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아리아(?)가 흐르고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린다. 피에 젖은 손이 가늘게 떨리며 수화기를 향한다. 초점이 나간 채 면도날과 이겨진 담배꽁초가 비친다. 피가 번진 욕조 안에 누워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몇 년간 교류가 없던 여동생이 협박과 애원을 뒤섞어 가며 오빠에게 부탁한다. 아이를 절대 혼자 둘 수 없으니 잠시만 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부탁할 사람이 오빠 밖에 없어서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전화했단다. 한동안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이내 건조하게 ‘okay’로 답한다. 음악은 급변하고 그는 황급히 손을 뒤덮은 피를 씻어낸다.


   어째서 였을까. 그가 손목을 세로로 긋고(대개는 가로로 긋지 않던가, 그렇게 선명하게 세로로 그은 건 처음 본 듯) 욕조 안을 온통 피로 물들인 것은. 죽기를 작정하고서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하지 못한 것은. 기왕지사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지 죄다 궁금해진다. 죽기 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면도날과 욕조를 뒤로하고 리치(혹은 리처드)는 대충 열 살 정도(4학년이라니)일 조카 소피아와 만난다. 소피아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조숙하다. 어른들 특히, 지금 삼촌이랍시고 자신을 맡아주러 온 어른(?)의 꼴을 보니 더 한심하다.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만나자 마자 가이드 라인을 챙기는 똑똑한 조카를 마주하니 삼촌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 


   어른스러운 소피아와 철이 덜 나 보이는 리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만 균형이 맞다. 삼촌을 수동공격형(passive aggressive)으로 정리해 버리는 냉정한 조카와 순간순간 현실에서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 지는 삼촌. 그 둘이 5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소녀는 욕조안의 삼촌을 세상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도 조카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에 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아직까지는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 서로에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불안과 초조 속에 버려졌다가 상대로 인해 느끼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순함이나 진실한 어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일단 그 틈이 생기면 함께한 시간이 짧던 길던 그 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진다. 


   그 ‘틈’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들이 궁금해지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내 상대를 걱정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며 서로를 보호하고 싶어진다.


   19분의 짧은 시간동안 감독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삶이 달라지는 모습을 음악과 함께 잘 버무려낸다.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따르게 마련인데 볼링장에서 소피아가 레인 위를 걸어가며 추는 춤과 음악은 정말이지 절묘하고 신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그 장면은 리치에게는 일종의 테라피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순간, 그의 세계에도 조금의 판타지가, 희망이 주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감독이 이 곡까지 썼다니 진짜 너무 매력적이다. 곡명은 “sophia, so far”, 유튜브에서 찾아보시길 권한다)


   다시 현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자신에게 기댄 어린 조카와 나란히 앉은 리치의 멍한 눈 속엔 무슨 생각이 자리했을까 계속 상상해 보았다. 어쩌지 못하겠는 감정이 그 멍한 눈동자 속에 회오리 치고 있었다. 타인과 연결된 삶, 그것에서부터 오는 위로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위로를 통해 조금 더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위로를 건내 주고 싶은 욕구도 피어난다.


   소피아를 통금시간(curfew)에 맞춰 여동생에게 데려다 주면서 그는 그가 거저 받은 진짜 위로를 그의 동생 메기에게 전한다. 형제란 참 오묘한 것이다. 진저리나게 싫다가도 다시 기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남편의 폭행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동생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고, 너는 절대 변하지 않는 ‘쿨함’을 지닌 멋진 동생이며 그 증거로 소피아가 ‘쿨한 것’이라고 위로한다. 논거가 너무나 멋진 칭찬이지 않은가. 


   창밖으로 절묘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젖어든다.(영화에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피로 물든 욕조에 걸터앉아 다시 옷을 벗고 자기 자리라고 믿고 있던 그 욕조 속에 잠긴다. 붕대를 풀고 면도날을 세워들고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애원하는 듯 들리는 따뜻한 벨소리. 전화선을 뽑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든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제안, 그의 얼굴에 비친 미묘하게 엷은 미소가 그가 다시 한번 욕조에서 나올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흐르는  Alex Ebert 의 ‘truth’ !!


   주연을 맡은 숀 크리스틴슨(Shawn Christensen)은 <커퓨(Curfew, 2012, 미국)>의 각본과 연출도 맡았다. 그 섬세한 표정과 눈빛은 누구보다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직접 주연을 맡은 것일지도). 이 단편으로 그는 아카데미와 끌레르몽 페랑, 스톡홀롬 영화제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영화를 보면 그럴 만 하군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너 지금 어디니’라는 질문은 마치 내게는 ‘왜 거기에 있니’ 라는 질문으로 들린다. 너는 왜 거기에 있냐고, 왜 욕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삶에 제한 시간을(CURFEW)을 두느냐고 말이다. 


   나는 지금 텅 빈 사무실이다. 한쪽으로는 내내 영화의 오프닝과 음악을 떠올리고 한쪽으로는 내일까지 제출해야할 실적 정리표를 생각한다. 황폐하기는 나도 리치와 매한가지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그도 사실은 욕조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욕조에서 자신을 끌어낼 동기를 끝내 찾지 못해 그 무료하고 텅 빈 시간을 끝내려 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동기가 생겼으므로, 그 동기는 또 새로운 동기를 낳을 것이므로 더 이상 마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관계의 밀고 당기는 일에 지쳤으나 어쨌든 동기가 있어 이곳을 지키고 앉았다. 문득 동기가 사라진 것 같아 허망한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울려주는 전화벨이 내게도 있어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_다르덴 자매님_


----------------------------------------------------------------------

3호 전체를 보시려면  PDF를 다운 받으세요.

http://noldaga.tistory.com/33


다운 없이 지금 당장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http://issuu.com/noldaga/docs/___________3______________________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사이’라니 이렇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말이 있을까. 게다가 한국어 발음은 듣기에도 사랑스럽다. 


  ‘사이’라는 단어의 온도는 어떤가. ‘사이’는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말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온도를 가늠할 수 없듯,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온도’ 차이를 감당할 수 없듯, 우리는 늘 ‘사이’에서 번민하고 만족한다. ‘사이’ 라는 단어에서 오는 친밀감은 때론 더 이상은 좁힐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 시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가 되기도 하니 ‘사이’ 라는 의미만 잘 감당하며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은 관계와 시간 ‘사이’를 가장 잘 녹여낸 영화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제시 役), 줄리 델피(셀린 役)가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에 이어 18년의 시간을 녹여낸 작품이니까. 지난 금요일 미드나잇, 밤을 지새우며 이 영화를 보았다. 


   제시와 셀린은 이제 늙고 배나온 중년의 여느 부부와 같다. 빛나던 순간과 서로를 그리워하던 시간은 이미 우주 저편에 가있는 듯 현실을 살고 있는 입담 좋은 부부.  


   “Happinese is in the doing..Not in the getting what you want.” 라고 고백하던 그들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그 시간을 잡아채었다. 비행기는 떠나고 그들은 남았다.(비포 선셋) 이제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해가 아직 머물러 있음을, 그렇게 머물러 있다 저물어 갈 것임을 해질녁 그리스 카르다밀리의 해변에 앉아 이야기 한다. 


“still there, still there, ... gone.”

   지는 석양빛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며 던진 대사가 그들의 삶의 모습 같고 꼭 우리의 모습 같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빼앗긴 듯 서로를 갈망하던 그들도 삶이 라는 시간을 감당하니 ‘사이’를 실감하게 된 듯 보인다. 서로의 ‘사이’에 존재하던 간절함과 그리움은 이제 서로에 대한 익숙함과 견딜 수 없음으로 변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시간 ‘사이’를 정말이지 엄청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멋진 아침을 맞이하기 전 셀린은 말한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아. 그러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너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존재 할 것 같아.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은 너와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中에서)


   나 역시 우리가 믿는 신이 나와 당신의 사이에 존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서로를 통해 자신의 신을 보지 못한다면 신을 믿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너무 위선적인 셈이지 않은가. 그 ‘사이’를 존중할 수 있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믿는 신을 함께 읽는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 푸른 향기로 터질 것 같은 시절 만나 그들의 불안과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해 쏟아내며 아침이 밝아오기 전 따분하던 삶에 생기를 되찾고 서투른 삶을 서투른 채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침이 오기 전까지 깊은 밤(미드나잇)을 함께 한다. 


   함께 밤을 지새우다 아침을 맞이하고 정오의 햇살을 즐기다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게 되는 동안, 그 ‘사이’에 우리는 어떤 ‘사이’ 로 익게 될까. 그렇게 다시 밤의 한가운데로, 어두움의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 제시와 셀린은 그 기억을 자양분 삼아 삶을 이어간다.


‘사이’의 다른 말은 추억일 것 같다.  

   “Memory is a wonderful thing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비포 선셋 Before Sunset>中에서)

   우리가 그 기억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으면 현재와 잘 조율해 낼 수 있다면 , 우리도 아마 그 ‘사이’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시와 셀린 그들의 ‘사이’ 도 그렇게 존재한다. 설레임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 이제 함께 하며 그 추억과 현재를 영민하게 묶어가며 그들 ‘사이’를 지탱한다. 무너졌다 일어나고 추억과 현재를 비벼내며 다시 웃고 한 방향을 향해 나란히 앉는다.


   다만 삶의 ‘사이’들이 지나가도록. 그 모든 것이 석양 너머로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긋이 바라본다.


just passing through...

태양과 함께 우리의 삶이 저물도록.

_다르덴 자매님_



   

   덧,  글을 쓰면서 느는 건 변명뿐 인 것 같다. 숙고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지 못함에 대한 변명, 사색의 시간보다는 연애에 힘써야 한다는 변명까지. ㅋ

변명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읽을거리를 내놓는 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부담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숙고의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글이라 부끄러움에 몇 줄 더 첨언해본다. 다음 달엔 보다 재밌고 깊이? 있는 읽을거리를 내놓도록 숙고하리라 스스로 다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생일은 의외로 꽤 쓸쓸하다. ‘당연한 기쁨’ 이 강요된 덕분에 ‘외로움’ 이 더 두드러진 탓이다. 언젠가는 생일을 맞을 당신을 위해(이미 맞았거나, 아무튼) 여기 한편의 꽤 쓸쓸한 영화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작품. 전작으로는 <불량공주 모모코(下妻物語 Kamikaze Girls, 2004)>가 비교적 유명하다. 영화는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감,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 덕에 무아?의 경지, 나를 잊는 경험을 선사한다.(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마츠코는 사랑받고 싶은 어린소녀다. 병약한 동생 덕에 집안에서는 늘 순위가 밀린다. 근심 가득한 아빠를 밝게 웃게 하고픈 어린 소녀는 인생은 아마도 디즈니 동화의 다른 모든 공주들의 삶처럼 반짝일 거라 믿는다. 가족이 바라는 대로 교사가 된 23살의 마츠코는 사소한? 실수와 오해로 인생의 모든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나.락.을.


   생일에 느끼는 쓸쓸함은 인생으로부터 전해지는 쓸쓸함과 맞닿아 있다. 생일이니까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은 나 자신과의 괴리로부터 오는 쓸쓸함 말이다. 태어났으니까, 살아 가야 하니까, 아마도 행복한 생(生)일 꺼라 기대하지만, 나와 당신의 삶이 막상은 그다지 신나지 않아서 아마도 더 외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마츠코의 삶이 그렇다. 인생은 아마 즐거울 것이며 적어도 나의 삶은 기대보다 더 빛날 것이라는 그녀의 꽃빛 공상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지의 현실로 바뀌었다. 


마츠코의 쓸쓸함


“쓸모없는 인생이었어.”

   

   자기 누이 마츠코의 죽음을 두고 그녀의 남동생은 말한다. 타인의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덜컹거린다. 동생이 보기에 삶의 나락을 기어 다니다 죽어버린 누이는 쓸모없는 생을 살다간 먼지 같은 여인네일 뿐이다. 혐오스럽다 불렸던 누나, 마츠코.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살아갈 동기가 필요했다. 나락에 던져진 후에는 그 동기가 더욱 간절해진다.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그 무엇. 어떤 고난과 역경도 절대 나 자신을 꺽지 못하게 할 그런 동기, 생을 버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마츠코에겐 살아갈 동기란 사랑 이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병약한 여동생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어서 그녀는 사랑을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전혀 회복될 수 없는 나락들이 에워싼 순간에도 무엇이 삶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사랑.


   사랑에 목을 매는 마츠코의 모습이, 타인의 멸시와 폭력, 지독한 태도들을 견뎌내며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려는 그녀는 한심하고 비참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여성비하적이라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혐오스럽고 처절한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다만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될 수 없으며 더욱이 내면의 기준을 흔들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철저하게 사랑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택한 여인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소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청년 류.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마츠코의 후회 없고 미련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 두렵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친 그로 인해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한다. 


   뒤늦게 류는 도망의 끝에서 마츠코를 통해 신을 만난다. 신의 사랑이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한없는 사랑이 꼭 그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코 버리지 않는, 뒤돌아서지 않는 그런 사랑.

   

   늘 고향의 강을 그리던 그녀, “다녀왔어” 라는 인사에 “어서와” 로 맞이해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랬던, 평생 사랑을 주기만 하다 스러져간 마츠코는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한 어느 밤, 고향을 닮은 강을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삶은 쓸쓸할지언정 쓸모없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죄송한 삶,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나의 외로움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생일이 특별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가만히 보니 기쁨에 대한 감각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의 감각들은 날로 예민해진다.


   개인적으로 생일이 불편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크리스천의 ‘강요받은 기쁨’ 에 기인한다. 생명, 그분의 희생은 나에게도 무엇보다 귀하지만 세상이, 또 내가 속한 교회의 환경이라는 것이 스스로 생명의 기쁨을 묵상하고 기뻐할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기쁨’ 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참’ 기쁨을 누리라니. 기뻐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범하는 것 같아서 영 그렇다. 안 그래도 죄 될 것이 많은 세상 아닌가. 생일의 기쁨도 이와 비슷한데,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든 달까.

   

   생일은 왠지 더 쓸쓸하고 생(生)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마츠코의 그토록 지독한 외로움이, 그녀의 처절한 삶이 그 외현은 아닐지라도 나의 속 깊은 외로움과도 닿아있다.


   근본적으로 외로운 족속인 우리는 스스로가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마츠코는 자신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온 몸으로 내뱉고 철저하게 인정한다. 때문에 그녀는 더 처절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쏟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는 것은 자기를 배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극단에서 궁극의 삶에 도달할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가 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느낀다. 현재의 나의 외로움은 나 자신을 더 이해하고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할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이 착각 역시 또 다른 ‘디즈니 월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꿈을 꾸는 건 자유지만 어디로 가도 앞은 깜깜하기만 하더라고. 하지만 그 깜깜함을 빛낼 단 하나를 마츠코는 찾았다.

   생일, 우리가 태어난 이 토양은 이미 너무 상해버렸지만, 계절도 불분명하여 늘 상 몸을 사리게 만들지만, 우리는 여기서 깜깜함을 빛낼 밝은 빛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극중에서 주인공 마츠코를 연기한 나카타니 미키(中谷美紀)는 “구부리고 펴서(まげてのばして / 마게테 노바시테)”라는 곡을  노래하는데 맘이 오묘하게 슬퍼진다. 가사는 이러하다.


구부리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구부리고 발돋움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구부려서 바람과 이야기하자

활짝 팔을 벌려 해님을 쬐어보자


모두들 안녕

내일 또 만나자


구부리고 펴다 배가 고프면 돌아가자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가자

     

   사랑을 향해 구부리고 펴기를 쉬지 않았던 그녀와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는 별님을 잡을 수도, 하늘에 닿을 수도 없지만 바람과 이야기하고, 해님을 쪼이며, 지치고 힘들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기쁨’ 의 강요, ‘두드러진 외로움’ 을 우리는 잘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_다르덴 자매님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1호 22P ~ 33P

1호 - 생일 2013. 5. 1. 12:40 |














'1호 - 생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생일 선물에 대한 단상.  (0) 2013.05.06
<주제파악>왜 태어 났니?  (0) 2013.05.06
1호 34P ~ 끝  (0) 2013.05.01
1호 12P ~ 21P  (0) 2013.05.01
1호 1P ~ 11P  (0) 2013.05.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