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가, 8호

카테고리 없음 2015. 9. 7. 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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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평생에 이번 여름처럼 더위와 습도를 온 몸으로 경험하는 계절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서울엔 폭염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다는데, 최근 처한 상황 덕에 절절히 더위와 습도를 겪어내는 여름이다. 나 이 정도로 여름을 타지는 않는데. 절대 보지 않는 공포영화 처방이라도 내려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니 사실 말 다했다.


   그런 맥락에서 ‘4’는 이 여름의 내게 불운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원래는 괜히 오싹해 했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무서워서라도 서늘함을 좀 가져다 주지 않으련?’ 하는 바람, 혹은 ‘새벽 4시는 그래도 좀 시원하겠지 않을까?’ 정도의 안도가 먼저 떠오른다. 아 이쯤 되면 좀 슬퍼진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서늘한 그림, 혹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작품을 소개해보려 한다. 사실은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더위에 취한 머리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이니 아니라고 해도 이해를 구한다. 나처럼 축축한 공기에 절여진 마음들에 공감을 구한다. 아…… 습도. 

 

칼을 나의 붓 삼아

   처음 이 작품 앞에 섰을 때에도 그렇고 여전히, 이 작품을 보면 소리가 들린다. 슈악! 종이의 단말마 비명소리가. 종이에 숨을 끊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여름, 서늘한 그림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이 먼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a>, 

1960, Tate Collection


   굳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골머리를 앓다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서늘한 정적을 만들어버리는 한 마디 말이 더 효과 있는 것처럼, 폰타나의 작품은 칼집 하나로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슈아악 하는 종이의 비명을 상상해보면 효과는 더 배가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무서운 이야기라고 해도 고전적인 풍으로 풀어낸그림들은, 무서워도 뭔가 한 여름에 몇 겹 긴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간 것처럼 답답하다. 반면 폰타나의 그림은 저 칼집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곧 뒤통수를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이.


   하지만 그게 무엇이건 간에 일단 이게 뭐길래 액자 프레임에 곱게 넣어 벽에 걸었나 하고 의아해지는 게 사실 가장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볼 때 온갖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작품들에 둘러 쌓여있던 터라, 상대적으로 별 충격이 없었더랬다. 그러나 여전히 캔버스에 칼집을 내어서……뭐? 그걸 내가 못할까봐? 할 수 있다. 충분히.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는 아르헨티나에서 자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조각가이자, 화가이고 이론가이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집중해서 공간주의(Spatialism, Spazialismo) 선언문을 다섯 차례 내어가며 공간주의를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였고, 2차원을 벗어난 회화를, 3차원을 벗어난 조각을 구상하고 고민했었던 작가이다. 이를테면, 흔히 회화와 조각을 다른 종류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점, 즉 전자는 2차원적 캔버스에 머무르고 후자는 무게와 덩어리가 느껴지는 3차원의 소재에 머문다는 바로 그 통념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앞서 소개한 <공간개념 ‘기다림’>도 마찬가지다. 저 찢겨진 자국으로 종이가 앞뒤로 벌어져서 생긴 저 공간, 그리고 그 구멍으로 인해 뒤에 나타나는 배경까지도 생각하면 이 작품을 전통적인 회화로 볼 수는 없다. 평면을 벗어났으니 분명 조각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또 조각이라고 하자니 뭔가 애매하다. 프레임에 든 건 종이 한 장인걸. 결국 작품의 제목처럼, 회화도 조각도 아닌 그만의 ‘공간개념’을 만든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화는 현실이나 상상의 무언가를 표상해야 하고, 그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기를 사람들은 바랐다. 그러나 당시 개념미술의 다양한 작가들이 그러했듯, 폰타나 역시 이미지의 반영, 선적 내러티브를 부정하고선 그만의 추상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선이야 쉽게 긋는 것이라 하여도, 캔버스 앞에서 칼로 쭉 선을 긋는 데까지 이르는 건, 또 공간을 창조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칼을 손에 쥐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캔버스를 찢었다’니, 이쯤되면 그마저도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폰타나의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연작으로 계속된다. 평면을 칼질로 쭈욱 찢기도 하고 이후에는 구멍을 뚫기도, 초크와 금속, 잉크, 돌을 이용한 작업도 선보인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공간개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이 2천여 점에 이른다. 그 중에 가장 알려진 것이 앞서 보았던 찢기 작업과 구멍 뚫기 작업인 것이다.

   

   더워서 그런가? 작품의 미학적 의미나 미술사적 중요성 이전에, 난 일단 시원하고 후련하다. 많은 고민과 실패, 연구가 있은 후이겠지만, 캔버스를 찢은 저 틈새가 영화 ‘트루먼쇼’에서 나오는 것처럼, 뜨거운 햇살을 피할 출구 같기도 하고, 목덜미에까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올 것도 같다. 종이 참 두꺼웠을 텐데, 그 소리는 얼마나 또 시원했을까. 쉬이익- 그리고 캔버스를 찢음으로써 2차원적인 평면에 머물던 개념을 찢은 셈이니, 대단하다. 


   매일매일 캔버스를 앞에 두고서, 우리는 여러 고민을 한다. 어떻게 칠을 해야 사람들이 예쁘다고 할까, 내 부끄러운 이 검은 점을 가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내 캔버스는 이미 너무 더러워서 이젠 붓을 잡고서 이 앞에 서 있는 것 조차 힘들 때가 있구나 등등. 평면에 머무르는 일상의 잡념과 연민으로부터 일종의 전환이 필요하다, 폰타나의 칼질처럼. 그저 찢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을 3차원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시원한 전환, 좁은 고민으로부터 깊이와 시야를 바꾸어버리는 그런 칼질. 구태여 안고 살아가기는 하나, 찢어버릴 잡념은 사실 또 얼마나 많은지. 폰타나의 단순하나 차원을 다르게 했던 공간 앞에서, 내 번잡한 공간을 돌아본다. 음 전환이 필요하다. 다시 또 다시.


그런데 사실 제일 무서운 것은 말야

   그 와중에 다른 작품 하나 더 얹어본다.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 사실 ‘4’라는 숫자 하나로 무섭다느니 부정의 기운이 있다느니 하는 건 이젠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다만 숫자 4로 표상되는 어떤 공포나, 무서움의 이미지가 있을 뿐. 그럼 내가 진짜 무서워하는 건 뭘까. 그래, 내가 어떤 공포 괴담보다 무서워하는 건, (숫자 4를 연관 지어 말하자면) 마음이 떨리는 새벽 4시에 전화가 되었든 문자가 되었든 그에 대해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서운 새벽 4시보다, 무서운 새벽 4시에 대해서 속 깊이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 더 무섭다. 일종의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단절감(disconnectedness), 부재. 그래 더위에 취해 진심을 말해보자면, 나는 그게 무엇보다 무섭다. 


막스 에른스트, <숲과 비둘기 Forêt et colombe>, 1927, Tate Collection


   단절감을 되뇌어 보다 떠오르는 그림은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이다. 거대한 숲에 에워싸인 새 한 마리, 게다가 새는 새장에 갇혀있다. 작품의 톤이 어두운 탓에 새가 땡그란 눈으로 마주하는 빽빽한 숲의 거대함, 어둠이 내릴 때의 막막함, 새장이 주는 답답함이 보는 내게도 이내 다가온다. 나무는 성글게 긁은 듯 표현되어서, 평화롭거나 포용하는 숲이 아니라 도대체 저 성근 가지 사이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숲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도통 막막하기만 하다.


   이 작품을 만든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는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초현실주의 특유 ‘자동기술법(Automatisme)[각주:1]’을 통해’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으며, 특히 위의 작품에서 거친 표면으로 나타나는 나무에서도 볼 수 있듯, 종이를 거친 표면 위에 대고 문질러 독특한 질감표현을 내는 ‘프로타주(Frottage)’와 같은 기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비둘기’로 나타나는 새는 에른스트에게 자아를 상징하는 일종의 분신(Alter Ego)으로, 에른스트는 이 새를 ‘로프롭(Loplop)’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나.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해서 분석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앞서 폰타나 작품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늘어뜨리기도 하였고, 에른스트의 다른 작품이라면 모를까 이 작품에서 내가 느끼는 일종의 공포는 지적인 분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앗아간 어두운 풍경과 고립된 비둘기의 모습에 유래하는 것이다. 더위에 지친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작품에‘대해’이야기하기보다는, 그저 이 작품을 들여다 보고 싶다. 이 작품에 투영된 나의 공포를 들여다 보고 싶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공포에 대해서 혹은 두려움에 대해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더구나 이러한 포맷에서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므로 여기까지. 

   더위가 가시기 보다는 조금 스산한-바람이 마음에 잠시 머문다.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픈 여름 밤이나 아직 나는, 더위에서 헤어나오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_꽤 애호가_



  1.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엄밀하게 《초현실주의 선언》에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는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견 없이 행하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 이라고 되어 있듯이, 의식 하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히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자연히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 또는 말은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출처: 자동기술법,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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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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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어디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먼저 할 일은 돌아보는 일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더라 하며 내가 자리한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질문에 따라 답변은 내가 막 도착한 지하철 역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일 수 있다. 때로 ‘지금 어디냐’는 물음은 지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질문, 사회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때의 답변은 내 세세한 위치보다 내가 사는 사회의 맥락과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


Pablo Picasso, the Artist’s Eyes, 1917, Pencil on vellum paper, 

Museo Picasso Málaga, Rafael Lobato © Museo Picasso Málaga


‘지금’을 꿰뚫는 예술가의 눈

   지금 나의 거한 곳을 보여주는 것, 때로는 사실을 고발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수긍해온 현실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은 문학과 함께 예술이 감당해 온 고유한 역할이다. 예리한 눈길로 표면적인 현실에 감추어진 욕망과 무지, 왜곡과 한계를 간파하는 것. 피카소가 그린 ‘예술가의 눈’은 사물의 정수를 다 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의 먼지에 덮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실과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내 고발할 것 같은 눈빛으로. 


   예술 안에서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발견하는 이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하는 장르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너 지금 어디니? 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인 대답, 나 여기야 하고 보여주는 사진들. 사진에도 왜곡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적어도 보여지는 현실을 진술하고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눈으로 오늘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좀 더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지않을까? 때문에 이번에는 ‘저 서있던 자리에서, 어떤 것에도 눈 감지 않은 채로 시선을 던진’ 사진과 사진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요세프 코우델카 Josef Koudelka,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 Prague. August 1968. 

Warsaw Pact Troops invade Prague. In front of the Radio Headquarters, 1968 © Josef Koudelka/Magnum Photos


1968년 8월의 프라하, 요세프 코우델카

   사진의 제목에서 명백히 보여주듯 때는 1968년 8월, 이곳은 프라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68년의 봄이 지나고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했던 당시를 사진에 담았다. 장소는 제목에 나타나듯, 프라하의 라디오방송국 본부 앞, 시내 한복판. 인적은 드물지만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이 감돈다. 하지만 너 어디에 있니? 라는 대답에 가장 적합한 대답으로 보이는 사진이다. ‘난 지금 프라하의 라디오 방송국에 있고, 지금은 정오를 갓 넘겼어, 여길 좀 봐’하는. 


   그러나 사진은 단순한 대답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시계바늘 너머 삼엄한 프라하의 거리를 보여주고, 작가의 것으로 보이는 팔은 단순히 시계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이 사태를 지켜보는 한 사람의 결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 굳센 주먹을 보라. 


   이 사진을 찍은 ‘요세프 코우델카(Josef Koudela 1938~)’ 는 후에는 세계적인 보도사진작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에 소속되지만, 당시에는 막 전업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른 살의 젊은 작가였다. 68년 8월 당시 프라하에 있었던 그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눈 앞에서 보게 되고, 일 주일 동안 그 침공 현장을 쏘다니며 시민들의 저항과 소련군의 공격을 렌즈에 담게 된다. 결과물은 5,000여장의 사진들. 그야말로 그가 당시 거기에 있었으므로 찍을 수 있었던 사진들이자, ‘나는 여기에 서서 이 순간을 목도했노라’는 고백과 고발의 시선인 것이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부터 8월에 있었던 소련의 프라하 침공 이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68년 1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당 제 1서기를 맡게 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강령 아래에 새로운 개혁을 시도한다. 이전까지는 제한되었던 언론과 집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사회를 다시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시기가 이때이기도 하고, 소설의 여주인공인 테레사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것도 코우델카가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68년의 프라하 침공 때였다.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1979년 10.26 사건부터 80년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까지의 기간 역시 이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 민주화의 움직임은 당시 소련의 눈에 달가워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동유럽권에 영향을 주어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권의 힘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여러 협상과 회담을 거쳤지만 결국 1968년 8월 20일,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군 20만 명을 앞세워 프라하를 침공하고 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개혁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찼던 프라하의 봄은 이렇게 쉽게 스러지고 말았다. 


   이 때 젊은 작가 코우델카의 눈은 긴급한 그 거리를 향하고, 후에 ‘68년 프라하 침공(Invasion Prague, 68)’이라고 명명되는 이 사진들을 남긴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이 길었지만, 사진에 대해 설명할 것은 별로 없다. 지금 그곳에 서 있었던 그의 시선과 프레임 안에 가득한 긴장을 보는 것 밖에는. 평화가 사라진 거리와 불안한 시선들, 이곳과는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부재와 불안한 시선들은 다른 모양으로 서울의 거리를 메우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서울, 최민식

   그런가 하면, 전후 한국을 바라보았던 또 하나의 치열한 시선, ‘최민식 작가(1928~2013)’ 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최민식 작가는 우리나라의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 작가로 195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을 렌즈에 담아왔다. 그를 수식하는 ‘가난의 얼굴을 찍는 예술가’, ‘빈민의 사진가’와 같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전후의 가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포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고백하건대,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이 글의 제목은 최민식 작가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독한 가난을 지독하게도 담아왔기에 간첩이라고 오해도 수없이 받아왔고, 독재정권 시대에는 나라망신 시킨다며 여러 음모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이러한 현실에 있다’고 하는 고발이자 정직한 대면으로써의 사진을 낳은 것이다. 그의 글 한 부분을 여기서 소개한다. 


최민식, 1965년 대구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진실한 창작을 위한 자기 도전이 있을 뿐, 후미진 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머무는 곳은 어디라도 내 사진의 영역이 된다. 그곳은 가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한다. 사진은 볼 때마다 깊이를 느낄 수 있고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마음으로 고통에 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침묵 그리고 미소...... 이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만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풍부함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통해 물질적 번영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려 했다. 나의 사진의 기조는 무엇보다 민중과 같이 하는 삶에 있다. ‘우리 삶의 진실한 이야기’를 민중에게 전하려는 사명감과 당위성, 이것이 내 사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휴먼선집』, 최민식, 눈빛출판사


   부산에 살며 자갈치 시장과 영도,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민중들을 찍어온 시선은 그저 누군가의 인물사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된다. 사진이란 그저 보이는 얼굴을 찍었을 뿐이지만 고단한 주름과 지친 몸, 어떤 몸짓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가 오늘날의 서울을 찍는다면 어떤 사진들이 나올까.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몇몇 SNS에 ‘체크인’이라는 기능이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장소를 태그해서 보여주는 방식이고 사진을 첨부하기도 하는데, 그게 어쩌면 ‘나는 여기에 있다’ 라는 오늘날 방식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묻든 묻지 않았든. 또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 덕에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지기도 했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그러하듯. 그러나 요세프 코우델카와 최민식의 시선과 같은 치열함은, 대답하기 편리한 셋팅과는 별개의 문제. 너무나 쉬워진 생활에 혹은 일상의 먼지에, 정작 사람의 삶에는 너무나 자주 눈 감아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울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사건들에 대해, 더 가깝게는 내 주변의 사람과 장면에 대해서.


“ 사람이, 그것도 서럽고도 착한 사람이

거기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사진 속의 아득한 시절,

아득히 먼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서 운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을 찍었다.”    - 최민식-

_꽤 애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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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22P ~ 33P

1호 - 생일 2013. 5. 1. 1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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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날을 격하게 환영하며!! 


차례

여는글 ----- 7

주제파악 ----- 8

<놀다 설문> 당신의 생일 선물에 대한 단상 ----- 9

<놀다가 책> - 생일 날 책 선물 하는 것에 대하여 ----- 12

<놀다가 음악> -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 15

<놀다가 아트> - 생일 또 다른 생일 ----- 22

<놀다가 영화> - 생의 쓸쓸함에 대하여 ----- 29

쓸데 없는것 배우기 - 손뜨게 가방 ----- 34

산초의 방구석 탐방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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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기간의 마지막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장장 40일간을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사순절로 지키고 있다. 성탄과 함께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사순절과 수난, 부활에 관해 어떤 그림, 더 넓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 하고 묻는다면 십자가라는 세 글자 대답 외에는 듣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절기의 예식에 대하여서는 특별새벽기도회나 고난주간의 금식, 미디어 금식, 성 금요일 예배와 부활절 예배, 달걀 나누기 등 사순절을 보내는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성경을 통해 가지고 있는 사순절의 이미지는 터무니 없이 제한적이다. 그뿐 아니라 획일적이기까지 하다. 올곧은 십자가의 형상, 부활절의 달걀 정도, 주일학교에서 보던 그림책자 정도의 수준에 굳이 하나를 더 한다면 몇 년 전부터 이 시즌만 되면 틀어주는 (게다가 특정부분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게 왜 문제인가? 물론 풍성한 저만의 상상이 없다고 해서,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는 사순절에 대해 이렇게 제한적이고 획일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풍성한 복음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상하고 제한적인 생각은 결국 예수님의 세상에 내려오심과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과 죽음, 그 계획의 풍성함과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쉬운 수난, 쉬운 부활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개신교 전통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우상숭배를 경계하기 위해 성상이나 성화를 신앙생활에 잘 활용하지 않고, 성경말씀 자체에 뿌리를 두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자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 중의 하나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 하여도, 한 사람을 보고서도 각자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이 사건에 대해 공장에서 찍은 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한적으로 묵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쉬운 수난과 쉬운 부활로 이어져 도리어 우리가 받을 은혜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성상과 성화에 대한 우려는 우상숭배를 막고 성경과 믿음의 본질에 천착할 것을 강조한 것이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과 감동의 표현이자 감상을 통해 오히려 묵상의 장을 넓히는 예술에 대한 제한은 아닐 것이므로.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상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서양미술사에서 이는 너무나 널리 쓰여온 주제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폭넓은 역사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기에, 20세기에 그려진 두 점의 작품을 골라보았다. 바로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와 아르툴프 라이너 Arnulf Rainer의 작품이 그것이다.

 

조르주 루오의 <Miserere>,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르주 루오 Georges Rouault(1871~1958)는 프랑스 태생의 화가로, 지난 2009년에 한국에서도 루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 바 있어 그 계기로 많이 알려지게 된 화가이다.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당대의 여러 화풍, 인상파나 야수파와 다양한 교류를 해왔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했던 화가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화풍에 옮겨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생소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전 국가적인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1945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그리고 48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흔히 루오를 종교 화가라고 분류하는 것과 다르게, 그가 종교적인 소재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광대나 창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주로 화풍에 담았던 그의 작품을 통해, 고상한 소재와 율법적 엄숙함에 집중하는 종교화가보다는 약자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그리스도인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세상이 끝날 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 Plate 35 from Miserere, Georges Rouault, Etching on paper, 1945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Plate 37 from Miserere, Georges Rouault, Etching on paper, 1945 

   

   

   <미제레레 Miserere> 판화 연작은 루오의 가장 위대한 시도로써 꼽히는 작품이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에 등장하는 구절인 불쌍히 여기소서의 라틴어 표현으로, 이 연작 작품은 58점의 판화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죄와 고통에 묶인 세상을 번갈아 보여준다. 1927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있었던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바로 전쟁에 대한 루오의 대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전쟁과 고통, 슬픔과 비관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해, 이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전후 유럽사회를 반영한 작품이었지만, 고통과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루오의 깊은 통찰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루오의 판화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찬란하게 빛나지도, 영웅적인 성스러움을 뽐내지도 않는다. 한없이 슬플 뿐 아니라 버림받아 고통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루오는 특유의 거칠고 어두운 터치로 표현해낸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괴로움은 사순절 시즌에 우리가 많이 보곤 하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많이 다르다. 단순히 살갗의 찢겨짐, 흐르는 피와 같은 육체적 고통도 그리스도의 고통이었으나 그가 두려움과 고독의 한 가운데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았었다는 사실을 루오는 표현한다. <십자가에 달린 채 잊혀진 그리스도 아래에서 sous un Jésus en croix oublié là>, 그리고 <예수는 세상이 끝날 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Jésus sera en agonie jusqu'a la fin du monde...>와 같은 작품에서 거칠게 표현된 외로움과 고통에는 이미지의 홍수라고 부르는 요즘에도 그저 넘길 수 없는 비통함이 있다.

 

   하지만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판화는 단지 고통 속의 그리스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전쟁과 탐욕에 매달리는 인류를 예수님과 교차하여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일회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행해졌던 오래된 퍼포먼스가 아니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극적인 역사적 개입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은 당시의 전후 사회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사회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천국에 자신을 위한 특석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왕처럼 여기지만 결국은 가면을 썼을 뿐이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변호인은 텅 빈 언어만을 내뱉는다. 어떤 의미에서 고통은 단순히 특정 시대와 상황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Homo Homini Lupus>라는 문장은 이 세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루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세상의 어둠, 이 양극단을 함께 표현한다. 높은 곳과 낮은 곳, 거룩함과 비천함,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기. 관념적이고 몽상적인 세계로 도피하지 않고, 이 극단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맨 얼굴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수난을 통해 그가 겪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너무 관념화하거나, 혹은 그가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악이 성행하는 이 세상에 오셨었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오늘날의 세상과 구원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에 그 문제가 있다. 하지만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대도시의 흉흉한 할렘가를 돌아다니시며 너무나 실제적인 고통을 겪으시나, 그 속에 빛나는 구원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여전한 전쟁의 위협과 탐욕의 유혹에서 살고 있으나, 연작의 마지막 작품의 문장처럼 <그의 고통으로 우리는 치유 받았다. C'est par ses meurtrissures que nous sommes guéris.> 임을 깊은 아픔과 슬픔 속에 발견하는 것이다. 루오 최후의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세계에 대한 그의 이해를 표현한 이 연작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고백을 다시 돌아볼 일이다(58 점의 판화를 모두 이곳에서 소개드릴 수 없으나, 참고자료 목록에 있는 사이트를 통해서 전체 연작을 모두 감상해보시기를 적극 권합니다J)

 

아르눌프 라이너의 뒤틀린 포도주 십자가

 

   두 번째로 살펴볼 작품은 아르눌프 라이너의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이다.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1929~)는 오스트리아 작가로, 현존하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틀과 기존의 인식을 파괴하는 추상작품을 주로 해왔으며, 이미 색칠을 된 페인팅이나 인화를 한 사진 위에 다시 덧칠을 하여 미완-완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직관과 무의식과 같은 주제에 집중하였으나, 이후에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하는 비엔나 행동주의 그룹(Wiener Aktionismus)과 함께 감정의 극단적인 상태를 표현하고 관객에게 그 경험을 전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오스트리아 바덴에는 그의 작업세계를 기념하고 연구하기 위해 아르눌프 라이너 미술관 Arnulf Rainer Museum’이 있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본 조르주 루오와 달리, 아르눌프 라이너는 기독교인도, 종교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십자가라는 소재에 집중하여 삶과 죽음, 육과 영, 그리고 구원과 희생과 같은 주제들을 연구해왔으며, 오늘 살펴볼 작품도 그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Wine Crucifix, Arnulf Rainer, Oil paint on Canvas, 1957/78, Courtesy of Tate Collection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는 워낙 강렬한 색감과 형상을 가진 탓에 언뜻 보아도 십자가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존에 우리가 표현하거나 보게 되는 형상, 네모 반듯한 나무 빛깔의 그것과는 너무 달라, 알아차리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십자가가 맞나 하고 다시 살펴보게 된다. 멀리서 보면 십자가이겠구나 생각하겠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게다가 검은 십자가의 형상 아래로 흐르는 듯한 붉은 물감은 피처럼 보여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기괴하고 뒤틀린 십자가는 아무래도 익숙치가 않은 것이다. 두터운 검정 수직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의 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카톨릭대학의 학생채플에 걸기 위해 주문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액자 틀도 없이 느슨하게 걸어, 맞은편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십자가의 형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제목인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포도주와 관련한 일화들이 몇 살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행하셨던 기적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일이었고,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권하며 말씀하신다.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 26:28, 새번역성경) 오늘날 성찬식을 통해 다시 기억하는 것은 바로 이 포도주에 빗대어 곧 당신의 피를 인간을 위해 흘리실 것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계획인 것이다. 하여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흘렀을 예수님의 피는 그때 말씀하시고 권하신 포도주로 비유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살펴본다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포도주의 빛깔과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와 그의 죽으심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을 보았을 때에 껄끄러웠다거나 혹은 너무 자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오히려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봐왔던, 때문에 머리 속으로 생각해왔던 십자가는 너무 네모 반듯하고 말끔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자연 어디에서도 기계적이고 엄밀한 의미의 직선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십자가 역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며, 더더욱이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대표되는 복음이 우리에게 감격적인 이유는 그가 초월적인 자세로 고상하게 우리와 거리를 두고 앉아 구원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철저히 우리가 사는 사회로, 그곳의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뒤틀리고 으스러지는 고통과 고독의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비유가 아니라 십자가 아래로 피를 흘리며, 군중의 야유와 멸시 속에서 오로지 그를 믿는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죽기까지 외치셨던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때문에 고통과 어둠이 제거된 십자가의 이미지는 그 구원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 그림으로 느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함보다 훨씬 더한 공포의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에 이 뒤틀리고 어두운 십자가의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포도주를 그의 피라 말씀하신 예수의 모든 기적과 모든 언어가 달렸던 십자가, 결코 반듯하고 말끔하지 않았던, 오히려 으스러지고 뒤틀린 형상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사순절 기간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래간만에 하는 금식, 특별새벽기도회, 부활절 달걀? 여러 예식과 결심들이 성행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때에 맞추어 하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잘 알아가는 것이며, 또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똑같은 이미지를 갖고 판에 박힌 예식적인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그 뜻을 이해하며 상상하고,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때문에, 그 걸어가는 길에 오늘 소개한 두 작가의 그림이 잠깐 멈추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의미 있는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


_꽤 애호가_

 

 

 


_참고서적 및 자료:

『조르주 루오』,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12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테오 순더마이어, 기독교사상 2004 10월호, 2004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판화를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

old.thirdmill.org/worship/rouault-l/default.asp/category/worshipsub1

 

아르눌프 라이너 뮤지엄 www.arnulf-rainer-museum.at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 www.tate.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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