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아리아(?)가 흐르고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린다. 피에 젖은 손이 가늘게 떨리며 수화기를 향한다. 초점이 나간 채 면도날과 이겨진 담배꽁초가 비친다. 피가 번진 욕조 안에 누워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몇 년간 교류가 없던 여동생이 협박과 애원을 뒤섞어 가며 오빠에게 부탁한다. 아이를 절대 혼자 둘 수 없으니 잠시만 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부탁할 사람이 오빠 밖에 없어서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전화했단다. 한동안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이내 건조하게 ‘okay’로 답한다. 음악은 급변하고 그는 황급히 손을 뒤덮은 피를 씻어낸다.


   어째서 였을까. 그가 손목을 세로로 긋고(대개는 가로로 긋지 않던가, 그렇게 선명하게 세로로 그은 건 처음 본 듯) 욕조 안을 온통 피로 물들인 것은. 죽기를 작정하고서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하지 못한 것은. 기왕지사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지 죄다 궁금해진다. 죽기 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면도날과 욕조를 뒤로하고 리치(혹은 리처드)는 대충 열 살 정도(4학년이라니)일 조카 소피아와 만난다. 소피아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조숙하다. 어른들 특히, 지금 삼촌이랍시고 자신을 맡아주러 온 어른(?)의 꼴을 보니 더 한심하다.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만나자 마자 가이드 라인을 챙기는 똑똑한 조카를 마주하니 삼촌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 


   어른스러운 소피아와 철이 덜 나 보이는 리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만 균형이 맞다. 삼촌을 수동공격형(passive aggressive)으로 정리해 버리는 냉정한 조카와 순간순간 현실에서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 지는 삼촌. 그 둘이 5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소녀는 욕조안의 삼촌을 세상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도 조카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에 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아직까지는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 서로에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불안과 초조 속에 버려졌다가 상대로 인해 느끼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순함이나 진실한 어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일단 그 틈이 생기면 함께한 시간이 짧던 길던 그 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진다. 


   그 ‘틈’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들이 궁금해지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내 상대를 걱정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며 서로를 보호하고 싶어진다.


   19분의 짧은 시간동안 감독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삶이 달라지는 모습을 음악과 함께 잘 버무려낸다.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따르게 마련인데 볼링장에서 소피아가 레인 위를 걸어가며 추는 춤과 음악은 정말이지 절묘하고 신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그 장면은 리치에게는 일종의 테라피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순간, 그의 세계에도 조금의 판타지가, 희망이 주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감독이 이 곡까지 썼다니 진짜 너무 매력적이다. 곡명은 “sophia, so far”, 유튜브에서 찾아보시길 권한다)


   다시 현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자신에게 기댄 어린 조카와 나란히 앉은 리치의 멍한 눈 속엔 무슨 생각이 자리했을까 계속 상상해 보았다. 어쩌지 못하겠는 감정이 그 멍한 눈동자 속에 회오리 치고 있었다. 타인과 연결된 삶, 그것에서부터 오는 위로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위로를 통해 조금 더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위로를 건내 주고 싶은 욕구도 피어난다.


   소피아를 통금시간(curfew)에 맞춰 여동생에게 데려다 주면서 그는 그가 거저 받은 진짜 위로를 그의 동생 메기에게 전한다. 형제란 참 오묘한 것이다. 진저리나게 싫다가도 다시 기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남편의 폭행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동생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고, 너는 절대 변하지 않는 ‘쿨함’을 지닌 멋진 동생이며 그 증거로 소피아가 ‘쿨한 것’이라고 위로한다. 논거가 너무나 멋진 칭찬이지 않은가. 


   창밖으로 절묘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젖어든다.(영화에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피로 물든 욕조에 걸터앉아 다시 옷을 벗고 자기 자리라고 믿고 있던 그 욕조 속에 잠긴다. 붕대를 풀고 면도날을 세워들고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애원하는 듯 들리는 따뜻한 벨소리. 전화선을 뽑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든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제안, 그의 얼굴에 비친 미묘하게 엷은 미소가 그가 다시 한번 욕조에서 나올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흐르는  Alex Ebert 의 ‘truth’ !!


   주연을 맡은 숀 크리스틴슨(Shawn Christensen)은 <커퓨(Curfew, 2012, 미국)>의 각본과 연출도 맡았다. 그 섬세한 표정과 눈빛은 누구보다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직접 주연을 맡은 것일지도). 이 단편으로 그는 아카데미와 끌레르몽 페랑, 스톡홀롬 영화제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영화를 보면 그럴 만 하군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너 지금 어디니’라는 질문은 마치 내게는 ‘왜 거기에 있니’ 라는 질문으로 들린다. 너는 왜 거기에 있냐고, 왜 욕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삶에 제한 시간을(CURFEW)을 두느냐고 말이다. 


   나는 지금 텅 빈 사무실이다. 한쪽으로는 내내 영화의 오프닝과 음악을 떠올리고 한쪽으로는 내일까지 제출해야할 실적 정리표를 생각한다. 황폐하기는 나도 리치와 매한가지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그도 사실은 욕조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욕조에서 자신을 끌어낼 동기를 끝내 찾지 못해 그 무료하고 텅 빈 시간을 끝내려 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동기가 생겼으므로, 그 동기는 또 새로운 동기를 낳을 것이므로 더 이상 마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관계의 밀고 당기는 일에 지쳤으나 어쨌든 동기가 있어 이곳을 지키고 앉았다. 문득 동기가 사라진 것 같아 허망한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울려주는 전화벨이 내게도 있어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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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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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라니 이렇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말이 있을까. 게다가 한국어 발음은 듣기에도 사랑스럽다. 


  ‘사이’라는 단어의 온도는 어떤가. ‘사이’는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말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온도를 가늠할 수 없듯,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온도’ 차이를 감당할 수 없듯, 우리는 늘 ‘사이’에서 번민하고 만족한다. ‘사이’ 라는 단어에서 오는 친밀감은 때론 더 이상은 좁힐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 시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가 되기도 하니 ‘사이’ 라는 의미만 잘 감당하며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은 관계와 시간 ‘사이’를 가장 잘 녹여낸 영화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제시 役), 줄리 델피(셀린 役)가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에 이어 18년의 시간을 녹여낸 작품이니까. 지난 금요일 미드나잇, 밤을 지새우며 이 영화를 보았다. 


   제시와 셀린은 이제 늙고 배나온 중년의 여느 부부와 같다. 빛나던 순간과 서로를 그리워하던 시간은 이미 우주 저편에 가있는 듯 현실을 살고 있는 입담 좋은 부부.  


   “Happinese is in the doing..Not in the getting what you want.” 라고 고백하던 그들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그 시간을 잡아채었다. 비행기는 떠나고 그들은 남았다.(비포 선셋) 이제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해가 아직 머물러 있음을, 그렇게 머물러 있다 저물어 갈 것임을 해질녁 그리스 카르다밀리의 해변에 앉아 이야기 한다. 


“still there, still there, ... gone.”

   지는 석양빛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며 던진 대사가 그들의 삶의 모습 같고 꼭 우리의 모습 같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빼앗긴 듯 서로를 갈망하던 그들도 삶이 라는 시간을 감당하니 ‘사이’를 실감하게 된 듯 보인다. 서로의 ‘사이’에 존재하던 간절함과 그리움은 이제 서로에 대한 익숙함과 견딜 수 없음으로 변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시간 ‘사이’를 정말이지 엄청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멋진 아침을 맞이하기 전 셀린은 말한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아. 그러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너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존재 할 것 같아.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은 너와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中에서)


   나 역시 우리가 믿는 신이 나와 당신의 사이에 존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서로를 통해 자신의 신을 보지 못한다면 신을 믿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너무 위선적인 셈이지 않은가. 그 ‘사이’를 존중할 수 있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믿는 신을 함께 읽는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 푸른 향기로 터질 것 같은 시절 만나 그들의 불안과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해 쏟아내며 아침이 밝아오기 전 따분하던 삶에 생기를 되찾고 서투른 삶을 서투른 채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침이 오기 전까지 깊은 밤(미드나잇)을 함께 한다. 


   함께 밤을 지새우다 아침을 맞이하고 정오의 햇살을 즐기다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게 되는 동안, 그 ‘사이’에 우리는 어떤 ‘사이’ 로 익게 될까. 그렇게 다시 밤의 한가운데로, 어두움의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 제시와 셀린은 그 기억을 자양분 삼아 삶을 이어간다.


‘사이’의 다른 말은 추억일 것 같다.  

   “Memory is a wonderful thing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비포 선셋 Before Sunset>中에서)

   우리가 그 기억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으면 현재와 잘 조율해 낼 수 있다면 , 우리도 아마 그 ‘사이’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시와 셀린 그들의 ‘사이’ 도 그렇게 존재한다. 설레임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 이제 함께 하며 그 추억과 현재를 영민하게 묶어가며 그들 ‘사이’를 지탱한다. 무너졌다 일어나고 추억과 현재를 비벼내며 다시 웃고 한 방향을 향해 나란히 앉는다.


   다만 삶의 ‘사이’들이 지나가도록. 그 모든 것이 석양 너머로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긋이 바라본다.


just passing through...

태양과 함께 우리의 삶이 저물도록.

_다르덴 자매님_



   

   덧,  글을 쓰면서 느는 건 변명뿐 인 것 같다. 숙고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지 못함에 대한 변명, 사색의 시간보다는 연애에 힘써야 한다는 변명까지. ㅋ

변명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읽을거리를 내놓는 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부담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숙고의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글이라 부끄러움에 몇 줄 더 첨언해본다. 다음 달엔 보다 재밌고 깊이? 있는 읽을거리를 내놓도록 숙고하리라 스스로 다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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