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아리아(?)가 흐르고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린다. 피에 젖은 손이 가늘게 떨리며 수화기를 향한다. 초점이 나간 채 면도날과 이겨진 담배꽁초가 비친다. 피가 번진 욕조 안에 누워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몇 년간 교류가 없던 여동생이 협박과 애원을 뒤섞어 가며 오빠에게 부탁한다. 아이를 절대 혼자 둘 수 없으니 잠시만 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부탁할 사람이 오빠 밖에 없어서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전화했단다. 한동안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이내 건조하게 ‘okay’로 답한다. 음악은 급변하고 그는 황급히 손을 뒤덮은 피를 씻어낸다.


   어째서 였을까. 그가 손목을 세로로 긋고(대개는 가로로 긋지 않던가, 그렇게 선명하게 세로로 그은 건 처음 본 듯) 욕조 안을 온통 피로 물들인 것은. 죽기를 작정하고서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하지 못한 것은. 기왕지사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지 죄다 궁금해진다. 죽기 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면도날과 욕조를 뒤로하고 리치(혹은 리처드)는 대충 열 살 정도(4학년이라니)일 조카 소피아와 만난다. 소피아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조숙하다. 어른들 특히, 지금 삼촌이랍시고 자신을 맡아주러 온 어른(?)의 꼴을 보니 더 한심하다.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만나자 마자 가이드 라인을 챙기는 똑똑한 조카를 마주하니 삼촌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 


   어른스러운 소피아와 철이 덜 나 보이는 리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만 균형이 맞다. 삼촌을 수동공격형(passive aggressive)으로 정리해 버리는 냉정한 조카와 순간순간 현실에서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 지는 삼촌. 그 둘이 5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소녀는 욕조안의 삼촌을 세상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도 조카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에 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아직까지는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 서로에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불안과 초조 속에 버려졌다가 상대로 인해 느끼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순함이나 진실한 어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일단 그 틈이 생기면 함께한 시간이 짧던 길던 그 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진다. 


   그 ‘틈’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들이 궁금해지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내 상대를 걱정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며 서로를 보호하고 싶어진다.


   19분의 짧은 시간동안 감독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삶이 달라지는 모습을 음악과 함께 잘 버무려낸다.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따르게 마련인데 볼링장에서 소피아가 레인 위를 걸어가며 추는 춤과 음악은 정말이지 절묘하고 신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그 장면은 리치에게는 일종의 테라피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순간, 그의 세계에도 조금의 판타지가, 희망이 주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감독이 이 곡까지 썼다니 진짜 너무 매력적이다. 곡명은 “sophia, so far”, 유튜브에서 찾아보시길 권한다)


   다시 현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자신에게 기댄 어린 조카와 나란히 앉은 리치의 멍한 눈 속엔 무슨 생각이 자리했을까 계속 상상해 보았다. 어쩌지 못하겠는 감정이 그 멍한 눈동자 속에 회오리 치고 있었다. 타인과 연결된 삶, 그것에서부터 오는 위로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위로를 통해 조금 더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위로를 건내 주고 싶은 욕구도 피어난다.


   소피아를 통금시간(curfew)에 맞춰 여동생에게 데려다 주면서 그는 그가 거저 받은 진짜 위로를 그의 동생 메기에게 전한다. 형제란 참 오묘한 것이다. 진저리나게 싫다가도 다시 기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남편의 폭행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동생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고, 너는 절대 변하지 않는 ‘쿨함’을 지닌 멋진 동생이며 그 증거로 소피아가 ‘쿨한 것’이라고 위로한다. 논거가 너무나 멋진 칭찬이지 않은가. 


   창밖으로 절묘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젖어든다.(영화에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피로 물든 욕조에 걸터앉아 다시 옷을 벗고 자기 자리라고 믿고 있던 그 욕조 속에 잠긴다. 붕대를 풀고 면도날을 세워들고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애원하는 듯 들리는 따뜻한 벨소리. 전화선을 뽑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든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제안, 그의 얼굴에 비친 미묘하게 엷은 미소가 그가 다시 한번 욕조에서 나올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흐르는  Alex Ebert 의 ‘truth’ !!


   주연을 맡은 숀 크리스틴슨(Shawn Christensen)은 <커퓨(Curfew, 2012, 미국)>의 각본과 연출도 맡았다. 그 섬세한 표정과 눈빛은 누구보다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직접 주연을 맡은 것일지도). 이 단편으로 그는 아카데미와 끌레르몽 페랑, 스톡홀롬 영화제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영화를 보면 그럴 만 하군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너 지금 어디니’라는 질문은 마치 내게는 ‘왜 거기에 있니’ 라는 질문으로 들린다. 너는 왜 거기에 있냐고, 왜 욕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삶에 제한 시간을(CURFEW)을 두느냐고 말이다. 


   나는 지금 텅 빈 사무실이다. 한쪽으로는 내내 영화의 오프닝과 음악을 떠올리고 한쪽으로는 내일까지 제출해야할 실적 정리표를 생각한다. 황폐하기는 나도 리치와 매한가지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그도 사실은 욕조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욕조에서 자신을 끌어낼 동기를 끝내 찾지 못해 그 무료하고 텅 빈 시간을 끝내려 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동기가 생겼으므로, 그 동기는 또 새로운 동기를 낳을 것이므로 더 이상 마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관계의 밀고 당기는 일에 지쳤으나 어쨌든 동기가 있어 이곳을 지키고 앉았다. 문득 동기가 사라진 것 같아 허망한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울려주는 전화벨이 내게도 있어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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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어디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먼저 할 일은 돌아보는 일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더라 하며 내가 자리한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질문에 따라 답변은 내가 막 도착한 지하철 역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일 수 있다. 때로 ‘지금 어디냐’는 물음은 지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질문, 사회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때의 답변은 내 세세한 위치보다 내가 사는 사회의 맥락과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


Pablo Picasso, the Artist’s Eyes, 1917, Pencil on vellum paper, 

Museo Picasso Málaga, Rafael Lobato © Museo Picasso Málaga


‘지금’을 꿰뚫는 예술가의 눈

   지금 나의 거한 곳을 보여주는 것, 때로는 사실을 고발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수긍해온 현실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은 문학과 함께 예술이 감당해 온 고유한 역할이다. 예리한 눈길로 표면적인 현실에 감추어진 욕망과 무지, 왜곡과 한계를 간파하는 것. 피카소가 그린 ‘예술가의 눈’은 사물의 정수를 다 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의 먼지에 덮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실과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내 고발할 것 같은 눈빛으로. 


   예술 안에서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발견하는 이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하는 장르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너 지금 어디니? 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인 대답, 나 여기야 하고 보여주는 사진들. 사진에도 왜곡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적어도 보여지는 현실을 진술하고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눈으로 오늘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좀 더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지않을까? 때문에 이번에는 ‘저 서있던 자리에서, 어떤 것에도 눈 감지 않은 채로 시선을 던진’ 사진과 사진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요세프 코우델카 Josef Koudelka,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 Prague. August 1968. 

Warsaw Pact Troops invade Prague. In front of the Radio Headquarters, 1968 © Josef Koudelka/Magnum Photos


1968년 8월의 프라하, 요세프 코우델카

   사진의 제목에서 명백히 보여주듯 때는 1968년 8월, 이곳은 프라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68년의 봄이 지나고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했던 당시를 사진에 담았다. 장소는 제목에 나타나듯, 프라하의 라디오방송국 본부 앞, 시내 한복판. 인적은 드물지만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이 감돈다. 하지만 너 어디에 있니? 라는 대답에 가장 적합한 대답으로 보이는 사진이다. ‘난 지금 프라하의 라디오 방송국에 있고, 지금은 정오를 갓 넘겼어, 여길 좀 봐’하는. 


   그러나 사진은 단순한 대답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시계바늘 너머 삼엄한 프라하의 거리를 보여주고, 작가의 것으로 보이는 팔은 단순히 시계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이 사태를 지켜보는 한 사람의 결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 굳센 주먹을 보라. 


   이 사진을 찍은 ‘요세프 코우델카(Josef Koudela 1938~)’ 는 후에는 세계적인 보도사진작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에 소속되지만, 당시에는 막 전업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른 살의 젊은 작가였다. 68년 8월 당시 프라하에 있었던 그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눈 앞에서 보게 되고, 일 주일 동안 그 침공 현장을 쏘다니며 시민들의 저항과 소련군의 공격을 렌즈에 담게 된다. 결과물은 5,000여장의 사진들. 그야말로 그가 당시 거기에 있었으므로 찍을 수 있었던 사진들이자, ‘나는 여기에 서서 이 순간을 목도했노라’는 고백과 고발의 시선인 것이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부터 8월에 있었던 소련의 프라하 침공 이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68년 1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당 제 1서기를 맡게 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강령 아래에 새로운 개혁을 시도한다. 이전까지는 제한되었던 언론과 집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사회를 다시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시기가 이때이기도 하고, 소설의 여주인공인 테레사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것도 코우델카가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68년의 프라하 침공 때였다.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1979년 10.26 사건부터 80년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까지의 기간 역시 이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 민주화의 움직임은 당시 소련의 눈에 달가워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동유럽권에 영향을 주어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권의 힘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여러 협상과 회담을 거쳤지만 결국 1968년 8월 20일,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군 20만 명을 앞세워 프라하를 침공하고 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개혁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찼던 프라하의 봄은 이렇게 쉽게 스러지고 말았다. 


   이 때 젊은 작가 코우델카의 눈은 긴급한 그 거리를 향하고, 후에 ‘68년 프라하 침공(Invasion Prague, 68)’이라고 명명되는 이 사진들을 남긴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이 길었지만, 사진에 대해 설명할 것은 별로 없다. 지금 그곳에 서 있었던 그의 시선과 프레임 안에 가득한 긴장을 보는 것 밖에는. 평화가 사라진 거리와 불안한 시선들, 이곳과는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부재와 불안한 시선들은 다른 모양으로 서울의 거리를 메우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서울, 최민식

   그런가 하면, 전후 한국을 바라보았던 또 하나의 치열한 시선, ‘최민식 작가(1928~2013)’ 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최민식 작가는 우리나라의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 작가로 195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을 렌즈에 담아왔다. 그를 수식하는 ‘가난의 얼굴을 찍는 예술가’, ‘빈민의 사진가’와 같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전후의 가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포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고백하건대,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이 글의 제목은 최민식 작가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독한 가난을 지독하게도 담아왔기에 간첩이라고 오해도 수없이 받아왔고, 독재정권 시대에는 나라망신 시킨다며 여러 음모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이러한 현실에 있다’고 하는 고발이자 정직한 대면으로써의 사진을 낳은 것이다. 그의 글 한 부분을 여기서 소개한다. 


최민식, 1965년 대구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진실한 창작을 위한 자기 도전이 있을 뿐, 후미진 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머무는 곳은 어디라도 내 사진의 영역이 된다. 그곳은 가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한다. 사진은 볼 때마다 깊이를 느낄 수 있고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마음으로 고통에 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침묵 그리고 미소...... 이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만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풍부함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통해 물질적 번영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려 했다. 나의 사진의 기조는 무엇보다 민중과 같이 하는 삶에 있다. ‘우리 삶의 진실한 이야기’를 민중에게 전하려는 사명감과 당위성, 이것이 내 사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휴먼선집』, 최민식, 눈빛출판사


   부산에 살며 자갈치 시장과 영도,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민중들을 찍어온 시선은 그저 누군가의 인물사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된다. 사진이란 그저 보이는 얼굴을 찍었을 뿐이지만 고단한 주름과 지친 몸, 어떤 몸짓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가 오늘날의 서울을 찍는다면 어떤 사진들이 나올까.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몇몇 SNS에 ‘체크인’이라는 기능이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장소를 태그해서 보여주는 방식이고 사진을 첨부하기도 하는데, 그게 어쩌면 ‘나는 여기에 있다’ 라는 오늘날 방식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묻든 묻지 않았든. 또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 덕에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지기도 했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그러하듯. 그러나 요세프 코우델카와 최민식의 시선과 같은 치열함은, 대답하기 편리한 셋팅과는 별개의 문제. 너무나 쉬워진 생활에 혹은 일상의 먼지에, 정작 사람의 삶에는 너무나 자주 눈 감아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울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사건들에 대해, 더 가깝게는 내 주변의 사람과 장면에 대해서.


“ 사람이, 그것도 서럽고도 착한 사람이

거기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사진 속의 아득한 시절,

아득히 먼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서 운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을 찍었다.”    - 최민식-

_꽤 애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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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살면서 내 삶을 뜨겁게 달군 음악들이 있어, 표류하지 않고 살았나 싶다.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나는 21세기 음악보다는 20세기 음악이 더 좋다.


1. The Beatles

   어릴적 집에는 고모가 쓰다가 주신 빨간색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나름 최신형 이어서 테이프도 2개 들어가고 녹음도 되는 카세트라디오 였다. 아버지는 어느 날 길거리 리어카에서 파는 짝퉁 ‘비틀즈’ 테이프를 하나 사 가지고 오셨는데 그것이 내 인생과 팝송이 만나는 첫 순간이었다. 앞에는 [Revolver]라는 글씨와 함께 멋진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 커버는 참 멋졌다. 나중에 커서 음악을 많이 들어가며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사 오신 비틀즈 테이프는 비틀즈의[Revolver]앨범이 아니라 커버만[Revolver]이고 수록곡은 그냥 히트곡 모음집 이었다. 딱히 집에 들을만한 음악도 없었고 어린 나이에도 나훈아나 김수희는 듣고 싶지 않았나보다. 심심할 때 마다 그냥 틀어놓고 들었는데 듣다보니 좋아졌다. 지금은 비틀즈의 음반을 몇 장 가지고 있지만, 어릴 적 들었던 그 테이프만큼 히트곡이 잘 정리된 앨범은 없었다. 가끔 그립다. 카세트테이프도 그립고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리어카 짝퉁 테이프 사장님들의 모습도 그립다.


2.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이다. 나는 절대 MP3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어둠의 경로로 많이 돌아다니는 무손실 음원만을 찾아 듣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음악을 꼭 CD로만 듣는다.[각주:1]    

   왜냐하면 나는 앨범 재킷까지 음악의 일부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은 음질의 소리를 듣기 위해 좋은 스피커를 사들이는 사람은 또 아니다. 그저 라디오 되고 카세트테이프 하나 들어가는 조그만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다. 물론 좋은 스피커 시스템이 있다면 더 감동적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그만 플레이어를 통해 방 안을 넉넉히 채울 정도의 크기로, 내가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앨범을 들으며, 그 앨범의 재킷을 꺼내 보는 일이 너무도 소중하다. 기다리던 아티스트의 앨범을 앨범가게로 달려가 사고, 재킷을 빨리 펼쳐보고 싶은 마음에 잘 뜯어지지도 않는 비닐을 낑낑거리며 뜯을때 그 설렘은 경험 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에게 음악이란 현란한 코드와 허를 찌르는 화성악이 아니라 모든 순간이다. 나는 정말 그 순간을 사랑한다.


3. ‘Skid Row’ [Skid Row] - <I remember you> / 1989

   중2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나가 많은 관계로 일찍이 팝, 록음악들을 접했던 동네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나보고 들어보라며 억지로 헤비메탈/록 앨범들을 빌려 주기도 했지만 별로 관심이 없던 나는 들었던 척 하고 다시 돌려주곤 했었다. 한번은 그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죽이는 노래’가 하나 있다며 들려 준 곡이 메탈벤드 ‘Skid Row’ 1집 수록곡 <I remember you>였다. 이곡은 내 인생에선 매우 중요한 곡이다. 이 곡 때문에 메탈,록 음악들을 듣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음반을 사 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곡을 처음 듣는 순간 내 맘속에선 뭔가가 불타올랐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폭풍이 가슴팍에 전속력으로 와서 꽂힌 기분이었다. 교회용어로 표현하자면 ‘은혜 받았다’ 혹은 ‘성령의 불이 임했다’ 뭐 이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다. 암튼 너무 좋아서 그때부터 메탈, 록 음악을 듣기 시작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음악이 너무 좋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 너무 좋아 하루 종일 듣고 싶은 노래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구나!!!


   

   ‘Skid Row’는 미국 뉴저지 출신의 메탈밴드이다. 1989년 1집 앨범인 [Skid Row]는 정말 귀에 쫙쫙 달라붙는 좋은 앨범이다. 어느 곡 하나 버릴 곡이 없이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다 좋았다. 특히 좀 시끄럽다 싶으면 나오는 발라드곡인 <18 and Life>, <I Remember You>는 사춘기, 한참 예민했던 내 감성을 후벼 파 놓았다. 요즘은 메탈음악 듣는 분들을 만나기도 힘들지만, 만약에, 아주 혹시나 메탈음악에 입문하실 생각 있으시면 이 앨범으로 시작 하시면 되겠다. 메탈음악 입문용 에피타이저 라고나 할까?


4. ‘얼터’ (ALTAR ARTER) 1집 / 1998

   고3때였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때는 각 교회마다 겨울만 되면 ‘문학의 밤’ 행사를 했었다.(문학이라니!!!! 지금 상상 할 수 없는 단어다!!!!) 그때 당시만 해도 문화는  교회에서 이끌어 갔다. 드럼을 뚱땅 거릴 수 있던 곳도 교회였고, 캠코더를 가지고 시덥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곳도 교회였다. 연극, 뮤지컬을 직접 대본도 써가며 만들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이기도 했다. 그때 만 해도 교회는 놀이터였고 문화의 요람이었으며, 스스럼없이 누나, 형, 동생을 만나고 연애도 걸어 볼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곳이었다. 그때는 교회가 놀이동산, 오락실 보다 더 재미난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문화적으로 진보적 이었던 건 아니었다. 새파란 것들에게 캠코더와, 드럼, 음향장비를 매년 겨울에 허락 한건 그 새파란 것들에게 문화적 체험과 산교육을 시켜 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그런 좋은 선생님, 형들도 물론 계셨지만!!) 그것은 단지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이건 군대에서 초코파이 주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그런 행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들을 전도 할 수 있는 장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그때만은 통 크게 허락 한 것이리라! 그리고 각 교회들에서 문학의 밤이 열리는 시기가 봄방학을 전후 하여 진행되니 ‘공부’에 대한 간섭도 약간 느슨할 때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기간쯤 되면 한동안 안 나오던 친구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 교회를 다니게 되는 친구들도 생겨났으니 성과는 있었다고 봐야겠다. 뭐, 서로 win-win 한 거라 치자.

   때는 바야흐로 고3때. 문학의 밤이 열리던 날, 나는 음향을 셋팅 하며 스피커 테스트도 할 겸 CD플레이어에 CCM[각주:2] 명반 ‘얼터(ALTAR ARTER)’ 의 1집을 걸었다. 나온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앨범 이었다. 앨범의 첫 곡<intro>가 ‘괴성’으로 시작하는지라 1분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꺼야 했다. 준비를 지켜보시던 전도사님이 한마디 하셨기 때문이다. “시끄럽다. 가요 듣지 마라, 빨리 꺼라”   


  

 ‘얼터(ALTAR ARTER)’는 1998년 첫 앨범을 내고 본격적으로 CCM에서 활동을 시작 했다. 당시 CCM 가수들과 다르게 이 밴드는 홍대에서 공연을 계속해 오던 실력 있는 팀이었다. 1집 앨범이 98년에 나온 앨범이니 벌써 나온지 15년 정도 돼가는 앨범이다. 하지만 지금 들어도 이 앨범은 매우 뛰어나다. 기본적으로 록밴드이면서 펑키(펑크말고!!)[각주:3]한 사운드를 많이 내던 팀이었다. 사운드도 좋았지만, 가사도 매우 훌륭한 곡들이 많다. 단순히 좋은 말만 늘어놓는 찬양[각주:4]이 아니라 신앙과 삶, 사회를 관찰하고 묵상한 곡들이 앨범을 두루 채우고 있다. ‘얼터’는 현재 활동을 안 하고 있는 상태이고 1집과 2집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유투부에서도 거의 찾을 수 없다.) 다행히 1집의 대부분의 곡들을 리마스터링 하고 신곡을 추가해 2002년 발매한 [Re FEEL] 앨범은 갓피플닷컴(http://mall.godpeople.com/)에서 구할 수 있으니(9,000원 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이건 공짜나 다름없다!!!) 꼭 구해서 들어 보시길 추천한다. 언제 절판될지 모른다.


   음악의 취향을 떠나서 음악은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록음악을 매우 좋아 하지만 록 음악 만이 최고의 음악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거의 듣지는 않지만 트롯트나 클래식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 CCM은 그러질 못했다. 교회에서 록 음악 은 오랜시간동안 사탄의 음악이었고 90년도 중반부터 잠깐 CCM의 중흥기를 맞아 CCM에서도 록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 했지만 천대 받았다. 사람들이(교인들이)별로 좋아 하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그들은(집회, 행사에) 불러 주지 않았다.(교인들이 싫어하니 당연히 부를 수 없었겠지...) 그렇다고 사람들이 음반을 많이 사 주었던 것도 아니고....... 언젠가 CCM에 대해서 정리해볼 생각이지만, CCM은 참 생각 할수록 답답하고 안타깝다. 할 말이 많지만 이글의 주제는 아니므로 이만 줄인다.


5. Cowboy Bebop OST1 / 1998 

   지금 정말 많이 변했어도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아직 만화일 뿐이다. 옛날처럼 불량문화로 까지 대접 받는 건 아니지만, 만화책을 일반 책들보다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의기는 아직도 남아있다. 나 같은 인간이야 만화책을 보면서도 독서라고 생각하지만 안 그런 사람도 꽤 많으니까.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만화영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은 많고 많다. 


   일반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만화 좀(에니메이션 포함해서)본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명작 중에 명작으로 추앙받는 시리즈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카우보이 비밥’이다. 1998년~ 1999년 까지 총 26화에 걸쳐 방영된 에니메이션 시리즈로 2071년 미래를 배경으로, 우주에서 현상수배범들을 잡는 카우보이들의 모험을 다룬 이야기다. 이 작품은 분위기가 묘하다. 애수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장해 보이기도 하고, 그냥 재미삼아 가볍게 봐 넘기기 힘든 진한 여운이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쩌면 만화보다는 OST가 더 유명 할지도 모르겠다. 만화는  안봤어도 OST는 한 번씩 다 들어 봤을 거다. 언제 들어봤냐고??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CF나 라디오 방송에서 많이 들려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메인 테마곡 <Tank!>와 <Waltz for ZIZI> 라는 곡은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할 만큼 익숙한 곡이다. 



   좋은 곡들이 많은 앨범이지만 그중에서도 메인테마곡 <Tank!>가 흐르는 오프닝을 꼭 찾아서 보시기를 추천한다.(찾아보니 유투브에 1회를 누가 올려 놓았더라.) 지금 봐도 ‘카우보이 비밥’의 오프닝은 ‘007 제임스본드’ 시리즈도 울고 갈만큼 멋지다. 아마 보는 순간  ‘카우보이 비밥’의 매력에 빠질 수 있으니 주의 하시길.


0’

   이외에도 살면서 내 삶을 뜨겁게 달군 음악들은 많았다. 음악은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고 지금도 선물 받고 있다. 그 덕에 표류하지 않고 요즘도 지내고 있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준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뽀뽀를...

_거의 편집장_



덧 : 

*얼터는 차명진(보컬, 베이스기타)이 2008년 4월경 새로운 맴버구성으로 컴백하기는 했었다. 신곡도 발표하고 공연도 몇 번 했었는데, 주목 받지 못했다.   

* ‘카우보이비밥’ OST의 음악 감독인 Yoko Kanno 는 이 작품이외에도 다수의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만들어오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2007년경 많은 곡들에 표절의혹이  터져나와  그동안 이미지에 심한 금이 갔다. 표절의혹에 대한 공식적인 해명은 찾을 수가 없었다.(내가 못 찾은 건가??) 의혹 이후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제보 좀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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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물론 나도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LP로도 음악을 듣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약이 좀 많다. 턴테이블도 없을 뿐 더러(요즘엔 저렴하게 나오기도 하더만...) 좁은 집에 커다란 LP를 사 모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내가 처한 환경에선 CD가 최고다. [본문으로]
  2. CCM :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줄임말로 일반적으로 동시대 적이고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을 말한다. 이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음으로 미룬다. [본문으로]
  3. 펑키와 펑크의 차이를 투박하게 예로 들자면, ‘데이브레이크’가 ‘펑키’ 쪽 ‘노브레인’ ‘크라잉넛’이 펑크 쪽이라 대충 이해하시면 된다. [본문으로]
  4. 나는 정말 묻고 싶다. 요즘 CCM이나 찬양 가사 쓰시는 분들은 정말 묵상하고 쓰시는지 묻고 싶다.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고 찬양이 되고 CCM이 되나?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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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뜨 빼쩨르부르끄[각주:1]의 뽄딴까 운하에는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다리가 없다. 운하에는 관광객들을 실은 배들이 느긋하게 지난다. 수십 개의 다리 밑을 지나고, 수십 명의 사람들과 다리 위에서, 아래에서 눈을 마주친다. 낮에도 그러하지만, 백야가 펼쳐지는 여름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이 다리 위에서 운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혹시 아는가. 누군가는 누군가를 인연으로 만나기도 하는 것. ‘나스쩬-까’[각주:2]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 운하를 건너는 다리는 낭만적인 공간이다. 몽상가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러시아에 있었다. 22일, 6월, 2013년.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사진마다 날짜와 시간을 꼬박꼬박 새겨 넣었다. 지워버릴 순 없지만, 버튼 하나로 수정할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300년이 된 도시에서 쉽게 감상적이 되거나, 자주 중2병 걸린 허세남이 되었다. 누구라도 300년이 된 도시에 서 있으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를 여행하기 위한 준비물이랍시고, 타블릿 PC에 가득 넣어갔던 러시아 문학가들의 작품은 여행 며칠 만에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의 나스쩬까처럼 짧은 환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즉, 간단히 말하면 도둑맞았습니다.) 그렇다. 바로 나스쩬까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짧은 단편소설은 그렇게 내 손을 떠났다. 일정에 쫓기다 보니 진득하게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 짧은 단편소설, ‘백야’를 읽었다. 읽었다고 하기에도 모자라다. 나는 소설 ‘백야’를 봤다. 읽었다는 느낌만 남아있는 상태,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그 책에 대해 설명하거나 소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러시아에서 소설 ‘백야’와 ‘백야’를 봤다. 그런 것도 낭만이 될 수 있는 도시일까, 상-뜨 빼쩨르부르끄. 


   말하자면, 나의 이 낭만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견된 것은 낭만이 아니라 낭만에 대한 추억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추억할 뿐이다. 낭만적인 것은 그런 것이다.  지난 뒤에 발견됨으로써 소중해지는 것. 그것은 이렇게 마감에 쫓긴 새벽에도 존재하고, 하염없이 늘어져 낮잠을 자고 일어난 오후의 소나기에도 존재하는 것. 우리가 끊임없이 묻는 당신의 안부에도 사실 낭만이 존재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만, 설레고 마는 것이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 했던 책들은 모두 저 스웨덴의 낯선 사람 손에 들려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이 순간 낭만을 떠올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한번 가보시라. 쌍-뜨 빼째르-부르끄-


2013년 7월 한국. 깜깜한 밤.

 _대충 소설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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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 표트르대제가 1703년 설립하여 1713년 천도,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러시아 제2의 도시,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리우며, 레닌그라드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진 도시. 쌍-뜨 빼쩨르부르끄. [본문으로]
  2. 나스쩬까 : 도스토옙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다리 위에서 슬픔에 잠긴 채 서성이는 모습을 본 몽상가인 주인공 청년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 매달린 여인의 이름. 헤어진 애인을 만나기로 한 다리에서 매일 기다리지만, 애인은 오지 않고, 이윽고 진실하게 애정을 고백하는 몽상가 청년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옛 애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겨버린 괘씸녀.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내가 너에게 이렇게 묻는 이유는,

너의 위치를,

너의 지위를,

네가 발전하고 있는지, 혹은 후퇴하고 있는지,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를 묻고 싶어서가, 


아 니 야!


네가 어디있는지 알아야, 

내가 놀러갈 수 있잖아!!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집에서 키우는 화초(천냥금) 하나가 있는데, 제법 자라 분갈이를 해줘야 해서 동네 뒷산으로 갔다. 삽이 없어서 주위에 돌로 조금씩 파내어 화분에 흙을 채우면서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내가 어릴 때는 노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도 들지 않는 일 이었다. 군것질을 할 때나 돈이 좀 필요 했지, 놀기 위해 돈을 쓰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 뒷산이, 학교 운동장이, 밤나무가, 잠자리가, 사방 천지에 깔린 흙과 돌과 나무가 모두 나와 내 친구들의 장난감이었다. 그때는 그냥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는 심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심심한 것 자체도 나름 괜찮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 그때는 노는데 꼭 친구들이 필요했다. 이건 시골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에서도 그랬다.


   노는데 돈이 필요 할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즘엔 돈이 없으면 놀기 힘들다. 아니, 돈이 없으면 놀기가 힘든 게 아니라 돈 없이 노는 방법을 까먹었다. 엔터테인먼트를 사면서 판타스틱하게 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노는 기분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각주:1] 나이가 드니까, 남들이 ‘어른’이라 불러주는 나이가 되니까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 때에도 왠지 쫓기는 마음,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되니까 논다는 것이 굉장히 무책임한 범죄를 저지르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동무들아, 형, 누나, 아우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얼 위해서? 또 도대체 언제를 위해서?


   오늘은 매우 더운 날 이었다. 나는 걷기도 힘든데 깔깔 거리며 뛰어 다니는 동네 꼬마 들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대기업 다니는 후배의 얼굴도 떠올랐다. 지금은 밤 10시 28분 그 후배는 집에 들어 왔을까?


   나는 덜 벌고 더 노는 세상을 꿈꾼다. 여기서 덜 번다는 뜻은 무소유로 살겠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그저, 이루지도 못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기계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니까 야근 안하고 ‘칼 퇴근’해서 저녁에 빈둥거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좋은 사회인거다. 심심해 죽겠는 세상이 사실 좋은 사회 인거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2013. 7월 3일 

_거의 편집장_ 

   


  1. 엔터테이먼트를~(중략)~아닐까 : 누가 한 말인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어디선가 이런 생각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순수하게 내 생각은 아님을 밝힌다.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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