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묘한 불편함이 생겼다. 물론 여러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절친한 이들에게는 절친한 대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기억해줬다는 소심한 기쁨이 있다. 선물이나 케이크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기쁜 일이니. 하지만 이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불편함은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생일이 사실 내가 축하를 받을 날인가 하는 물음에서 스물스물 피어 올랐다.


   ‘생일 축하한다’ 는 메시지는 무슨 뜻인가? 물론 어렵게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온 데에 신생아였던 나의 노력이 없었다고는 못할 테다. 뭔가 용을 썼겠지. 하지만 여러 표현에서 나타나듯 내가 태어나게끔 된 것은 어머니가 나를 배고 태에서 키워 낳으신 덕분이니, 사실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에 나는 거저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을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건가 싶어서, (물론 축하하는 이는 이런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겠지만) 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래, 사실 우리말에서 ‘태어나다’ 는 표현은 확실히 내가 축하를 받을 만 하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그 어릴 적 온갖 애를 써서 태어났었노라 라는 성취의 느낌이 잔뜩 묻어난다. 열 달이 다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를 가르고 태어났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맥더프 정도가 된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만. 실제로 다른 언어의 경우를 찾아보면 ‘태어나다’ 는 동사는 우리말과 달리 수동태로 표현될 때도 많다. 나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이며 혹은 신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어찌됐든 내가 축하를 받을만한가 라는 지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생일 축하를 마다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생일을 기회로 간만에 나누는 상투적인 안부인사와 온갖 난리들이 싫지만은 않다. 이 글을 근거로 생일 축하하는 것을 멈추지는 말아달라. (어차피 내 올해 생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이를 테면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 생일일 필요가 그다지 없다면, 다른 의미의 생일, 혹은 다른 의미의 기념일을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것이 내가 기억지도 못하는 출생의 기억보다 진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생일에 대한 시와 그림을 각각 한 편씩 소개하고 싶다. 상투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혹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새 다이어리를 샀을 때 내 생일을 가장 먼저 체크하고 있다면, 일 년 달력에 내 생일만 눈에 번쩍 뜨인다면, 다른 의미깊은 날이 나한테는 없던가 한 번 돌아보는 재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로제티의 생일, 내 사랑이 찾아온 날


생일  -  크리스티나 로제티


내 마음은 물가의 가지에 둥지 튼

한 마리 노래하는 새입니다.

내 마음은 탐스런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한 그루 사과나무입니다.

내 마음은 무지갯빛 조가비,

고요한 바다에서 춤추는 조가비입니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A Birthday  -  Christina Rossetti


My Heart is like a singing bird

Whose nest is in a watered shoot:

My Heart is like an apple-tree

Whose boughs are bent with thickest fruit:

My Heart is like a rainbow shell

That Paddles in a halcyon sea:

My Heart is gladder than all these

Because the birthday of my life

Is come, my love is come to me....

(번역: 장영희)

   

   생일에 대한 여러 예술적인 해석들이 이렇게 존재한다.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생일>이라는 이 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는 사랑이 내게 찾아온 날이 생일이라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수 많은 연인들의 기념일이 여기에 속할 것도 같지만, 사귀기로 시작한 날이라든지 결혼한 날이 어떤 결심을 동반하는 날이라면,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내게 온 날은 이를 테면 내가 어머니에게로부터 ‘태어나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출생하게 됨으로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사랑이 내게 왔기에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 때문에 그 사랑이 오기 전에는 내겐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시인은 이야기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태아이던 우리는 출생의 순간과 그 환희를 우리의 부모님만큼 느낄 수 없었지만, 사랑이 오는 그때의 기쁨은 시인이 노래하는 새로, 한 그루 사과나무로, 무지갯빛 조가비로 빗대어 표현하듯 온 몸으로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생일’ 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기도 한 것이겠다. 화사한 봄의 꽃마냥 시인이 스물 일곱 살 때에 썼다는 이 시는, 사랑타령은 질리게 들어서 새로울 것 없을 것도 같지만, 과연 ‘생일’이라고 부를 만큼의 눈부신 사랑의 날이 있었던가 하고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봄은 타지 않기로, 조심하기로 해요 우리.) 


   사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그 사람과 헤어졌을는지도 모르겠다. 예순 일곱도 아니고, 스물 일곱에 썼다니까 사실 모를 일이다. 생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환희에 찼던 것이지, 결과적으로도 시인에게 그 날은 생일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을 어느 날,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선 주름진 손으로 연필로 사각사각 ‘돌아보니 이 날이 내 또 다른 생일이었지, 이 사람이 내게 왔던 그날’ 하며 주름 패인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생일이라면 하나 더 있다면, 오래 축하하고 싶을 것이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샤갈의 생일, 우리는 하늘을 날아올라서


   로제티의 시 <생일> 을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사랑을 만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환희와 기쁨은 어떤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을까. 여기, 사랑스러운 연인들과 낭만의 대기를 표현해낸 마르크 샤갈의 <생일> 이 있다. 로제티는 19세기의 영국시인, 샤갈은 20세기 러시아 출신의 화가, 각각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았던 이들이나 묘하게 어울리는 또 다른 생일을 감상해보자. 필시 21세기의 우리의 생일 혹은 우리의 사랑에 이어지는 지점이 있을 테니.

   

   마르크 샤갈의 <생일>이다. 샤갈1887-1985 은 러시아 국경마을인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혹은 조국의 현실 문제로, 혹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와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80여 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왔던 작가이다. 인상파와 입체파, 추상화 등 20세기의 주요한 예술 운동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만의 스타일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렸으며, 특히 러시아의 민속적인 색채와 더불어 시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하여,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2010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캔버스에 유채, 80.5x99.5cm, 뉴욕, 현대미술관


   사실 샤갈의 <생일>은 앞서 로제티가 썼던 ‘사랑이 찾아온 날’의 생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일>은 샤갈이 그의 연인이었고 아내였던 벨라와 결혼식을 올리기 몇 주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초상으로, 실제로 벨라가 샤갈의 스물 여덟 번째 생일을 위해 꽃다발이며 케익을 준비하고, 방 곳곳에 숄을 걸어놓아 그를 위한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정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결혼을 자축하는 결혼기념화이면서 일종의 관계의 초상이니, 로제티의 시에서 보여지는 맥락과도 일맥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 샤갈의 인생에서 벨라는 30여 년 동안 부인이자 영혼의 동반자였고, 그리고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샤갈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으니 이 생일은 결국 이 결혼은 생일 만큼의 혹은 그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재미난 점은 샤갈이 그리는 연인들이다. 그들은 중력의 법칙을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생일>이라는 작품에서도 그렇고, 2년 후에 그린 <산책>에서도 그들은 하늘을 붕붕 떠다닌다. 마치 생일이나 놀이공원에 가면 들고 다니는 헬륨 풍선처럼, 언제나 축제인 것처럼 그들은 하늘을 날아 다닌다. 현실의 연인을 그린 것이겠지만, 관계의 초상 안에서 그들은 함께이며, 그들뿐이며, 그들의 세상을 산다. 때문에 샤갈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분명‘생일’이라 부를만하다. 출생의 기억보다 진한 기억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래 살아갈 이를 만났으므로.


시간의 발견, 사건의 발굴


   생일은 아무리 그래도 기억하게 되는 날이다. 달력을 볼 때 내 생일이 번쩍 뜨이는 것은 별 다른 기대가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선물과 축하를 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생일을 제외하고서 누구보다 먼저 깊게 기념할 날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있는가? 굳이 지금의 연인을 만난 날이 아닐지라도, 잊을 수 없는 하루 하루가 있다면 기억 속에서 한 번 다시 발굴해보자.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고, (불교의 승려들은 불문에 들어간 날을 그들의 생일로 기념한다 한다.) 어떤 인식의 깨짐, 충격의 날일 수도 있겠다. 잊을 수 없는 만남의 순간, 혹은 불편했던 진실을 직면했던 날도 또한. 


▲ 마르크 샤갈, <산책>, 1917-18, 마분지에 유채, 170x183.5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와 유사하지만 더 나아가서 ‘진리 사건’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진리에 깨우치게 되었던 체험을 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난 후 회심하여 바울이 되었던 사건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68혁명 역시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면서 바디우는 충실하게 우리의 진리 사건과 이 시기에 임하라고 이야기 한다.


   고로 다시 돌아오면 ‘생일 축하한다’ 는 즐거운 인사 속에 우리의 기념할 것들을 다 흘려 보내지 말자는 것이다. 365일을 모두 기념하며 살아갈 순 없지만, 사랑을 만난 날이든 혹은 중요한 만남이 있었던 날이든, 혹은 인식이 깨졌던 날이든, 혹은 영적인 체험을 했던 날이든. 생일의 개념을 넓히고 새로운 생일을 발굴해보자. 더 나아가 알랭바디우의 표현대로 ‘진리 사건’ 의 때를 마주하자. 그리고 설령 그날에 누구도 ‘너의 새로운 생일을 축하해’ 라고 해주지 않아도 기념하자. 그렇게 알알이 시간을 조각해 보자. 로제티의 생일처럼 혹은 샤갈의 생일처럼, 혹은 생을 흔드는 ‘진리 사건’ 의 그날처럼. 

_꽤 애호가_






참고서적 및 자료:

 『샤갈』, 재키 울슐라거, 민음사, 2010.

『그늘』, 김응교, 새물결플러스, 20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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