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평생에 이번 여름처럼 더위와 습도를 온 몸으로 경험하는 계절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서울엔 폭염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다는데, 최근 처한 상황 덕에 절절히 더위와 습도를 겪어내는 여름이다. 나 이 정도로 여름을 타지는 않는데. 절대 보지 않는 공포영화 처방이라도 내려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니 사실 말 다했다.


   그런 맥락에서 ‘4’는 이 여름의 내게 불운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원래는 괜히 오싹해 했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무서워서라도 서늘함을 좀 가져다 주지 않으련?’ 하는 바람, 혹은 ‘새벽 4시는 그래도 좀 시원하겠지 않을까?’ 정도의 안도가 먼저 떠오른다. 아 이쯤 되면 좀 슬퍼진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서늘한 그림, 혹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작품을 소개해보려 한다. 사실은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더위에 취한 머리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이니 아니라고 해도 이해를 구한다. 나처럼 축축한 공기에 절여진 마음들에 공감을 구한다. 아…… 습도. 

 

칼을 나의 붓 삼아

   처음 이 작품 앞에 섰을 때에도 그렇고 여전히, 이 작품을 보면 소리가 들린다. 슈악! 종이의 단말마 비명소리가. 종이에 숨을 끊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여름, 서늘한 그림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이 먼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a>, 

1960, Tate Collection


   굳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골머리를 앓다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서늘한 정적을 만들어버리는 한 마디 말이 더 효과 있는 것처럼, 폰타나의 작품은 칼집 하나로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슈아악 하는 종이의 비명을 상상해보면 효과는 더 배가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무서운 이야기라고 해도 고전적인 풍으로 풀어낸그림들은, 무서워도 뭔가 한 여름에 몇 겹 긴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간 것처럼 답답하다. 반면 폰타나의 그림은 저 칼집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곧 뒤통수를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이.


   하지만 그게 무엇이건 간에 일단 이게 뭐길래 액자 프레임에 곱게 넣어 벽에 걸었나 하고 의아해지는 게 사실 가장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볼 때 온갖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작품들에 둘러 쌓여있던 터라, 상대적으로 별 충격이 없었더랬다. 그러나 여전히 캔버스에 칼집을 내어서……뭐? 그걸 내가 못할까봐? 할 수 있다. 충분히.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는 아르헨티나에서 자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조각가이자, 화가이고 이론가이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집중해서 공간주의(Spatialism, Spazialismo) 선언문을 다섯 차례 내어가며 공간주의를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였고, 2차원을 벗어난 회화를, 3차원을 벗어난 조각을 구상하고 고민했었던 작가이다. 이를테면, 흔히 회화와 조각을 다른 종류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점, 즉 전자는 2차원적 캔버스에 머무르고 후자는 무게와 덩어리가 느껴지는 3차원의 소재에 머문다는 바로 그 통념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앞서 소개한 <공간개념 ‘기다림’>도 마찬가지다. 저 찢겨진 자국으로 종이가 앞뒤로 벌어져서 생긴 저 공간, 그리고 그 구멍으로 인해 뒤에 나타나는 배경까지도 생각하면 이 작품을 전통적인 회화로 볼 수는 없다. 평면을 벗어났으니 분명 조각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또 조각이라고 하자니 뭔가 애매하다. 프레임에 든 건 종이 한 장인걸. 결국 작품의 제목처럼, 회화도 조각도 아닌 그만의 ‘공간개념’을 만든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화는 현실이나 상상의 무언가를 표상해야 하고, 그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기를 사람들은 바랐다. 그러나 당시 개념미술의 다양한 작가들이 그러했듯, 폰타나 역시 이미지의 반영, 선적 내러티브를 부정하고선 그만의 추상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선이야 쉽게 긋는 것이라 하여도, 캔버스 앞에서 칼로 쭉 선을 긋는 데까지 이르는 건, 또 공간을 창조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칼을 손에 쥐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캔버스를 찢었다’니, 이쯤되면 그마저도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폰타나의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연작으로 계속된다. 평면을 칼질로 쭈욱 찢기도 하고 이후에는 구멍을 뚫기도, 초크와 금속, 잉크, 돌을 이용한 작업도 선보인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공간개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이 2천여 점에 이른다. 그 중에 가장 알려진 것이 앞서 보았던 찢기 작업과 구멍 뚫기 작업인 것이다.

   

   더워서 그런가? 작품의 미학적 의미나 미술사적 중요성 이전에, 난 일단 시원하고 후련하다. 많은 고민과 실패, 연구가 있은 후이겠지만, 캔버스를 찢은 저 틈새가 영화 ‘트루먼쇼’에서 나오는 것처럼, 뜨거운 햇살을 피할 출구 같기도 하고, 목덜미에까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올 것도 같다. 종이 참 두꺼웠을 텐데, 그 소리는 얼마나 또 시원했을까. 쉬이익- 그리고 캔버스를 찢음으로써 2차원적인 평면에 머물던 개념을 찢은 셈이니, 대단하다. 


   매일매일 캔버스를 앞에 두고서, 우리는 여러 고민을 한다. 어떻게 칠을 해야 사람들이 예쁘다고 할까, 내 부끄러운 이 검은 점을 가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내 캔버스는 이미 너무 더러워서 이젠 붓을 잡고서 이 앞에 서 있는 것 조차 힘들 때가 있구나 등등. 평면에 머무르는 일상의 잡념과 연민으로부터 일종의 전환이 필요하다, 폰타나의 칼질처럼. 그저 찢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을 3차원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시원한 전환, 좁은 고민으로부터 깊이와 시야를 바꾸어버리는 그런 칼질. 구태여 안고 살아가기는 하나, 찢어버릴 잡념은 사실 또 얼마나 많은지. 폰타나의 단순하나 차원을 다르게 했던 공간 앞에서, 내 번잡한 공간을 돌아본다. 음 전환이 필요하다. 다시 또 다시.


그런데 사실 제일 무서운 것은 말야

   그 와중에 다른 작품 하나 더 얹어본다.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 사실 ‘4’라는 숫자 하나로 무섭다느니 부정의 기운이 있다느니 하는 건 이젠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다만 숫자 4로 표상되는 어떤 공포나, 무서움의 이미지가 있을 뿐. 그럼 내가 진짜 무서워하는 건 뭘까. 그래, 내가 어떤 공포 괴담보다 무서워하는 건, (숫자 4를 연관 지어 말하자면) 마음이 떨리는 새벽 4시에 전화가 되었든 문자가 되었든 그에 대해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서운 새벽 4시보다, 무서운 새벽 4시에 대해서 속 깊이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 더 무섭다. 일종의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단절감(disconnectedness), 부재. 그래 더위에 취해 진심을 말해보자면, 나는 그게 무엇보다 무섭다. 


막스 에른스트, <숲과 비둘기 Forêt et colombe>, 1927, Tate Collection


   단절감을 되뇌어 보다 떠오르는 그림은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이다. 거대한 숲에 에워싸인 새 한 마리, 게다가 새는 새장에 갇혀있다. 작품의 톤이 어두운 탓에 새가 땡그란 눈으로 마주하는 빽빽한 숲의 거대함, 어둠이 내릴 때의 막막함, 새장이 주는 답답함이 보는 내게도 이내 다가온다. 나무는 성글게 긁은 듯 표현되어서, 평화롭거나 포용하는 숲이 아니라 도대체 저 성근 가지 사이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숲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도통 막막하기만 하다.


   이 작품을 만든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는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초현실주의 특유 ‘자동기술법(Automatisme)[각주:1]’을 통해’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으며, 특히 위의 작품에서 거친 표면으로 나타나는 나무에서도 볼 수 있듯, 종이를 거친 표면 위에 대고 문질러 독특한 질감표현을 내는 ‘프로타주(Frottage)’와 같은 기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비둘기’로 나타나는 새는 에른스트에게 자아를 상징하는 일종의 분신(Alter Ego)으로, 에른스트는 이 새를 ‘로프롭(Loplop)’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나.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해서 분석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앞서 폰타나 작품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늘어뜨리기도 하였고, 에른스트의 다른 작품이라면 모를까 이 작품에서 내가 느끼는 일종의 공포는 지적인 분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앗아간 어두운 풍경과 고립된 비둘기의 모습에 유래하는 것이다. 더위에 지친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작품에‘대해’이야기하기보다는, 그저 이 작품을 들여다 보고 싶다. 이 작품에 투영된 나의 공포를 들여다 보고 싶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공포에 대해서 혹은 두려움에 대해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더구나 이러한 포맷에서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므로 여기까지. 

   더위가 가시기 보다는 조금 스산한-바람이 마음에 잠시 머문다.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픈 여름 밤이나 아직 나는, 더위에서 헤어나오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_꽤 애호가_



  1.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엄밀하게 《초현실주의 선언》에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는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견 없이 행하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 이라고 되어 있듯이, 의식 하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히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자연히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 또는 말은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출처: 자동기술법,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본문으로]

'4호 -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프고도 웃긴, 무섭고도 비극적인  (0) 2013.09.03
피가 모자라??  (0) 2013.08.28
Essay 4 Les Essais  (0) 2013.08.2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너 지금 어디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먼저 할 일은 돌아보는 일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더라 하며 내가 자리한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질문에 따라 답변은 내가 막 도착한 지하철 역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일 수 있다. 때로 ‘지금 어디냐’는 물음은 지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질문, 사회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때의 답변은 내 세세한 위치보다 내가 사는 사회의 맥락과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


Pablo Picasso, the Artist’s Eyes, 1917, Pencil on vellum paper, 

Museo Picasso Málaga, Rafael Lobato © Museo Picasso Málaga


‘지금’을 꿰뚫는 예술가의 눈

   지금 나의 거한 곳을 보여주는 것, 때로는 사실을 고발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수긍해온 현실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은 문학과 함께 예술이 감당해 온 고유한 역할이다. 예리한 눈길로 표면적인 현실에 감추어진 욕망과 무지, 왜곡과 한계를 간파하는 것. 피카소가 그린 ‘예술가의 눈’은 사물의 정수를 다 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의 먼지에 덮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실과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내 고발할 것 같은 눈빛으로. 


   예술 안에서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발견하는 이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하는 장르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너 지금 어디니? 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인 대답, 나 여기야 하고 보여주는 사진들. 사진에도 왜곡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적어도 보여지는 현실을 진술하고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눈으로 오늘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좀 더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지않을까? 때문에 이번에는 ‘저 서있던 자리에서, 어떤 것에도 눈 감지 않은 채로 시선을 던진’ 사진과 사진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요세프 코우델카 Josef Koudelka,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 Prague. August 1968. 

Warsaw Pact Troops invade Prague. In front of the Radio Headquarters, 1968 © Josef Koudelka/Magnum Photos


1968년 8월의 프라하, 요세프 코우델카

   사진의 제목에서 명백히 보여주듯 때는 1968년 8월, 이곳은 프라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68년의 봄이 지나고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했던 당시를 사진에 담았다. 장소는 제목에 나타나듯, 프라하의 라디오방송국 본부 앞, 시내 한복판. 인적은 드물지만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이 감돈다. 하지만 너 어디에 있니? 라는 대답에 가장 적합한 대답으로 보이는 사진이다. ‘난 지금 프라하의 라디오 방송국에 있고, 지금은 정오를 갓 넘겼어, 여길 좀 봐’하는. 


   그러나 사진은 단순한 대답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시계바늘 너머 삼엄한 프라하의 거리를 보여주고, 작가의 것으로 보이는 팔은 단순히 시계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이 사태를 지켜보는 한 사람의 결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 굳센 주먹을 보라. 


   이 사진을 찍은 ‘요세프 코우델카(Josef Koudela 1938~)’ 는 후에는 세계적인 보도사진작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에 소속되지만, 당시에는 막 전업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른 살의 젊은 작가였다. 68년 8월 당시 프라하에 있었던 그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눈 앞에서 보게 되고, 일 주일 동안 그 침공 현장을 쏘다니며 시민들의 저항과 소련군의 공격을 렌즈에 담게 된다. 결과물은 5,000여장의 사진들. 그야말로 그가 당시 거기에 있었으므로 찍을 수 있었던 사진들이자, ‘나는 여기에 서서 이 순간을 목도했노라’는 고백과 고발의 시선인 것이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부터 8월에 있었던 소련의 프라하 침공 이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68년 1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당 제 1서기를 맡게 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강령 아래에 새로운 개혁을 시도한다. 이전까지는 제한되었던 언론과 집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사회를 다시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시기가 이때이기도 하고, 소설의 여주인공인 테레사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것도 코우델카가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68년의 프라하 침공 때였다.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1979년 10.26 사건부터 80년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까지의 기간 역시 이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 민주화의 움직임은 당시 소련의 눈에 달가워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동유럽권에 영향을 주어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권의 힘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여러 협상과 회담을 거쳤지만 결국 1968년 8월 20일,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군 20만 명을 앞세워 프라하를 침공하고 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개혁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찼던 프라하의 봄은 이렇게 쉽게 스러지고 말았다. 


   이 때 젊은 작가 코우델카의 눈은 긴급한 그 거리를 향하고, 후에 ‘68년 프라하 침공(Invasion Prague, 68)’이라고 명명되는 이 사진들을 남긴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이 길었지만, 사진에 대해 설명할 것은 별로 없다. 지금 그곳에 서 있었던 그의 시선과 프레임 안에 가득한 긴장을 보는 것 밖에는. 평화가 사라진 거리와 불안한 시선들, 이곳과는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부재와 불안한 시선들은 다른 모양으로 서울의 거리를 메우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서울, 최민식

   그런가 하면, 전후 한국을 바라보았던 또 하나의 치열한 시선, ‘최민식 작가(1928~2013)’ 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최민식 작가는 우리나라의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 작가로 195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을 렌즈에 담아왔다. 그를 수식하는 ‘가난의 얼굴을 찍는 예술가’, ‘빈민의 사진가’와 같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전후의 가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포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고백하건대,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이 글의 제목은 최민식 작가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독한 가난을 지독하게도 담아왔기에 간첩이라고 오해도 수없이 받아왔고, 독재정권 시대에는 나라망신 시킨다며 여러 음모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이러한 현실에 있다’고 하는 고발이자 정직한 대면으로써의 사진을 낳은 것이다. 그의 글 한 부분을 여기서 소개한다. 


최민식, 1965년 대구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진실한 창작을 위한 자기 도전이 있을 뿐, 후미진 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머무는 곳은 어디라도 내 사진의 영역이 된다. 그곳은 가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한다. 사진은 볼 때마다 깊이를 느낄 수 있고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마음으로 고통에 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침묵 그리고 미소...... 이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만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풍부함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통해 물질적 번영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려 했다. 나의 사진의 기조는 무엇보다 민중과 같이 하는 삶에 있다. ‘우리 삶의 진실한 이야기’를 민중에게 전하려는 사명감과 당위성, 이것이 내 사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휴먼선집』, 최민식, 눈빛출판사


   부산에 살며 자갈치 시장과 영도,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민중들을 찍어온 시선은 그저 누군가의 인물사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된다. 사진이란 그저 보이는 얼굴을 찍었을 뿐이지만 고단한 주름과 지친 몸, 어떤 몸짓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가 오늘날의 서울을 찍는다면 어떤 사진들이 나올까.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몇몇 SNS에 ‘체크인’이라는 기능이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장소를 태그해서 보여주는 방식이고 사진을 첨부하기도 하는데, 그게 어쩌면 ‘나는 여기에 있다’ 라는 오늘날 방식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묻든 묻지 않았든. 또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 덕에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지기도 했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그러하듯. 그러나 요세프 코우델카와 최민식의 시선과 같은 치열함은, 대답하기 편리한 셋팅과는 별개의 문제. 너무나 쉬워진 생활에 혹은 일상의 먼지에, 정작 사람의 삶에는 너무나 자주 눈 감아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울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사건들에 대해, 더 가깝게는 내 주변의 사람과 장면에 대해서.


“ 사람이, 그것도 서럽고도 착한 사람이

거기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사진 속의 아득한 시절,

아득히 먼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서 운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을 찍었다.”    - 최민식-

_꽤 애호가_


----------------------------------------------------------------------

3호 전체를 보시려면  PDF를 다운 받으세요.

http://noldaga.tistory.com/33


다운 없이 지금 당장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http://issuu.com/noldaga/docs/___________3______________________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사이의 공간은 치명적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의 공간. 때로 ‘사이’는 친구이거나 혹은 친구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를 일컫기도 하고, 댄스라고 하기엔 뭔가 덜 신나고 발라드라고 하기엔 그래도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애매한 노래를 이를 때에 쓰이곤 한다. ‘결국 그 사람과 무슨 사이냐고’ 우리는 깔끔하게 정의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모든 것이 명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피할 수도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그 ‘사이’의 공간을 받아들일 수 밖에. 게다가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기에, 사실 이 ‘사이’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도리어 치명적인 공간. 때문에 끼인 모양새로 간주되기 십상인 ‘사이’를 대변하고자, 오늘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머무는 시선들을 소개한다. 백남준의 <촛불 하나>와 수-메 체의 <메아리>가 바로 그 것이다.


백남준, <촛불 하나 One Candle>, 1989, MMK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촛불 하나>, 가상과 실제 사이에서


   백남준1932-2006의 <촛불 하나 One Candle>는 제목 그대로 하나의 촛불로부터 시작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삼각대 위에 설치한,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작은 양초의 이미지는 초를 촬영한 카메라와 그 이미지를 다시 삼원색으로 투광시키는 삼광식 프로젝트를 거쳐 결국은 하얀 벽 위에 다양한 빛깔로 촛불의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혹은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촛불을 향해서 입김을 불어볼 때면 실제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미술관 공간을 메운 거대한 촛불들도 제각기 흔들리게 된다. 화이트 큐브 미술관 안에서 벽을 흔드는 바람이 조용히 스쳐간다..


   백남준은 흔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바, 사람들은 그의 예술에 대해 차가운 고철 기계와 텔레비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은 한국의 현대예술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나, 그만큼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제외하고선 제대로 이해되어지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음악에서 시작하여 영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그가 집중했던 주제 중 하나는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의 어우러짐이었다. 단순히 기계문명의 발달과 확산에 따라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를 통해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빅브라더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과 인간 정신, 문명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촛불 하나>는 그런 사유의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작품은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촛불에서 시작하지만,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가상의 이미지로의 촛불 이미지를 창조하여 이윽고 공간을 뒤덮어버리는 것이다. 실제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작품이 위치한 공간은 프로젝터를 통과한 가상의 이미지로 채워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촛불이 흔들릴 때에 가상의 촛불 이미지들 역시 그 바람에 함께 흔들리게 된다. 때문에 단순히 기계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지만 하나의 촛불로 시작하였지만 순수한 자연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촛불 하나>의 풍경은 실제와 가상,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앞에 서면 구형 삼광식 프로젝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물감을 한껏 푼 것처럼 형형색색을 이루는 촛불의 풍경 앞에서 바람의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가을의 갈대밭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가상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 그 사이에서 <촛불 하나>는 어느 한쪽에 머무는 것보다 더욱 더 증폭된 풍경으로 펼쳐진다. 심해를 헤엄치듯 너울거린다. 작은 양초에서 시작한 것이 이윽고 화이트 큐브 미술관의 환경을, 보는 이의 경험을 빚어낸다. 그 사이를 마구 유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메 체의 <메아리>,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는데


메 체, <메아리 L’echo>, 2003, 비디오, 사운드, 5분 30초, 무담 룩셈부르크 소장


   두 번째 시선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작가 수-메 체(Su-Mei Tse 1973~)의 <메아리 L’echo>라는 비디오 작품이다. 이 작품은 6월 말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전에서 현재 전시 중인데, (자세한 전시 정보는 마지막에 있다.) 작품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보아도 선뜻 이것이 비디오 작품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거대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하여 전면에는 푸른 풀밭, 그리고 풀밭과 강한 색채 대조를 이루는 붉은 드레스의 첼리스트(작가 본인), 이것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전부이다. 


   작가는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알프스 산은 곧 첼로 소리의 메아리를 낸다. 처음에는 외따로 존재하는 소리이지만, 이윽고 첼로 소리와 메아리는 일종의 합주를 이루게 된다. 돌림노래처럼, 질문과 대답처럼, 오순도순 나누는 대화처럼. 풍경에서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거대한 산 아래에 미약하게만 보이는 작가의 첼로 연주가 있을 뿐이다. 소리가 외따로 존재하던 작품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여도 작품의 이미지에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알프스와 작가 사이 공간의 밀도가 바뀐 것이다. 첼로 소리와 메아리 소리의 간격에서처럼 처음에는 텅 빈 정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을 지나 이윽고 조금씩 조응하기 시작한다. 첼로 연주, 메아리의 화답, 또 그에 대한 첼로의 다른 소리, 그리고 메아리의 또 다른 화답. 알프스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 뿐이고, 작가는 여전히 여기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첼로 연주와 메아리는 결국 대화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 사이 공간에 머무르는 일


   너무나 단정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이쪽 혹은 저쪽 이기를 강요하는 가름 사이에서 ‘사이’의 공간은 무력하게만 보인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 묻는다면 무어라 답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검정색과 흰색 사이의 회색 지대는 도무지 좋게 해석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이’의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 산과 첼리스트 사이의 대화, 실제와 가상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풍경……


   최근 발간된 <시간의 향기>에서 저자인 한병철 교수 역시 기존의 시간 개념이 파괴된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하며,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모든 것은 없거나 지금 여기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존재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생은 모든 사이가 제거되고 나면 그만큼 더 빈곤해진다.” 


   삶의 풍성함이란, 관계의 놀라움이란 단순하게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도리어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하려 들었을 때에, 혹은 쉬이 얻으려 들 때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모호하고 안개 같은 시간이 주는 번민의 때가 있으나, 또한 그러하기에 허락되는 경탄과 희열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사이’는 도무지 애매해서 싫다는 당신, 오늘은 이 치명적인 공간에 조용히- 머물러 보시기를 권한다. 

_꽤 애호가_





기타 참고 자료

_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njpartcenter.kr

_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www.artsonje.org

_한병철, <시간의 향기>, 문학과 지성사, 2013











수-메 체의 <메아리> 관련 전시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


전시일시: 2013년 4월 13일(토) 

              ~ 6월 23일(일)

전시장소: 아트선재센터

관람요금: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생일에 묘한 불편함이 생겼다. 물론 여러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절친한 이들에게는 절친한 대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기억해줬다는 소심한 기쁨이 있다. 선물이나 케이크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기쁜 일이니. 하지만 이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불편함은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생일이 사실 내가 축하를 받을 날인가 하는 물음에서 스물스물 피어 올랐다.


   ‘생일 축하한다’ 는 메시지는 무슨 뜻인가? 물론 어렵게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온 데에 신생아였던 나의 노력이 없었다고는 못할 테다. 뭔가 용을 썼겠지. 하지만 여러 표현에서 나타나듯 내가 태어나게끔 된 것은 어머니가 나를 배고 태에서 키워 낳으신 덕분이니, 사실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에 나는 거저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을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건가 싶어서, (물론 축하하는 이는 이런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겠지만) 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래, 사실 우리말에서 ‘태어나다’ 는 표현은 확실히 내가 축하를 받을 만 하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그 어릴 적 온갖 애를 써서 태어났었노라 라는 성취의 느낌이 잔뜩 묻어난다. 열 달이 다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를 가르고 태어났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맥더프 정도가 된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만. 실제로 다른 언어의 경우를 찾아보면 ‘태어나다’ 는 동사는 우리말과 달리 수동태로 표현될 때도 많다. 나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이며 혹은 신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어찌됐든 내가 축하를 받을만한가 라는 지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생일 축하를 마다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생일을 기회로 간만에 나누는 상투적인 안부인사와 온갖 난리들이 싫지만은 않다. 이 글을 근거로 생일 축하하는 것을 멈추지는 말아달라. (어차피 내 올해 생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이를 테면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 생일일 필요가 그다지 없다면, 다른 의미의 생일, 혹은 다른 의미의 기념일을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것이 내가 기억지도 못하는 출생의 기억보다 진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생일에 대한 시와 그림을 각각 한 편씩 소개하고 싶다. 상투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혹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새 다이어리를 샀을 때 내 생일을 가장 먼저 체크하고 있다면, 일 년 달력에 내 생일만 눈에 번쩍 뜨인다면, 다른 의미깊은 날이 나한테는 없던가 한 번 돌아보는 재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로제티의 생일, 내 사랑이 찾아온 날


생일  -  크리스티나 로제티


내 마음은 물가의 가지에 둥지 튼

한 마리 노래하는 새입니다.

내 마음은 탐스런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한 그루 사과나무입니다.

내 마음은 무지갯빛 조가비,

고요한 바다에서 춤추는 조가비입니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A Birthday  -  Christina Rossetti


My Heart is like a singing bird

Whose nest is in a watered shoot:

My Heart is like an apple-tree

Whose boughs are bent with thickest fruit:

My Heart is like a rainbow shell

That Paddles in a halcyon sea:

My Heart is gladder than all these

Because the birthday of my life

Is come, my love is come to me....

(번역: 장영희)

   

   생일에 대한 여러 예술적인 해석들이 이렇게 존재한다.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생일>이라는 이 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는 사랑이 내게 찾아온 날이 생일이라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수 많은 연인들의 기념일이 여기에 속할 것도 같지만, 사귀기로 시작한 날이라든지 결혼한 날이 어떤 결심을 동반하는 날이라면,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내게 온 날은 이를 테면 내가 어머니에게로부터 ‘태어나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출생하게 됨으로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사랑이 내게 왔기에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 때문에 그 사랑이 오기 전에는 내겐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시인은 이야기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태아이던 우리는 출생의 순간과 그 환희를 우리의 부모님만큼 느낄 수 없었지만, 사랑이 오는 그때의 기쁨은 시인이 노래하는 새로, 한 그루 사과나무로, 무지갯빛 조가비로 빗대어 표현하듯 온 몸으로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생일’ 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기도 한 것이겠다. 화사한 봄의 꽃마냥 시인이 스물 일곱 살 때에 썼다는 이 시는, 사랑타령은 질리게 들어서 새로울 것 없을 것도 같지만, 과연 ‘생일’이라고 부를 만큼의 눈부신 사랑의 날이 있었던가 하고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봄은 타지 않기로, 조심하기로 해요 우리.) 


   사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그 사람과 헤어졌을는지도 모르겠다. 예순 일곱도 아니고, 스물 일곱에 썼다니까 사실 모를 일이다. 생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환희에 찼던 것이지, 결과적으로도 시인에게 그 날은 생일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을 어느 날,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선 주름진 손으로 연필로 사각사각 ‘돌아보니 이 날이 내 또 다른 생일이었지, 이 사람이 내게 왔던 그날’ 하며 주름 패인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생일이라면 하나 더 있다면, 오래 축하하고 싶을 것이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샤갈의 생일, 우리는 하늘을 날아올라서


   로제티의 시 <생일> 을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사랑을 만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환희와 기쁨은 어떤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을까. 여기, 사랑스러운 연인들과 낭만의 대기를 표현해낸 마르크 샤갈의 <생일> 이 있다. 로제티는 19세기의 영국시인, 샤갈은 20세기 러시아 출신의 화가, 각각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았던 이들이나 묘하게 어울리는 또 다른 생일을 감상해보자. 필시 21세기의 우리의 생일 혹은 우리의 사랑에 이어지는 지점이 있을 테니.

   

   마르크 샤갈의 <생일>이다. 샤갈1887-1985 은 러시아 국경마을인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혹은 조국의 현실 문제로, 혹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와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80여 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왔던 작가이다. 인상파와 입체파, 추상화 등 20세기의 주요한 예술 운동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만의 스타일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렸으며, 특히 러시아의 민속적인 색채와 더불어 시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하여,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2010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캔버스에 유채, 80.5x99.5cm, 뉴욕, 현대미술관


   사실 샤갈의 <생일>은 앞서 로제티가 썼던 ‘사랑이 찾아온 날’의 생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일>은 샤갈이 그의 연인이었고 아내였던 벨라와 결혼식을 올리기 몇 주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초상으로, 실제로 벨라가 샤갈의 스물 여덟 번째 생일을 위해 꽃다발이며 케익을 준비하고, 방 곳곳에 숄을 걸어놓아 그를 위한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정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결혼을 자축하는 결혼기념화이면서 일종의 관계의 초상이니, 로제티의 시에서 보여지는 맥락과도 일맥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 샤갈의 인생에서 벨라는 30여 년 동안 부인이자 영혼의 동반자였고, 그리고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샤갈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으니 이 생일은 결국 이 결혼은 생일 만큼의 혹은 그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재미난 점은 샤갈이 그리는 연인들이다. 그들은 중력의 법칙을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생일>이라는 작품에서도 그렇고, 2년 후에 그린 <산책>에서도 그들은 하늘을 붕붕 떠다닌다. 마치 생일이나 놀이공원에 가면 들고 다니는 헬륨 풍선처럼, 언제나 축제인 것처럼 그들은 하늘을 날아 다닌다. 현실의 연인을 그린 것이겠지만, 관계의 초상 안에서 그들은 함께이며, 그들뿐이며, 그들의 세상을 산다. 때문에 샤갈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분명‘생일’이라 부를만하다. 출생의 기억보다 진한 기억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래 살아갈 이를 만났으므로.


시간의 발견, 사건의 발굴


   생일은 아무리 그래도 기억하게 되는 날이다. 달력을 볼 때 내 생일이 번쩍 뜨이는 것은 별 다른 기대가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선물과 축하를 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생일을 제외하고서 누구보다 먼저 깊게 기념할 날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있는가? 굳이 지금의 연인을 만난 날이 아닐지라도, 잊을 수 없는 하루 하루가 있다면 기억 속에서 한 번 다시 발굴해보자.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고, (불교의 승려들은 불문에 들어간 날을 그들의 생일로 기념한다 한다.) 어떤 인식의 깨짐, 충격의 날일 수도 있겠다. 잊을 수 없는 만남의 순간, 혹은 불편했던 진실을 직면했던 날도 또한. 


▲ 마르크 샤갈, <산책>, 1917-18, 마분지에 유채, 170x183.5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와 유사하지만 더 나아가서 ‘진리 사건’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진리에 깨우치게 되었던 체험을 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난 후 회심하여 바울이 되었던 사건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68혁명 역시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면서 바디우는 충실하게 우리의 진리 사건과 이 시기에 임하라고 이야기 한다.


   고로 다시 돌아오면 ‘생일 축하한다’ 는 즐거운 인사 속에 우리의 기념할 것들을 다 흘려 보내지 말자는 것이다. 365일을 모두 기념하며 살아갈 순 없지만, 사랑을 만난 날이든 혹은 중요한 만남이 있었던 날이든, 혹은 인식이 깨졌던 날이든, 혹은 영적인 체험을 했던 날이든. 생일의 개념을 넓히고 새로운 생일을 발굴해보자. 더 나아가 알랭바디우의 표현대로 ‘진리 사건’ 의 때를 마주하자. 그리고 설령 그날에 누구도 ‘너의 새로운 생일을 축하해’ 라고 해주지 않아도 기념하자. 그렇게 알알이 시간을 조각해 보자. 로제티의 생일처럼 혹은 샤갈의 생일처럼, 혹은 생을 흔드는 ‘진리 사건’ 의 그날처럼. 

_꽤 애호가_






참고서적 및 자료:

 『샤갈』, 재키 울슐라거, 민음사, 2010.

『그늘』, 김응교, 새물결플러스, 20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1호 22P ~ 33P

1호 - 생일 2013. 5. 1. 12:40 |














'1호 - 생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생일 선물에 대한 단상.  (0) 2013.05.06
<주제파악>왜 태어 났니?  (0) 2013.05.06
1호 34P ~ 끝  (0) 2013.05.01
1호 12P ~ 21P  (0) 2013.05.01
1호 1P ~ 11P  (0) 2013.05.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