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가영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9.03 슬프고도 웃긴, 무섭고도 비극적인
  2. 2013.05.14 생의 쓸쓸함에 대하여...

 

 

  드래그 미 투 헬(Drag Me To Hell), 뭐 이런 무서운 제목이 다 있는가. 지옥으로의 드래그라니 상상 만으로도, 입에 담는 것도 왠지 꺼림칙하다. 그렇지 않은가.

   여름의 끝자락, (설마 이 보다 더 더워지려나) 당신을 서늘하게 해 줄 영화 한편을 소개한다. 볼 사람은 다 본 샘 레이미 감독의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2009> 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소감을 짧게 간추리면 이러하다. ‘영양소가 균형 잡힌 탄력 있는 몸매처럼 각종 요소가 알뜰하게 들어찬 매끈하고 탄성 넘치는 공포영화’ 라는 것.

   <이블 데드> 시리즈로 유명한 샘 레이미 감독이니 공포영화에 능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국내 홍보용 포스터에는 <스파이더맨> 감독이라는 문구로 홍보했었다. <스파이더맨> 샘 레이미 감독의 익스트림 판타지 호러라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드래그 미 투 헬>을 보고 싶게 만드는 문구는 아닌 듯. 무려 <이블 데드> 감독이 아닌가.

   이렇다 할 유명 배우는 없지만 캐스팅이 또 절묘한데 뭔가 모르게 헐리우드 궁상미를 풍기는 알리슨 로먼( Alison Lohman, 크리스틴 브라운 役), 그의 착하디 착한 남자친구 저스틴 롱( Justin Long, 클레이 댈튼 役, 개인적으로 저스틴 롱은 그냥 정이 간다), 조연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모욕 당한 할마시 역할의 로나 라버(Lorna Raver, 실비아 게너시 役), 크리스틴에게 저주를 풀 방법을 일러주지만 챙길 건 다 챙기는 심령술사 딜립 라오(Dileep Rao, 람 자스 役) 등 등. 그리고 인상 깊은 손톱연기의 얄미운 회사동료 레기 리(Reggie Lee, 스투 루빈 役)가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매우 평범한 은행 대출 상담원 크리스틴은 약간의 콤플렉스와 일터의 치열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연인이 있어 그런대로 삶이 즐겁다. 승진을 앞 둔 어느 날, 30년 동안 지켜온 집의 대출금이 밀린 한 노파의 대출 상담을 맡게 된다. 크리스틴은 한편으로는 집을 잃게 되는 노파가 가엾지만 승진을 위해 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호한 결단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노파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한다.(어찌 보면 그렇게 간절해 보이지도 않았다. 불쌍한 노인네의 부탁을 거절할까 싶어 하는 노파의 태도가 살짝 거슬렸다)
  
   자신의 간곡함을 외면하자 노파는 곧 돌변하여 크리스틴에게 저주를 내뿜는다.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노파의 절규는 가여움을 불러일으키기엔 이미 너무 무섭다. 지옥으로 드래그 하는게 취미인 염소악마 라미아의 저주를 불러온 노파 덕에 크리스틴은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일상을 버티게 된다. 과연 그녀는 드래그 되었을까.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공포영화의 조건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슬프고 웃기면서 무섭고 결국엔 비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드래그 미 투 헬>은 그 모든 것을 갖췄다. 이번 호 주제가 ‘4’이니 이에 걸맞게 이 네 가지 매력을 파헤쳐 볼까 한다.

 

1. 이 영화, 일단 슬프다.
   일단 주인공 처자 크리스틴은 궁상맞아 보인다. 가지런한 용모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이 얼굴에 뭍어 난다. 그녀의 일상은 터프함이 촘촘히 박혀있다.
   사랑받고 있지만 남자친구의 집에서 환영할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낙담하고 열심히 일했지만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동료 스튜와 승진 경쟁을 해야 하는 게 짜증난다. 자신의 능력이 상대보다 나음을 끊임없이 어필해야 하는 피곤함을 당신도 알지 않는가. 사실 스튜 역시 얄밉지만 절박하고 다소 불쌍해 보이는 아시아인 캐릭터?다. 경쟁이란 경쟁에 참여한 자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경쟁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고)
  
그녀의 슬픔은 노파의 저주와 함께 배가된다. 노파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안타깝긴 하지만 지옥으로 드래그 될 정도는 아니다. 자신이 당한 모욕을 되갚아주려는 노파의 저주는 필요이상으로 과잉되었다. 뺨을 한 대 올려붙였다고 칼부림을 한 꼴이다. 그런 크리스틴의 억울함은 그녀를 희생자로 만든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저주의 그림자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영화 내내 보는 이를 슬프게 만든다. 크리스틴의 불행은 결국 영화의 불행이다.

 

2. 이 영화 근데 또 웃기다.
   무섭고 끔찍한 존재들이 과장되게 등장하는 방식, 또 이를 저지하려는 크리스틴과 할매의 사투는 어딘지 우스꽝스럽다.
   과장된 반응들. 이를테면 코피가 한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급작스럽게 마치 혈관이라도 터진 듯 입과 코에서 피가 분출하는 광경이라던가, 할매를 저지하려다 그녀의 입에 꽂힌 크리스틴의 팔뚝, 머리가 압박되어 눈알이 용수철을 단 듯 튀어나오는 모습이랄지, 틀니가 다 빠진 할매가 입으로 얼굴을 핥는 행동들은 뭔가 모르게 무섭지만 웃음이 솟구친다. 난데없고 과장된 드립이 웃음 포인트.

 

 

3. 그래도 어쨌든 무섭다.
   이 영화의 공포 요소를 다시 4가지로 정리해보자. 하나는 크리스틴이 지극히 평균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과거나 콤플렉스는 있고 착하게 살려하지만 내 이익과 상충될 때는 미안하지만도 나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게 된다. 누구라도 크리스틴의 상황과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갈등과 선택의 순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부분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삶을 오히려 뒤흔드는 것이다. 어떤 일이 초래될지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결과는 늘 예측할 수 없다.(딱히 크리스틴이 악해서 저주에 빠진 건 절대 아니지만)

   다른 하나는 일상의 요소들이 공포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경제적이다. 정말 돈도 별로 안들이고 우리를 서늘하게 만드니 어쩜 이리 영리한지.
기괴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를 기본으로 음산한 바람, 날리는 손수건, 스테이플러, 안전벨트, 틀니, 파리, 손톱, 커튼, 그림자, 케이크, 포크, 고양이 등 일상의 아주 작은 요소들이 공포를 자아내는 장치의 전부이다.(소스라치게 놀라움을 자아내는 할매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할매는 불쌍한 노파에서 왜인지 어느새 거의 지옥의 사자로 변모한다) 소소하게 일상을 변질시키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작은 변화들 말이다. 일상은 이토록 쉬이 뒤틀려 버린다.

   또 하나는 크리스틴의 공포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래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침대에 함께 누워있어도 그녀의 꿈과 일상을 파고드는 공포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함께 할 수도 없다. 얼굴에 쏟아내는 구더기를 뒤집어써야 하는 것도, 할매의 공격에 주먹을 내던져야 하는 것도, 섬뜩한 악마와 대면해야 하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다.

   마지막 하나는 그 저주의 굴레를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에 지친 크리스틴은 승진이고 뭐고 대출도 연장해드리고 할매에게 사과하고 모든 걸 바로잡고 싶어한다. 그래서 찾아간 할매는 이미 죽었고 할매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할매의 죽음이 그녀 탓인 양 당해도 싸다는 태도다. 저주를 피하고자 다른 이에게 저주를 옮기려 하지만 마음 약한 크리스틴은 결국 죽은 할매의 영혼에 저주를 되갚고자 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 역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배려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다.

 

4. 비극이어라
   저주의 주인은 결국 바뀌자 않았다. 벗어나려는 처절한 노력이 처절하면 처절할 수록 이 비극은 배가된다. 노력이 거세면 거셀수록 그 애씀이 크면 클수록 그녀의 비극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나중에는 급기야 선명한 화질도 두렵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더라.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겠다.

   영화 도입부에 억울하게 드래그된 소년의 운명은 결국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벗어날 수 없는 그녀와 당신의 운명 말이다. 그녀의 불행과 저주는 대출을 연장해줬으면 피해갈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녀의 일상은 그녀를 더 옥죄었을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할매에게 모욕감을 선사하게 됐을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공포는 억울함과 수치심, 모욕감이라는 감정에서 불이 붙어 신경을 거스르고 불안을 선사하다가 피할 수 없는 결말로 치닫는다. 그 비극성이야 말로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영화 자체의 색감도 복고적이고 스타일리쉬해서 보는 내내 즐겁다.

   이 영화에서 교훈을 얻고 싶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이 나는 가장 공포스럽다. 제발, 그저 이 두려움과 슬픔, 웃음과 눈물의 짬뽕을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 즐기고 전율해 달라. 그러면 족하다.

_다르덴 자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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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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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은 의외로 꽤 쓸쓸하다. ‘당연한 기쁨’ 이 강요된 덕분에 ‘외로움’ 이 더 두드러진 탓이다. 언젠가는 생일을 맞을 당신을 위해(이미 맞았거나, 아무튼) 여기 한편의 꽤 쓸쓸한 영화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작품. 전작으로는 <불량공주 모모코(下妻物語 Kamikaze Girls, 2004)>가 비교적 유명하다. 영화는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감,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 덕에 무아?의 경지, 나를 잊는 경험을 선사한다.(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마츠코는 사랑받고 싶은 어린소녀다. 병약한 동생 덕에 집안에서는 늘 순위가 밀린다. 근심 가득한 아빠를 밝게 웃게 하고픈 어린 소녀는 인생은 아마도 디즈니 동화의 다른 모든 공주들의 삶처럼 반짝일 거라 믿는다. 가족이 바라는 대로 교사가 된 23살의 마츠코는 사소한? 실수와 오해로 인생의 모든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나.락.을.


   생일에 느끼는 쓸쓸함은 인생으로부터 전해지는 쓸쓸함과 맞닿아 있다. 생일이니까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은 나 자신과의 괴리로부터 오는 쓸쓸함 말이다. 태어났으니까, 살아 가야 하니까, 아마도 행복한 생(生)일 꺼라 기대하지만, 나와 당신의 삶이 막상은 그다지 신나지 않아서 아마도 더 외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마츠코의 삶이 그렇다. 인생은 아마 즐거울 것이며 적어도 나의 삶은 기대보다 더 빛날 것이라는 그녀의 꽃빛 공상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지의 현실로 바뀌었다. 


마츠코의 쓸쓸함


“쓸모없는 인생이었어.”

   

   자기 누이 마츠코의 죽음을 두고 그녀의 남동생은 말한다. 타인의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덜컹거린다. 동생이 보기에 삶의 나락을 기어 다니다 죽어버린 누이는 쓸모없는 생을 살다간 먼지 같은 여인네일 뿐이다. 혐오스럽다 불렸던 누나, 마츠코.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살아갈 동기가 필요했다. 나락에 던져진 후에는 그 동기가 더욱 간절해진다.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그 무엇. 어떤 고난과 역경도 절대 나 자신을 꺽지 못하게 할 그런 동기, 생을 버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마츠코에겐 살아갈 동기란 사랑 이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병약한 여동생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어서 그녀는 사랑을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전혀 회복될 수 없는 나락들이 에워싼 순간에도 무엇이 삶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사랑.


   사랑에 목을 매는 마츠코의 모습이, 타인의 멸시와 폭력, 지독한 태도들을 견뎌내며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려는 그녀는 한심하고 비참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여성비하적이라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혐오스럽고 처절한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다만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될 수 없으며 더욱이 내면의 기준을 흔들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철저하게 사랑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택한 여인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소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청년 류.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마츠코의 후회 없고 미련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 두렵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친 그로 인해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한다. 


   뒤늦게 류는 도망의 끝에서 마츠코를 통해 신을 만난다. 신의 사랑이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한없는 사랑이 꼭 그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코 버리지 않는, 뒤돌아서지 않는 그런 사랑.

   

   늘 고향의 강을 그리던 그녀, “다녀왔어” 라는 인사에 “어서와” 로 맞이해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랬던, 평생 사랑을 주기만 하다 스러져간 마츠코는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한 어느 밤, 고향을 닮은 강을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삶은 쓸쓸할지언정 쓸모없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죄송한 삶,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나의 외로움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생일이 특별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가만히 보니 기쁨에 대한 감각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의 감각들은 날로 예민해진다.


   개인적으로 생일이 불편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크리스천의 ‘강요받은 기쁨’ 에 기인한다. 생명, 그분의 희생은 나에게도 무엇보다 귀하지만 세상이, 또 내가 속한 교회의 환경이라는 것이 스스로 생명의 기쁨을 묵상하고 기뻐할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기쁨’ 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참’ 기쁨을 누리라니. 기뻐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범하는 것 같아서 영 그렇다. 안 그래도 죄 될 것이 많은 세상 아닌가. 생일의 기쁨도 이와 비슷한데,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든 달까.

   

   생일은 왠지 더 쓸쓸하고 생(生)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마츠코의 그토록 지독한 외로움이, 그녀의 처절한 삶이 그 외현은 아닐지라도 나의 속 깊은 외로움과도 닿아있다.


   근본적으로 외로운 족속인 우리는 스스로가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마츠코는 자신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온 몸으로 내뱉고 철저하게 인정한다. 때문에 그녀는 더 처절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쏟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는 것은 자기를 배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극단에서 궁극의 삶에 도달할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가 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느낀다. 현재의 나의 외로움은 나 자신을 더 이해하고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할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이 착각 역시 또 다른 ‘디즈니 월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꿈을 꾸는 건 자유지만 어디로 가도 앞은 깜깜하기만 하더라고. 하지만 그 깜깜함을 빛낼 단 하나를 마츠코는 찾았다.

   생일, 우리가 태어난 이 토양은 이미 너무 상해버렸지만, 계절도 불분명하여 늘 상 몸을 사리게 만들지만, 우리는 여기서 깜깜함을 빛낼 밝은 빛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극중에서 주인공 마츠코를 연기한 나카타니 미키(中谷美紀)는 “구부리고 펴서(まげてのばして / 마게테 노바시테)”라는 곡을  노래하는데 맘이 오묘하게 슬퍼진다. 가사는 이러하다.


구부리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구부리고 발돋움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구부려서 바람과 이야기하자

활짝 팔을 벌려 해님을 쬐어보자


모두들 안녕

내일 또 만나자


구부리고 펴다 배가 고프면 돌아가자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가자

     

   사랑을 향해 구부리고 펴기를 쉬지 않았던 그녀와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는 별님을 잡을 수도, 하늘에 닿을 수도 없지만 바람과 이야기하고, 해님을 쪼이며, 지치고 힘들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기쁨’ 의 강요, ‘두드러진 외로움’ 을 우리는 잘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_다르덴 자매님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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