훨씬 병을 두려워한다. 몽테뉴는 죽음도 역시 그렇기를 바란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간다면,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철학은 이미 ‘나’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서, 이제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안에서 몸부림 치고 있다. 뻔한 말이지만, 이럴 때 독서가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아직도 죽음에 대해 잘 정리된 무언가를 써내려갈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며, 여전히 마주 대하기가 껄끄럽다. 어쨌거나,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죽음은 시시각각 내 주위를 도사리고 있다. 망각의 공포와 쇠약의 공포, 외로움의 공포가 죽음과 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어쩌면 몽테뉴의 말처럼, ‘사실 우리는 죽음을 둘러싼 저 무서운 얼굴과 모든 형상을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결국 죽음 주위를 도사리고 있는 공포들일 뿐이며, 죽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_대충 소설가_




이미지 출처

http://www.culturetheque.org.uk/



  1. 고린도전서 15장 51-55절 (공동번역) : 나는 개신교 신자지만, 현재 대한 성공회와 한국정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이 공동번역은 참 맘에 든다. 같은 내용을 우리가 흔히 보는 성경에서 찾아보면 쉽게 동의할 것이다. [본문으로]
  2. . ‘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내기를 한다면, 파스칼은 신이 존재하는 쪽에 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었건 믿지 않았건 간에 결과는 똑같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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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뜨 빼쩨르부르끄[각주:1]의 뽄딴까 운하에는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다리가 없다. 운하에는 관광객들을 실은 배들이 느긋하게 지난다. 수십 개의 다리 밑을 지나고, 수십 명의 사람들과 다리 위에서, 아래에서 눈을 마주친다. 낮에도 그러하지만, 백야가 펼쳐지는 여름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이 다리 위에서 운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는 누군가를 인연으로 만나기도 하는 것. ‘나스쩬-까’[각주:2]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 운하를 건너는 다리는 낭만적인 공간이다. 몽상가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러시아에 있었다. 22일, 6월, 2013년.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사진마다 날짜와 시간을 꼬박꼬박 새겨 넣었다. 지워버릴 순 없지만, 버튼 하나로 수정할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300년이 된 도시에서 쉽게 감상적이 되거나, 자주 중2병 걸린 허세남이 되었다. 누구라도 300년이 된 도시에 서 있으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를 여행하기 위한 준비물이랍시고, 타블릿 PC에 가득 넣어갔던 러시아 문학가들의 작품은 여행 며칠 만에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의 나스쩬까처럼 짧은 환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즉, 간단히 말하면 도둑맞았습니다.) 그렇다. 바로 나스쩬까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짧은 단편소설은 그렇게 내 손을 떠났다. 일정에 쫓기다 보니 진득하게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 짧은 단편소설, ‘백야’를 읽었다. 읽었다고 하기에도 모자라다. 나는 소설 ‘백야’를 봤다. 읽었다는 느낌만 남아있는 상태,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그 책에 대해 설명하거나 소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러시아에서 소설 ‘백야’와 ‘백야’를 봤다. 그런 것도 낭만이 될 수 있는 도시일까, 상-뜨 빼쩨르부르끄. 


   말하자면, 나의 이 낭만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견된 것은 낭만이 아니라 낭만에 대한 추억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추억할 뿐이다. 낭만적인 것은 그런 것이다.  지난 뒤에 발견됨으로써 소중해지는 것. 그것은 이렇게 마감에 쫓긴 새벽에도 존재하고, 하염없이 늘어져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의 소나기에도 존재하는 것. 우리가 끊임없이 묻는 당신의 안부에도 사실 낭만이 존재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만, 설레고 마는 것이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 했던 책들은 모두 저 스웨덴의 낯선 사람 손에 들려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이 순간 낭만을 떠올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한번 가보시라. 쌍-뜨 빼째르-부르끄-


2013년 7월 한국. 깜깜한 밤.

 _대충 소설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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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ldaga.tistory.com/33


다운 없이 지금 당장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http://issuu.com/noldaga/docs/___________3_______________________





  1.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 표트르대제가 1703년 설립하여 1713년 천도,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러시아 제2의 도시,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리우며, 레닌그라드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진 도시. 쌍-뜨 빼쩨르부르끄. [본문으로]
  2. 나스쩬까 :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다리 위에서 슬픔에 잠긴 채 서성이는 모습을 본 몽상가인 주인공 청년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 매달린 여인의 이름. 헤어진 애인을 만나기로 한 다리에서 매일 기다리지만, 애인은 오지 않고, 이윽고 진실하게 애정을 고백하는 몽상가 청년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옛 애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겨버린 괘씸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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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여름 사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또 여름이 왔다. 지난여름과 올여름 사이. 찬바람 쌩쌩 불었던 겨울의 기억들은 신기루 같다. 지나간 시간은 늘 모호하고, 안개처럼 뿌옇다. 사소한 것들이 계절을 알린다. 이를테면, 어느 순간 코끝을 찌르는 싸한 풀 냄새, 한낮의 태양에 달궈진 목덜미의 후덥지근한 느낌 같은 것들. 이런 기억들은 너무나 사소해서, 평소에는 떠오르지도 떠올릴 수도 없지만,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감각되는 기억이다. 

   ‘아! 올해도 벌써 여름이구나.’하는 찌르르한 감각. 우리들의 삶 속에는 의외로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 많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수많은 모호한 지점들, 사실 시간이야말로 모호한 것이다. 세계는 초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초 단위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 모호함의 사이를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영역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의지하여 계절과 계절 사이를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한다. 때문에 우리의 이해 방식은 결코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지혜일 수도 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해답을 갈구한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질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답은 늘 충족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갈망하게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답은 언제나 단답형의 간결하고 짧은 대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히 이해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 아마도 해답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도.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위의 질문을 구글에 물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우리는 본 적도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 능력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상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장난 이지만, 우리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물론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 있다는걸 반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상력이란 것은 신비하다. 우리는 어째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인류가 상상해왔던 많은 일이 상상에 머무르지 않았던 무수한 사례가 존재한다. 물론 추상성과 구체성의 차이는 있겠으나,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온 역사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 아니겠는가.


   문학작품이나 미술 작품, 다양한 예술의 분야에서 우리는 상상력의 발현을 경험한다. 본 적도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 한다. 영화나 소설의 분야에서 나는 특히 SF라는 장르를 좋아하는데, 과학적 상상력의 요소보다는 어떤 가상의 상황을(사고 실험과 같은) 현실감 있게 묘사해내는 시도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사회의 어떤 요소들을 결핍시키거나 과장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회나 인간을 설계해보는 재미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현재 나와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사이’라는 모호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 ‘42’라는 숫자가 떠오른 것은 한 권의 책, 혹은 영화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은 글의 흐름은 사실상 여기까지 오기 위한 복선이었다고 말해두겠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과학소설 시리즈이다. 1978년 BBC의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한 이후 여러 다른 형태로 변형되면서, 몇 년이 지난 후 점차적으로 국제적인 멀티미디어 현상이 되어갔다.   

   이 시리즈는 많은 개작물을 남겼는데, 1979년과 1992년 사이의 소설(맨 첫권의 제목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1981년의 TV시리즈, DC코믹스에서 93년과 96년에 출판된 만화책, 팬들이 만든 타월, 2005년에 개봉된 동명의 영화<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등이 나오기도 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다른 버전들(소설, TV시리즈, 컴퓨터게임, 초기의 영화대본)등을 모두 애덤스 본인이 적었으며, 몇몇 연극은 더글러스 애덤스가 새로운 요소/제제를 갖고 썼다고 소개 되었다.


1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권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5권 <대체로 무해함>(Mostly Harmless)

6권 <그런데 한가지 더> (And Another Thing...)   

http://ko.wikipedia.org/wiki/<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인용_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물 중에서 6번째 작품은 예외적으로 더글러스 애덤스의 작품이 아니라 이오인 콜퍼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애덤스 사후에 그 부인에게 허락을 얻어 동일한 시리즈물로 출판된 책이다. 어쨌든 이상의 총 6권의 작품을 모두 합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라고 부르고 있고, 처음 시작이 라디오 드라마였던 만큼,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파생되어 영국에서는 사회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기도 했었다. 

   국내에는 2005년 애덤스의 작품인 5권까지의 시리즈만이 합본으로 된 거대한 양장본이 출판되었고, 현재는 시리즈 6권까지 각각 분리되어 있는 세트가 출간되어있다. 장담하건대 그 거대한 합본 양장본은 아마 누구라도 보면 갖고 싶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2005년에 제작된 영화가 상당히 히트한 덕분에 국내에 출판되지 못했던 4권 이후의 내용이 포함된 합본이 출판될 수 있었고, 책도 국내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이 다분히 영국식 말장난의 블랙 코미디와 꽤 난해한 철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인용하고 있어서, 영화만큼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 책은 재밌다. 2004년 이전에 이 책을 국내에 수입하던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5권이 국내에 출시되지 않자, 국내의 SF 마니아들은 외국의 책을 직접 번역하여 그 내용을 교류하는 커뮤니티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1980년대에 지어진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진보된 SF인 동시에 당시 세계와 사회를 통렬히 비꼬는 블랙코미디 요소에 연신 감탄이 나온다. 


   “사물들이 겉보기와 항상 같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구 행성에서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돌고래보다 지능이 높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바퀴, 뉴욕, 전쟁 등 엄청난 일들을 성취해내는 동안 돌고래들이 한 일이라곤 물속에서 빈둥거리며 재미나 보는 것밖에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돌고래들은 자신들이 인간들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다고 항상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정확히 똑같았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돌고래들은 지구 행성이 곧 파괴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인간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사소통 노력은 대부분 재미있게 축구공을 차올리려고 한다거나 물고기 한 토막을 얻어먹어 보겠다고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경고하기를 포기하고, 보고인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자신들만의 수단을 통해 지구를 빠져나왔다. 돌고래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뒤로 두 번 공중제비를 돌아 고리를 통과하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휘파람으로 부는, 놀라울 만큼 정교한 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인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_<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발췌_


42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궁금해할 것이 있다. 대체 ‘42’가 무엇인가? 그럼 아마 영화나 책을 본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지”      

   이 재미있는 기호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과거 고도로 발달한 존재들이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심오한 생각’이라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게 된다. 이 슈퍼컴퓨터는 너무나 뛰어나서 그 해답을 계산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750만 년이나 걸리게 된다. 이윽고 ‘심오한 생각’은 그들에게 자신이 계산한 답을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42라는 숫자였다. 여기에 대한 수많은 농담과 다채로운 해석들이 있지만, 작가 스스로 결국 ‘별 뜻 없는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42. 한국말로는 ‘사십이’ 혹은 ‘사이’가 되기도 하는 저 숫자가, 왠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한 걸음 더 성장한다. 우리네 인생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고, 거기엔 어떤 해답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당신이 찾으려는 해답은 대체 무엇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그거다. 우리는 삶의 어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존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대답이 42라고 해보자. 무엇이라 한들 납득할 수 있을까? 좀체 단순할 수 없는 인생이란 것에서 유일무이한 해답이란 결국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낳게 한다. 그 답이 대체 무슨 뜻인가? 바로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책 속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인(42라는 답을 계산했던) ‘심오한 생각’은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질문을 알아야만 내가 말한 해답의 의미를 알 수 있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한 질문을 하고, 적절한 대답들을 찾는다. 우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그 자체로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창밖은 밝아오고, ‘책 소개’와 ‘오늘의 일기’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긴 글을 마치는데, 어떤 마무리가 적절한지 도무지 적당한 문구가 떠오르질 않는다. ...sigh.

_대충 소설가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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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일 선물을 잘 못 고른다. 다른 사람의 생일을 너무 잘 까먹어서 애당초 선물 사는 걸 잊는 경우가 대부분인 걸 고려한다고 쳐도, 하여간 생일 선물이란 것만큼 고르기 어려운 것도 잘 없다. (사실 뭐 그리 대단한 날도 아니잖은가?) 서로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주변의 수많은 지인, 직장동료니, 학교 친구니 하는 가깝지만 먼 관계들인 사람들의 생일이란, 잊어버리면 실례이지만 또 일일이 챙기자니 부담스러운 그런 것이다. 

   

   하여간, 어찌 됐든 뭔가를 선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하자.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그런 사람의 생일이라고 하자, 아니면 존경하는 누군가이거나 호감 있는 이성이라고 해도 좋다. 너무 비싼 걸 고르자니 주머니 사정이 부담되고(혹은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것도 같고) 너무 싼 걸 고르자니 아예 하나마나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이런책을 선물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적당한 가격대를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선택 중 하나가 바로 책 선물이다.상품권이나 먹는 음식처럼 쓰고 없어지는 선물보다는 좀 더 의미 있으면서 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선물’ 로서 책은 매우 훌륭한 선택지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 선택지를 취하는 것은 매우 고심되는 일인데,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대부분 꺼리는 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책도 책 나름이겠지만, 책이란 것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수많은 언어, 그리고 메시지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책이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파생시키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한테 ‘성공하는 7가지 습관’ 같은 책을 선물했다고 가정해보자. 대체 그걸 선물 받는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까. 아. 난 참 나의 성공을 바라는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혹은, 내 인생이 그렇게도 패배자 같나 라는 자괴감을 들 수도 있겠다. 적어도 “넌 성공한 인생이야”라는 의미가 아니란 점은 분명하잖은가. 

   

   애써 책을 골라 선물했다고 해도(혹은 받았다고 해도) 선물 받은 책을 펼쳐보는 경우도 사실 드물다. 사람들이 책이란 걸 워낙 멀리하고 살아서이기도 하겠으나, 선물을 주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골라진 책이 나의 현시적 구미에 당기리라는 보장이 별로 없기 때문이겠다. 그렇다고 고르는 사람으로서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선물하기란 영 껄끄러운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이미 그 사람이 읽었을법한 책을 고르면 아무래도 곤란하다. 그 사람이 그 책을 절대로 안 읽었으리라는 확신이 생긴 책이라야 선물해줄 의미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해야 선물할 가치가 있을 것 아닌가. 

   

   원래 최고의 선물이란 ‘무척 갖고는 싶지만 내 돈 주고 사긴 싫은 물건’ 이라고들 하는데 어쨌든, 책을 선물할 때는 그 사람의 수중에는 분명히 이 책을 샀을 리 없지만, 나에게 이 책을 선물 받고 서는 갑자기 그 책 갖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점들을 되새기면서 나름대로 책을 선물할 때의 선물 구매요령에 대해 정리해 봤다.

   

   첫째, 신작 위주로 책을 고르면서, 선물을 받을 사람이 작가의 전작들을 소지하고 있는 경우 해당 작가의 신작을 주는 것이다. 안전한 선택이다. 그렇게 내가 선물한 책이 영영 책꽂이에서 뽀얀 먼지만 먹다가 잊히게 될 위험을 피했다. 하지만 이 방법의 경우, 선물을 받는 사람이 그 작가의 열렬한 팬이라면 당신보다 먼저 서점에 갔을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하겠다.

   

   둘째, 절대로 읽힐 리는 없지만, 책장에 꽂아둠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다 하는 책들을 선물하는 것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갖고는 싶지만 내 돈 주고 사긴 아까운 책’ 을 사는 것이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야 하겠지만, 내 경우는 여행 서적들이 그렇다. 

   

   셋째, 오로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서, 자신에게 감동을 주었던 책을 선택해서 선물하는 것이다. 물론 선물할 때 그 말을 빼먹으면 안 된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고지하지 않으면 상대가 난감할 수 있다. 대상이 읽고 싶은 책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주길 바라는 책을 선물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고, 선물해준 책을 안 읽었을 때, 섭섭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만,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책 선물의 묘미가 있는 방법이다. 책을 선물로 받고 싶어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이 방법의 선물 받기를 선호할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여행서적 같은 산문집   

   그 후에 고민하여야 할 것이 바로 책의 내용과 제목이겠다. 서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생일 선물로 주는 책인데, 내용이 재밌고 좋다 한들 ‘바보들은 다 죽어버려라’ (2009, 카를르 아데롤드)라든지, ‘특성 없는 남자’ (2013, 로베르트 무질)같은 책을 생일에 선물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책 선물은 편지를 동봉한 선물과 다르지 않다. 사실 이것이 책 선물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일 중의 하나인데, 편지와는 달리 내가 모든 텍스트를 의도할 수가 없음에도, 상대는 그 안에서 수많은 의미를 읽어 내기 때문이겠다.

    

   ‘좋은 책을 선물하면 되지 않은가’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본디 좋은 책이란, 독자들의 가슴 한구석을 쓸쓸하게 만들기도 하고, 기분 좋은 햇살을 순식간에 우중충하게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생일을 맞이하는 누군가의 기분을 쓸쓸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아니라면, 포괄적인 의미의 좋은 책을 고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따라서 생일 선물로 골라야 할 좋은 책이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협소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식상한 제목에, 다디단 내용만으로 꽉 찬 무성의한 시집들이 간혹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책 선물에 고뇌하는 지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처음엔 생일 선물로 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해 볼까도 생각을 해 보았으나, 역시 그런 선택의 고민을 누군가가 대신해준다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책을 선물하는 일도, 선물 받는 일도 모두에게 좀 더 재미있는 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덧붙여 내 생일도 5월이고.

_대충 소설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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