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뜨 빼쩨르부르끄[각주:1]의 뽄딴까 운하에는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다리가 없다. 운하에는 관광객들을 실은 배들이 느긋하게 지난다. 수십 개의 다리 밑을 지나고, 수십 명의 사람들과 다리 위에서, 아래에서 눈을 마주친다. 낮에도 그러하지만, 백야가 펼쳐지는 여름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이 다리 위에서 운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는 누군가를 인연으로 만나기도 하는 것. ‘나스쩬-까’[각주:2]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 운하를 건너는 다리는 낭만적인 공간이다. 몽상가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러시아에 있었다. 22일, 6월, 2013년.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사진마다 날짜와 시간을 꼬박꼬박 새겨 넣었다. 지워버릴 순 없지만, 버튼 하나로 수정할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300년이 된 도시에서 쉽게 감상적이 되거나, 자주 중2병 걸린 허세남이 되었다. 누구라도 300년이 된 도시에 서 있으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를 여행하기 위한 준비물이랍시고, 타블릿 PC에 가득 넣어갔던 러시아 문학가들의 작품은 여행 며칠 만에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의 나스쩬까처럼 짧은 환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즉, 간단히 말하면 도둑맞았습니다.) 그렇다. 바로 나스쩬까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짧은 단편소설은 그렇게 내 손을 떠났다. 일정에 쫓기다 보니 진득하게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 짧은 단편소설, ‘백야’를 읽었다. 읽었다고 하기에도 모자라다. 나는 소설 ‘백야’를 봤다. 읽었다는 느낌만 남아있는 상태,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그 책에 대해 설명하거나 소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러시아에서 소설 ‘백야’와 ‘백야’를 봤다. 그런 것도 낭만이 될 수 있는 도시일까, 상-뜨 빼쩨르부르끄. 


   말하자면, 나의 이 낭만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견된 것은 낭만이 아니라 낭만에 대한 추억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추억할 뿐이다. 낭만적인 것은 그런 것이다.  지난 뒤에 발견됨으로써 소중해지는 것. 그것은 이렇게 마감에 쫓긴 새벽에도 존재하고, 하염없이 늘어져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의 소나기에도 존재하는 것. 우리가 끊임없이 묻는 당신의 안부에도 사실 낭만이 존재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만, 설레고 마는 것이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 했던 책들은 모두 저 스웨덴의 낯선 사람 손에 들려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이 순간 낭만을 떠올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한번 가보시라. 쌍-뜨 빼째르-부르끄-


2013년 7월 한국. 깜깜한 밤.

 _대충 소설가_


3호 전체를 보시려면  PDF를 다운 받으세요.

http://noldaga.tistory.com/33


다운 없이 지금 당장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http://issuu.com/noldaga/docs/___________3_______________________





  1.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 표트르대제가 1703년 설립하여 1713년 천도,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러시아 제2의 도시,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리우며, 레닌그라드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진 도시. 쌍-뜨 빼쩨르부르끄. [본문으로]
  2. 나스쩬까 :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다리 위에서 슬픔에 잠긴 채 서성이는 모습을 본 몽상가인 주인공 청년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 매달린 여인의 이름. 헤어진 애인을 만나기로 한 다리에서 매일 기다리지만, 애인은 오지 않고, 이윽고 진실하게 애정을 고백하는 몽상가 청년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옛 애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겨버린 괘씸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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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여름 사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또 여름이 왔다. 지난여름과 올여름 사이. 찬바람 쌩쌩 불었던 겨울의 기억들은 신기루 같다. 지나간 시간은 늘 모호하고, 안개처럼 뿌옇다. 사소한 것들이 계절을 알린다. 이를테면, 어느 순간 코끝을 찌르는 싸한 풀 냄새, 한낮의 태양에 달궈진 목덜미의 후덥지근한 느낌 같은 것들. 이런 기억들은 너무나 사소해서, 평소에는 떠오르지도 떠올릴 수도 없지만,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감각되는 기억이다. 

   ‘아! 올해도 벌써 여름이구나.’하는 찌르르한 감각. 우리들의 삶 속에는 의외로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 많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수많은 모호한 지점들, 사실 시간이야말로 모호한 것이다. 세계는 초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초 단위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 모호함의 사이를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영역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의지하여 계절과 계절 사이를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한다. 때문에 우리의 이해 방식은 결코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지혜일 수도 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해답을 갈구한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질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답은 늘 충족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갈망하게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답은 언제나 단답형의 간결하고 짧은 대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히 이해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 아마도 해답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도.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위의 질문을 구글에 물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우리는 본 적도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 능력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상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장난 이지만, 우리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물론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 있다는걸 반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상력이란 것은 신비하다. 우리는 어째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인류가 상상해왔던 많은 일이 상상에 머무르지 않았던 무수한 사례가 존재한다. 물론 추상성과 구체성의 차이는 있겠으나,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온 역사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 아니겠는가.


   문학작품이나 미술 작품, 다양한 예술의 분야에서 우리는 상상력의 발현을 경험한다. 본 적도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 한다. 영화나 소설의 분야에서 나는 특히 SF라는 장르를 좋아하는데, 과학적 상상력의 요소보다는 어떤 가상의 상황을(사고 실험과 같은) 현실감 있게 묘사해내는 시도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사회의 어떤 요소들을 결핍시키거나 과장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회나 인간을 설계해보는 재미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현재 나와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사이’라는 모호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 ‘42’라는 숫자가 떠오른 것은 한 권의 책, 혹은 영화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은 글의 흐름은 사실상 여기까지 오기 위한 복선이었다고 말해두겠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과학소설 시리즈이다. 1978년 BBC의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한 이후 여러 다른 형태로 변형되면서, 몇 년이 지난 후 점차적으로 국제적인 멀티미디어 현상이 되어갔다.   

   이 시리즈는 많은 개작물을 남겼는데, 1979년과 1992년 사이의 소설(맨 첫권의 제목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1981년의 TV시리즈, DC코믹스에서 93년과 96년에 출판된 만화책, 팬들이 만든 타월, 2005년에 개봉된 동명의 영화<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등이 나오기도 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다른 버전들(소설, TV시리즈, 컴퓨터게임, 초기의 영화대본)등을 모두 애덤스 본인이 적었으며, 몇몇 연극은 더글러스 애덤스가 새로운 요소/제제를 갖고 썼다고 소개 되었다.


1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권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5권 <대체로 무해함>(Mostly Harmless)

6권 <그런데 한가지 더> (And Another Thing...)   

http://ko.wikipedia.org/wiki/<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인용_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물 중에서 6번째 작품은 예외적으로 더글러스 애덤스의 작품이 아니라 이오인 콜퍼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애덤스 사후에 그 부인에게 허락을 얻어 동일한 시리즈물로 출판된 책이다. 어쨌든 이상의 총 6권의 작품을 모두 합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라고 부르고 있고, 처음 시작이 라디오 드라마였던 만큼,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파생되어 영국에서는 사회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기도 했었다. 

   국내에는 2005년 애덤스의 작품인 5권까지의 시리즈만이 합본으로 된 거대한 양장본이 출판되었고, 현재는 시리즈 6권까지 각각 분리되어 있는 세트가 출간되어있다. 장담하건대 그 거대한 합본 양장본은 아마 누구라도 보면 갖고 싶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2005년에 제작된 영화가 상당히 히트한 덕분에 국내에 출판되지 못했던 4권 이후의 내용이 포함된 합본이 출판될 수 있었고, 책도 국내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이 다분히 영국식 말장난의 블랙 코미디와 꽤 난해한 철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인용하고 있어서, 영화만큼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 책은 재밌다. 2004년 이전에 이 책을 국내에 수입하던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5권이 국내에 출시되지 않자, 국내의 SF 마니아들은 외국의 책을 직접 번역하여 그 내용을 교류하는 커뮤니티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1980년대에 지어진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진보된 SF인 동시에 당시 세계와 사회를 통렬히 비꼬는 블랙코미디 요소에 연신 감탄이 나온다. 


   “사물들이 겉보기와 항상 같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구 행성에서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돌고래보다 지능이 높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바퀴, 뉴욕, 전쟁 등 엄청난 일들을 성취해내는 동안 돌고래들이 한 일이라곤 물속에서 빈둥거리며 재미나 보는 것밖에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돌고래들은 자신들이 인간들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다고 항상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정확히 똑같았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돌고래들은 지구 행성이 곧 파괴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인간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사소통 노력은 대부분 재미있게 축구공을 차올리려고 한다거나 물고기 한 토막을 얻어먹어 보겠다고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경고하기를 포기하고, 보고인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자신들만의 수단을 통해 지구를 빠져나왔다. 돌고래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뒤로 두 번 공중제비를 돌아 고리를 통과하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휘파람으로 부는, 놀라울 만큼 정교한 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인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_<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발췌_


42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궁금해할 것이 있다. 대체 ‘42’가 무엇인가? 그럼 아마 영화나 책을 본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지”      

   이 재미있는 기호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과거 고도로 발달한 존재들이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심오한 생각’이라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게 된다. 이 슈퍼컴퓨터는 너무나 뛰어나서 그 해답을 계산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750만 년이나 걸리게 된다. 이윽고 ‘심오한 생각’은 그들에게 자신이 계산한 답을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42라는 숫자였다. 여기에 대한 수많은 농담과 다채로운 해석들이 있지만, 작가 스스로 결국 ‘별 뜻 없는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42. 한국말로는 ‘사십이’ 혹은 ‘사이’가 되기도 하는 저 숫자가, 왠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한 걸음 더 성장한다. 우리네 인생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고, 거기엔 어떤 해답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당신이 찾으려는 해답은 대체 무엇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그거다. 우리는 삶의 어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존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대답이 42라고 해보자. 무엇이라 한들 납득할 수 있을까? 좀체 단순할 수 없는 인생이란 것에서 유일무이한 해답이란 결국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낳게 한다. 그 답이 대체 무슨 뜻인가? 바로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책 속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인(42라는 답을 계산했던) ‘심오한 생각’은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질문을 알아야만 내가 말한 해답의 의미를 알 수 있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한 질문을 하고, 적절한 대답들을 찾는다. 우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그 자체로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창밖은 밝아오고, ‘책 소개’와 ‘오늘의 일기’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긴 글을 마치는데, 어떤 마무리가 적절한지 도무지 적당한 문구가 떠오르질 않는다. ...sigh.

_대충 소설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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