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산초가 살짝 들여다본 방구석은 우리의 소리와 춤이 있는 <도들빛 국악 연구소>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의 육감과 공연이 주는 공감과 감동, 이곳이 주는 이러한 에너지를 글과 사진을 통해 너무도 조금밖에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방(또는 室)이라는 용어는 개인적인 공간만을 표현하는데 쓰일 뿐만이 아니라 종종 보다 포괄적인 공간을 표현하는데 쓰이고 있다. 때로는 닫힌 구조로, 때로는 열린 구조로, 마치 창호지에 투과되어 비치는 빛처럼 은은하게 자신의 존재의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듯 여러 형태의 방들이 많고도 많다. 노래방, 찜질방, 빨래방, 멀티방, 게임방, 키스방 등등 심지어 서로 다른 언어의 단어 ‘방’이 만나서 만들어진 ‘룸쌀롱’도 있다.


   

   소리와 춤을 연습해서 공연하고 함께 즐기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방안 곳곳에 우리의 멋이 어우러져 하나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항상 살아있는 우리의 음악을 고민하는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이곳.



   

   희망가의 한 대목을 저절로 흥얼거리게 하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국악연구소 답게 책과 방대한 양의 음악자료들이 있다. 일반인은 다소 생소할 지도 모르지만 국악을 보존하고 연구하고 살아 숨 쉬게 하는 작업의 한부분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든든해진다.


   

   사물놀이는 사물 즉,쇠,징,장구,북의 네 가지 물체와 놀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각기 다른 물체의 상이한 음을 기본으로 보다 커다란 어울림의 울림으로 만들어내는 우리의 소리, 우리의 신명을 표현한 음악이다. 우리의 음악은 비단 악기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다듬이, 바가지, 목탁 그리고 놋쇠그릇까지도 소리의 한부분이 된다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보여준다.




   우리의 소리와 춤에는 그에 맞는 빼어난 색깔과 디자인이 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의 우리의 오방색을 보면 다른 국가의 색과 구별되는 점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한복의 선은 우리의 자연과 건물을 닮아 있고 편안하면서 우아하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한 부분이었던 이러한 문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음악이 가장 음악다운 순간은 연주되는 바로 ‘지금, 여기’ 일 것이다. 살아있는 음악, 소통하는 음악, 나누는 음악이야말로 우리음악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모인 음악, 조금이라도 소외된 사람, 소수의 사람을 찾아갈 수 있는 음악이야말로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어제도 <도들빛 국악 연구소>가 동네어르신들과 함께 마련한 우리음악공연이 성공리에 끝이 났다. 벌써 한달에 한번씩 16회나 진행되었으니 일년 반이나 계속된 셈이다. 앞으로도 이런 문화공연이 꾸준히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담아서 기원해 본다.

_산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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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수많은 ‘사이’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 만큼 공사다망한 사이가 또 있을까? 그 ‘사이’ 에 관해 생각나는 몇 곡을 골라 봤다. 내 맘대로.


1. oasis - let there be love


밴드 oasis. 담배 땡기시는게 형님, 맨 앞 선그라스가 아우님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참 많이도 들으면서 자랐던 말이다. 어릴 적 나는 한 살 터울의 동생과 정말 많이 싸웠다. 사춘기 즈음 가서는 서로 거의 말을 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때는 솔직히 동생보다 친구들이 더 좋았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부터 급속도로 다시 가까워 졌다. 같이 술 한 잔 하다 보니 그동안 감정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요즘은 싸우지 않는다. 뭐, 싸울 일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동생의 사이가 ‘친하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남자이고 내 동생도 남자이다. 나와 내 동생만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형제끼리 ‘친하다’ 고 말하기엔 좀 그렇다. 서로 살갑게 뭘 챙기는 것도 아니고, 서로 결혼하고 밥벌이 하러 다니니까 얼굴보기도 힘들다. 그저 가끔 전화해서 안부나 묻고 가끔 만나서 별 말 없이 소주나 한 잔 하고 그런 사이다. ‘친하다’ 고 말하기 좀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나쁜 건 또 절대 아니다. 정확하게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친한 관계’ 와 ‘안 좋은 관계’의 사이 어디쯤이 나와 내 동생의 관계다. 이것이 꼭 형제 사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당신은 당당하게 자매, 혹은 남매 관계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모님들과의 관계는? 피를 나눈 가족의 사이는 참 미묘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oasis (오아시스)’ 라는 밴드가 있다. 7,000만 장(95년경 한 언론사는 “영국에서는 3가구 중 한 가구 꼴로 오아시스 앨범을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이 넘는 앨범을 팔아치우고, 8개의 영국 넘버1 싱글을 가진 슈퍼 록 스타다. 워낙 유명한 밴드


이니 따로 소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보다 밴드의 주축이 되는 ‘노엘 갤러거’ 와 ‘리암 갤러거’ 형제는 음악적 성취 외에도 형제간의 잦은 다툼과 ‘불화(不和)’ 로 신문을 장식하는 일이 많았다. 2009년 8월경 형인 ‘노엘 갤러거’ 가 “리엄(동생) 과는 하루라도 더 함께 일할 수 없다” 며 밴드를 탈퇴 해 일단 해체가 되었는데(사실, 다시 합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 일 이란 게 모르는 거니까 나는 ‘일단’ 이라 표현 하겠다.) 그 해체의 이유에도 형제간 불화의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언론에서 호들갑 떨고, 부풀려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들 형제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던 거 같다. 그래도 91년 결성돼  20년이 가까워 오도록 같이 활동 하면서 서로에게 좀 너그러워 질 만도 한데 그게 참 쉽게 안 되나 보다. 서로 안 맞는 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본다. 덕분엔 우리는 커다란 록 밴드 하나를 잃었다.(ㅠㅠ ×100)

   이 밴드의 노래는 메인 보컬인 리엄 갤러거가 대부분 불렀는데(노엘 갤러거가 부른 곡들도 꽤 있다) 그중 <let there be love>란 곡은 매우 드물게 형제가 같이 불렀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는 건 아니고 앞부분 뒷부분 나누어서 따로 불렀다.가사도 말랑말랑하고 곡 자체도 느리고 조용한 곡이니 록음악 싫어하시는 분들도 좋은 팝송 듣는 샘 치고 시도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노엘의 어록 한 줄을 옮긴다. 부디 모두의 부모, 형제, 자매, 남매님들 사이에 사랑이 있으시길.


“어린 시절부터 나와 리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웠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


2. 윤상 - 벽 / 김윤아 - 담 































김윤아의 솔로 1집. 초판에는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 에세이집도 포함 돼 있었다. 이 앨범에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삽입곡 <봄날은 간다>도 수록되어 있다.


   


















윤상의 1996년작 [Renacimiento].이 앨범에서 <벽> 과 <배반>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윤상의 예전 곡들을 외국가수들이 외국어로 리메이크해 실었다. 익숙한 곡들을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게 했던 걸작 앨범이라 생각한다.



“Quelques rimes, pour vous dire  Je vous aime sans dilemne  미안해,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윤상 <벽>-


“우리사이엔 낮은 담이 있어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가닿지 않아요” 

-김윤아 <담>-

   삶을 살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벽(담)’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다. 


   2008년 6월에는 거의 전 국민이 벽을 맞이해야 했었다. 당시 대통령 이었던 이명박씨가 국민들을 상대로 담을 쌓아 올렸다. 이른바 ‘명박 산성’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시위하던 사람들을 막기 위한 물리적인 바리케이트 이상의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광화문에 건테이너 박스는 사라졌지만, 그때 쌓은 벽은 아직 허물어 질 줄 모른다.


   휴전선도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이미 너무 높은 벽이다. 풀기 힘든 숙제이고, 그 숙제는 다음 세대에게 떠 넘겨야 할 것 같다.


   이스라엘엔 분리장벽이 있다. 8m 높이의 견고한 콘크리트 벽은 분리 되어선 안 되는 인간성마저 분리시켜 버렸다.

   

   나는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벽을 느끼곤 한다.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 이 있을 거라는,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 이 있을 거라는 말은 적어도 나에게는 벽이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닥쳐!” 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라는 말은 결국 같은 말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웃는 얼굴로 “닥쳐!” 라고 말하고 싶다면 한 번 써먹어 보시길 추천한다. 참고로 “기도해 줄게” 라는 말도 효과 적일 것이다.


   긍정적인 벽도 있다. 회사의 파티션은 나의 자리, 나의 은밀한 안락을 보호해 주는 아름다운 벽이다. 그런 벽은 높을수록 좋지 않을까? 


3. Belle & Sebastian - Im waking up to us


2001년 <I’m waking up to us> 싱글 표지. 표지 자체는 러블리 하다 

   

   혹시 이 밴드를 아신다면 음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물론, 뭐 우연히 알게 됐을 수도 있지만.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이 밴드는 밴드라기 보단 작은 악단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멤버도 일반적인 밴드(주로 3명~5명)보다 많고(2010년 앨범 기준으로 7명) 악기 구성도 트럼펫이나 바이올린 같은 클래식 악기를 적극 활용하는 면도 독특하다 할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좀 슬픈 말 이기도 한 <Im waking up to us>란 곡은 이들의 2001년도 싱글앨범에 담긴 곡이다. 2005년에 나온 싱글 모음집 [Push Barman To Open Old Wounds] 앨범에서도 만날 수는 있지만 이 앨범은 품절돼 구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CD로 구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 근데, 진짜 좋다!! 이 앨범!!)


   이곡은 사연이 좀 있다. 밴드의 멤버인 스튜어트 머독이 연인 사이 ‘였던’ 같은 밴드의 맴버 이소벨 켐벨에게 주는 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곡의 내용이 러블리 하지 않다는 것이 반전이다. 이곡은 아마도 헤어지고 나서 이것 저것 정리하는 맘으로 쓴 것 같다. 아니면 헤어지기 거의 직전에 쓰였거나. 그러다 보니 곡 내용이 우울하고 삐딱하다. 찌질함마저 느껴지기도 하고. 대놓고 이렇게 만드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그 마음 존중해 주기로 하자. 솔직한 맘을 노래로 담는다는게 쉬운일은 아닐테니까. 재미있는 건 2002년에 팀을 탈퇴한 이소벨 켐벨은 2004년 자신의 솔로 앨범 [Amorino]를 발표 하는데, 그 앨범 안에는 <Im waking up to us>의 답가인 <Monologue For An Old True Love>가 실려 있다. 참으로 창의적인 남녀가 아닐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사후처리와 애도를 이런 식으로 하다니!!! 


   <Im waking up to us>는 가사가 긴 곡이므로(할 말이 많았나 보다) 곡 중에서 가장 찌질 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좀 옮기며 이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찌질 하긴 한데, 좀 슬프기도 하다.


i need someone to take some joy in something i do

you need a man who’s either rich or losing a screw


you know i love you here’s the irony

you’re going to walk away intact

i think you never liked me anyway

you like yourself and you like

men to kiss your arse

expensive clothes

please stop me there

i think i’m waking up to us  (하략)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나만큼 즐거워 해줄 사람을 원하는데 

너한텐 부자이거나 어딘가 망가지고 있는 남자가 필요하지

그리고 넌 내가 그런 널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지

그게 아이러니야

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떠나가겠지

어쨌거나 넌 애초부터 날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

네가 좋아하는 건 네 자신 그리고 너한테 아첨 떠는 남자들 

그리고 비싼 옷들

부탁인데 거기까지만!

나 이제 우리 관계가 어떤 거였는지 서서히 깨닫는 거 같아.

(하략)  번역 : 성문영

  _거의 편집장_




사진출처 :  http://www.oasisinet.com/  

                http://www.belleandsebastian.com/

참고한 자료 : oasis, belle and sebastian 앨범들 속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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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의 공간은 치명적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의 공간. 때로 ‘사이’는 친구이거나 혹은 친구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를 일컫기도 하고, 댄스라고 하기엔 뭔가 덜 신나고 발라드라고 하기엔 그래도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애매한 노래를 이를 때에 쓰이곤 한다. ‘결국 그 사람과 무슨 사이냐고’ 우리는 깔끔하게 정의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모든 것이 명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피할 수도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그 ‘사이’의 공간을 받아들일 수 밖에. 게다가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기에, 사실 이 ‘사이’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도리어 치명적인 공간. 때문에 끼인 모양새로 간주되기 십상인 ‘사이’를 대변하고자, 오늘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머무는 시선들을 소개한다. 백남준의 <촛불 하나>와 수-메 체의 <메아리>가 바로 그 것이다.


백남준, <촛불 하나 One Candle>, 1989, MMK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촛불 하나>, 가상과 실제 사이에서


   백남준1932-2006의 <촛불 하나 One Candle>는 제목 그대로 하나의 촛불로부터 시작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삼각대 위에 설치한,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작은 양초의 이미지는 초를 촬영한 카메라와 그 이미지를 다시 삼원색으로 투광시키는 삼광식 프로젝트를 거쳐 결국은 하얀 벽 위에 다양한 빛깔로 촛불의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혹은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촛불을 향해서 입김을 불어볼 때면 실제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미술관 공간을 메운 거대한 촛불들도 제각기 흔들리게 된다. 화이트 큐브 미술관 안에서 벽을 흔드는 바람이 조용히 스쳐간다..


   백남준은 흔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바, 사람들은 그의 예술에 대해 차가운 고철 기계와 텔레비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은 한국의 현대예술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나, 그만큼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제외하고선 제대로 이해되어지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음악에서 시작하여 영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그가 집중했던 주제 중 하나는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의 어우러짐이었다. 단순히 기계문명의 발달과 확산에 따라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를 통해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빅브라더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과 인간 정신, 문명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촛불 하나>는 그런 사유의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작품은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촛불에서 시작하지만,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가상의 이미지로의 촛불 이미지를 창조하여 이윽고 공간을 뒤덮어버리는 것이다. 실제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작품이 위치한 공간은 프로젝터를 통과한 가상의 이미지로 채워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촛불이 흔들릴 때에 가상의 촛불 이미지들 역시 그 바람에 함께 흔들리게 된다. 때문에 단순히 기계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지만 하나의 촛불로 시작하였지만 순수한 자연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촛불 하나>의 풍경은 실제와 가상,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앞에 서면 구형 삼광식 프로젝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물감을 한껏 푼 것처럼 형형색색을 이루는 촛불의 풍경 앞에서 바람의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가을의 갈대밭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가상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 그 사이에서 <촛불 하나>는 어느 한쪽에 머무는 것보다 더욱 더 증폭된 풍경으로 펼쳐진다. 심해를 헤엄치듯 너울거린다. 작은 양초에서 시작한 것이 이윽고 화이트 큐브 미술관의 환경을, 보는 이의 경험을 빚어낸다. 그 사이를 마구 유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메 체의 <메아리>,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는데


메 체, <메아리 L’echo>, 2003, 비디오, 사운드, 5분 30초, 무담 룩셈부르크 소장


   두 번째 시선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작가 수-메 체(Su-Mei Tse 1973~)의 <메아리 L’echo>라는 비디오 작품이다. 이 작품은 6월 말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전에서 현재 전시 중인데, (자세한 전시 정보는 마지막에 있다.) 작품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보아도 선뜻 이것이 비디오 작품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거대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하여 전면에는 푸른 풀밭, 그리고 풀밭과 강한 색채 대조를 이루는 붉은 드레스의 첼리스트(작가 본인), 이것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전부이다. 


   작가는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알프스 산은 곧 첼로 소리의 메아리를 낸다. 처음에는 외따로 존재하는 소리이지만, 이윽고 첼로 소리와 메아리는 일종의 합주를 이루게 된다. 돌림노래처럼, 질문과 대답처럼, 오순도순 나누는 대화처럼. 풍경에서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거대한 산 아래에 미약하게만 보이는 작가의 첼로 연주가 있을 뿐이다. 소리가 외따로 존재하던 작품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여도 작품의 이미지에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알프스와 작가 사이 공간의 밀도가 바뀐 것이다. 첼로 소리와 메아리 소리의 간격에서처럼 처음에는 텅 빈 정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을 지나 이윽고 조금씩 조응하기 시작한다. 첼로 연주, 메아리의 화답, 또 그에 대한 첼로의 다른 소리, 그리고 메아리의 또 다른 화답. 알프스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 뿐이고, 작가는 여전히 여기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첼로 연주와 메아리는 결국 대화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 사이 공간에 머무르는 일


   너무나 단정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이쪽 혹은 저쪽 이기를 강요하는 가름 사이에서 ‘사이’의 공간은 무력하게만 보인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 묻는다면 무어라 답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검정색과 흰색 사이의 회색 지대는 도무지 좋게 해석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이’의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 산과 첼리스트 사이의 대화, 실제와 가상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풍경……


   최근 발간된 <시간의 향기>에서 저자인 한병철 교수 역시 기존의 시간 개념이 파괴된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하며,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모든 것은 없거나 지금 여기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존재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생은 모든 사이가 제거되고 나면 그만큼 더 빈곤해진다.” 


   삶의 풍성함이란, 관계의 놀라움이란 단순하게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도리어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하려 들었을 때에, 혹은 쉬이 얻으려 들 때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모호하고 안개 같은 시간이 주는 번민의 때가 있으나, 또한 그러하기에 허락되는 경탄과 희열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사이’는 도무지 애매해서 싫다는 당신, 오늘은 이 치명적인 공간에 조용히- 머물러 보시기를 권한다. 

_꽤 애호가_





기타 참고 자료

_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njpartcenter.kr

_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www.artsonje.org

_한병철, <시간의 향기>, 문학과 지성사, 2013











수-메 체의 <메아리> 관련 전시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


전시일시: 2013년 4월 13일(토) 

              ~ 6월 23일(일)

전시장소: 아트선재센터

관람요금: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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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라니 이렇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말이 있을까. 게다가 한국어 발음은 듣기에도 사랑스럽다. 


  ‘사이’라는 단어의 온도는 어떤가. ‘사이’는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말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온도를 가늠할 수 없듯,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온도’ 차이를 감당할 수 없듯, 우리는 늘 ‘사이’에서 번민하고 만족한다. ‘사이’ 라는 단어에서 오는 친밀감은 때론 더 이상은 좁힐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 시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가 되기도 하니 ‘사이’ 라는 의미만 잘 감당하며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은 관계와 시간 ‘사이’를 가장 잘 녹여낸 영화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제시 役), 줄리 델피(셀린 役)가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에 이어 18년의 시간을 녹여낸 작품이니까. 지난 금요일 미드나잇, 밤을 지새우며 이 영화를 보았다. 


   제시와 셀린은 이제 늙고 배나온 중년의 여느 부부와 같다. 빛나던 순간과 서로를 그리워하던 시간은 이미 우주 저편에 가있는 듯 현실을 살고 있는 입담 좋은 부부.  


   “Happinese is in the doing..Not in the getting what you want.” 라고 고백하던 그들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그 시간을 잡아채었다. 비행기는 떠나고 그들은 남았다.(비포 선셋) 이제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해가 아직 머물러 있음을, 그렇게 머물러 있다 저물어 갈 것임을 해질녁 그리스 카르다밀리의 해변에 앉아 이야기 한다. 


“still there, still there, ... gone.”

   지는 석양빛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며 던진 대사가 그들의 삶의 모습 같고 꼭 우리의 모습 같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빼앗긴 듯 서로를 갈망하던 그들도 삶이 라는 시간을 감당하니 ‘사이’를 실감하게 된 듯 보인다. 서로의 ‘사이’에 존재하던 간절함과 그리움은 이제 서로에 대한 익숙함과 견딜 수 없음으로 변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시간 ‘사이’를 정말이지 엄청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멋진 아침을 맞이하기 전 셀린은 말한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아. 그러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너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존재 할 것 같아.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은 너와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中에서)


   나 역시 우리가 믿는 신이 나와 당신의 사이에 존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서로를 통해 자신의 신을 보지 못한다면 신을 믿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너무 위선적인 셈이지 않은가. 그 ‘사이’를 존중할 수 있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믿는 신을 함께 읽는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 푸른 향기로 터질 것 같은 시절 만나 그들의 불안과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해 쏟아내며 아침이 밝아오기 전 따분하던 삶에 생기를 되찾고 서투른 삶을 서투른 채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침이 오기 전까지 깊은 밤(미드나잇)을 함께 한다. 


   함께 밤을 지새우다 아침을 맞이하고 정오의 햇살을 즐기다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게 되는 동안, 그 ‘사이’에 우리는 어떤 ‘사이’ 로 익게 될까. 그렇게 다시 밤의 한가운데로, 어두움의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 제시와 셀린은 그 기억을 자양분 삼아 삶을 이어간다.


‘사이’의 다른 말은 추억일 것 같다.  

   “Memory is a wonderful thing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비포 선셋 Before Sunset>中에서)

   우리가 그 기억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으면 현재와 잘 조율해 낼 수 있다면 , 우리도 아마 그 ‘사이’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시와 셀린 그들의 ‘사이’ 도 그렇게 존재한다. 설레임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 이제 함께 하며 그 추억과 현재를 영민하게 묶어가며 그들 ‘사이’를 지탱한다. 무너졌다 일어나고 추억과 현재를 비벼내며 다시 웃고 한 방향을 향해 나란히 앉는다.


   다만 삶의 ‘사이’들이 지나가도록. 그 모든 것이 석양 너머로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긋이 바라본다.


just passing through...

태양과 함께 우리의 삶이 저물도록.

_다르덴 자매님_



   

   덧,  글을 쓰면서 느는 건 변명뿐 인 것 같다. 숙고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지 못함에 대한 변명, 사색의 시간보다는 연애에 힘써야 한다는 변명까지. ㅋ

변명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읽을거리를 내놓는 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부담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숙고의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글이라 부끄러움에 몇 줄 더 첨언해본다. 다음 달엔 보다 재밌고 깊이? 있는 읽을거리를 내놓도록 숙고하리라 스스로 다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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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여름 사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또 여름이 왔다. 지난여름과 올여름 사이. 찬바람 쌩쌩 불었던 겨울의 기억들은 신기루 같다. 지나간 시간은 늘 모호하고, 안개처럼 뿌옇다. 사소한 것들이 계절을 알린다. 이를테면, 어느 순간 코끝을 찌르는 싸한 풀 냄새, 한낮의 태양에 달궈진 목덜미의 후덥지근한 느낌 같은 것들. 이런 기억들은 너무나 사소해서, 평소에는 떠오르지도 떠올릴 수도 없지만,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감각되는 기억이다. 

   ‘아! 올해도 벌써 여름이구나.’하는 찌르르한 감각. 우리들의 삶 속에는 의외로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 많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수많은 모호한 지점들, 사실 시간이야말로 모호한 것이다. 세계는 초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초 단위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 모호함의 사이를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영역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의지하여 계절과 계절 사이를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한다. 때문에 우리의 이해 방식은 결코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지혜일 수도 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해답을 갈구한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질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답은 늘 충족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갈망하게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답은 언제나 단답형의 간결하고 짧은 대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히 이해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 아마도 해답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도.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위의 질문을 구글에 물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우리는 본 적도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 능력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상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장난 이지만, 우리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물론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 있다는걸 반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상력이란 것은 신비하다. 우리는 어째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인류가 상상해왔던 많은 일이 상상에 머무르지 않았던 무수한 사례가 존재한다. 물론 추상성과 구체성의 차이는 있겠으나,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온 역사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 아니겠는가.


   문학작품이나 미술 작품, 다양한 예술의 분야에서 우리는 상상력의 발현을 경험한다. 본 적도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 한다. 영화나 소설의 분야에서 나는 특히 SF라는 장르를 좋아하는데, 과학적 상상력의 요소보다는 어떤 가상의 상황을(사고 실험과 같은) 현실감 있게 묘사해내는 시도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사회의 어떤 요소들을 결핍시키거나 과장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회나 인간을 설계해보는 재미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현재 나와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사이’라는 모호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 ‘42’라는 숫자가 떠오른 것은 한 권의 책, 혹은 영화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은 글의 흐름은 사실상 여기까지 오기 위한 복선이었다고 말해두겠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과학소설 시리즈이다. 1978년 BBC의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한 이후 여러 다른 형태로 변형되면서, 몇 년이 지난 후 점차적으로 국제적인 멀티미디어 현상이 되어갔다.   

   이 시리즈는 많은 개작물을 남겼는데, 1979년과 1992년 사이의 소설(맨 첫권의 제목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1981년의 TV시리즈, DC코믹스에서 93년과 96년에 출판된 만화책, 팬들이 만든 타월, 2005년에 개봉된 동명의 영화<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등이 나오기도 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다른 버전들(소설, TV시리즈, 컴퓨터게임, 초기의 영화대본)등을 모두 애덤스 본인이 적었으며, 몇몇 연극은 더글러스 애덤스가 새로운 요소/제제를 갖고 썼다고 소개 되었다.


1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권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5권 <대체로 무해함>(Mostly Harmless)

6권 <그런데 한가지 더> (And Another Thing...)   

http://ko.wikipedia.org/wiki/<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인용_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물 중에서 6번째 작품은 예외적으로 더글러스 애덤스의 작품이 아니라 이오인 콜퍼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애덤스 사후에 그 부인에게 허락을 얻어 동일한 시리즈물로 출판된 책이다. 어쨌든 이상의 총 6권의 작품을 모두 합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라고 부르고 있고, 처음 시작이 라디오 드라마였던 만큼,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파생되어 영국에서는 사회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기도 했었다. 

   국내에는 2005년 애덤스의 작품인 5권까지의 시리즈만이 합본으로 된 거대한 양장본이 출판되었고, 현재는 시리즈 6권까지 각각 분리되어 있는 세트가 출간되어있다. 장담하건대 그 거대한 합본 양장본은 아마 누구라도 보면 갖고 싶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2005년에 제작된 영화가 상당히 히트한 덕분에 국내에 출판되지 못했던 4권 이후의 내용이 포함된 합본이 출판될 수 있었고, 책도 국내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이 다분히 영국식 말장난의 블랙 코미디와 꽤 난해한 철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인용하고 있어서, 영화만큼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 책은 재밌다. 2004년 이전에 이 책을 국내에 수입하던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5권이 국내에 출시되지 않자, 국내의 SF 마니아들은 외국의 책을 직접 번역하여 그 내용을 교류하는 커뮤니티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1980년대에 지어진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진보된 SF인 동시에 당시 세계와 사회를 통렬히 비꼬는 블랙코미디 요소에 연신 감탄이 나온다. 


   “사물들이 겉보기와 항상 같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구 행성에서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돌고래보다 지능이 높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바퀴, 뉴욕, 전쟁 등 엄청난 일들을 성취해내는 동안 돌고래들이 한 일이라곤 물속에서 빈둥거리며 재미나 보는 것밖에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돌고래들은 자신들이 인간들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다고 항상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정확히 똑같았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돌고래들은 지구 행성이 곧 파괴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인간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사소통 노력은 대부분 재미있게 축구공을 차올리려고 한다거나 물고기 한 토막을 얻어먹어 보겠다고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경고하기를 포기하고, 보고인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자신들만의 수단을 통해 지구를 빠져나왔다. 돌고래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뒤로 두 번 공중제비를 돌아 고리를 통과하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휘파람으로 부는, 놀라울 만큼 정교한 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인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_<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발췌_


42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궁금해할 것이 있다. 대체 ‘42’가 무엇인가? 그럼 아마 영화나 책을 본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지”      

   이 재미있는 기호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과거 고도로 발달한 존재들이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심오한 생각’이라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게 된다. 이 슈퍼컴퓨터는 너무나 뛰어나서 그 해답을 계산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750만 년이나 걸리게 된다. 이윽고 ‘심오한 생각’은 그들에게 자신이 계산한 답을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42라는 숫자였다. 여기에 대한 수많은 농담과 다채로운 해석들이 있지만, 작가 스스로 결국 ‘별 뜻 없는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42. 한국말로는 ‘사십이’ 혹은 ‘사이’가 되기도 하는 저 숫자가, 왠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한 걸음 더 성장한다. 우리네 인생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고, 거기엔 어떤 해답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당신이 찾으려는 해답은 대체 무엇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그거다. 우리는 삶의 어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존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대답이 42라고 해보자. 무엇이라 한들 납득할 수 있을까? 좀체 단순할 수 없는 인생이란 것에서 유일무이한 해답이란 결국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낳게 한다. 그 답이 대체 무슨 뜻인가? 바로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책 속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인(42라는 답을 계산했던) ‘심오한 생각’은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질문을 알아야만 내가 말한 해답의 의미를 알 수 있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한 질문을 하고, 적절한 대답들을 찾는다. 우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그 자체로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창밖은 밝아오고, ‘책 소개’와 ‘오늘의 일기’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긴 글을 마치는데, 어떤 마무리가 적절한지 도무지 적당한 문구가 떠오르질 않는다. ...sigh.

_대충 소설가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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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바늘두더지 딜레마’ 란 얘기 아니?  

바늘두더지의 경우, 상대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하려 해도 

몸을 대면 댈 수록 온몸의 바늘로 서로를 상처입혀 버리지

인간에게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어. 


지금의 신지군은 마음의 어딘가에서 아픔을 두려워 해서 겁이 많아진 거겠지. 


그러다 알게 되겠지.

어른이 된다는 건


다가가든가, 멀어지든가 하는걸 반복해서,

서로가 그다지 상처입지 않고 사는 거리를 

찾아내는 것 이란걸...


                                                                                                 _신세기 에반게리온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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