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의 마지막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장장 40일간을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사순절로 지키고 있다. 성탄과 함께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사순절과 수난, 부활에 관해 어떤 그림, 더 넓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 하고 묻는다면 십자가라는 세 글자 대답 외에는 듣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절기의 예식에 대하여서는 특별새벽기도회나 고난주간의 금식, 미디어 금식, 성 금요일 예배와 부활절 예배, 달걀 나누기 등 사순절을 보내는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성경을 통해 가지고 있는 사순절의 이미지는 터무니 없이 제한적이다. 그뿐 아니라 획일적이기까지 하다. 올곧은 십자가의 형상, 부활절의 달걀 정도, 주일학교에서 보던 그림책자 정도의 수준에 굳이 하나를 더 한다면 몇 년 전부터 이 시즌만 되면 틀어주는 (게다가 특정부분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게 왜 문제인가? 물론 풍성한 저만의 상상이 없다고 해서,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는 사순절에 대해 이렇게 제한적이고 획일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풍성한 복음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상하고 제한적인 생각은 결국 예수님의 세상에 내려오심과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과 죽음, 그 계획의 풍성함과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쉬운 수난, 쉬운 부활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개신교 전통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우상숭배를 경계하기 위해 성상이나 성화를 신앙생활에 잘 활용하지 않고, 성경말씀 자체에 뿌리를 두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자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 중의 하나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 하여도, 한 사람을 보고서도 각자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이 사건에 대해 공장에서 찍은 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한적으로 묵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쉬운 수난과 쉬운 부활로 이어져 도리어 우리가 받을 은혜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성상과 성화에 대한 우려는 우상숭배를 막고 성경과 믿음의 본질에 천착할 것을 강조한 것이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과 감동의 표현이자 감상을 통해 오히려 묵상의 장을 넓히는 예술에 대한 제한은 아닐 것이므로.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상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서양미술사에서 이는 너무나 널리 쓰여온 주제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폭넓은 역사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기에, 20세기에 그려진 두 점의 작품을 골라보았다. 바로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와 아르툴프 라이너 Arnulf Rainer의 작품이 그것이다.

 

조르주 루오의 <Miserere>,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르주 루오 Georges Rouault(1871~1958)는 프랑스 태생의 화가로, 지난 2009년에 한국에서도 루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 바 있어 그 계기로 많이 알려지게 된 화가이다.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당대의 여러 화풍, 인상파나 야수파와 다양한 교류를 해왔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했던 화가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화풍에 옮겨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생소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전 국가적인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1945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그리고 48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흔히 루오를 종교 화가라고 분류하는 것과 다르게, 그가 종교적인 소재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광대나 창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주로 화풍에 담았던 그의 작품을 통해, 고상한 소재와 율법적 엄숙함에 집중하는 종교화가보다는 약자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그리스도인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세상이 끝날 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 Plate 35 from Miserere, Georges Rouault, Etching on paper, 1945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Plate 37 from Miserere, Georges Rouault, Etching on paper, 1945 

   

   

   <미제레레 Miserere> 판화 연작은 루오의 가장 위대한 시도로써 꼽히는 작품이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에 등장하는 구절인 불쌍히 여기소서의 라틴어 표현으로, 이 연작 작품은 58점의 판화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죄와 고통에 묶인 세상을 번갈아 보여준다. 1927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있었던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바로 전쟁에 대한 루오의 대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전쟁과 고통, 슬픔과 비관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해, 이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전후 유럽사회를 반영한 작품이었지만, 고통과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루오의 깊은 통찰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루오의 판화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찬란하게 빛나지도, 영웅적인 성스러움을 뽐내지도 않는다. 한없이 슬플 뿐 아니라 버림받아 고통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루오는 특유의 거칠고 어두운 터치로 표현해낸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괴로움은 사순절 시즌에 우리가 많이 보곤 하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많이 다르다. 단순히 살갗의 찢겨짐, 흐르는 피와 같은 육체적 고통도 그리스도의 고통이었으나 그가 두려움과 고독의 한 가운데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았었다는 사실을 루오는 표현한다. <십자가에 달린 채 잊혀진 그리스도 아래에서 sous un Jésus en croix oublié là>, 그리고 <예수는 세상이 끝날 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Jésus sera en agonie jusqu'a la fin du monde...>와 같은 작품에서 거칠게 표현된 외로움과 고통에는 이미지의 홍수라고 부르는 요즘에도 그저 넘길 수 없는 비통함이 있다.

 

   하지만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판화는 단지 고통 속의 그리스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전쟁과 탐욕에 매달리는 인류를 예수님과 교차하여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일회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행해졌던 오래된 퍼포먼스가 아니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극적인 역사적 개입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은 당시의 전후 사회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사회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천국에 자신을 위한 특석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왕처럼 여기지만 결국은 가면을 썼을 뿐이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변호인은 텅 빈 언어만을 내뱉는다. 어떤 의미에서 고통은 단순히 특정 시대와 상황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Homo Homini Lupus>라는 문장은 이 세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루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세상의 어둠, 이 양극단을 함께 표현한다. 높은 곳과 낮은 곳, 거룩함과 비천함,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기. 관념적이고 몽상적인 세계로 도피하지 않고, 이 극단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맨 얼굴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수난을 통해 그가 겪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너무 관념화하거나, 혹은 그가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악이 성행하는 이 세상에 오셨었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오늘날의 세상과 구원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에 그 문제가 있다. 하지만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대도시의 흉흉한 할렘가를 돌아다니시며 너무나 실제적인 고통을 겪으시나, 그 속에 빛나는 구원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여전한 전쟁의 위협과 탐욕의 유혹에서 살고 있으나, 연작의 마지막 작품의 문장처럼 <그의 고통으로 우리는 치유 받았다. C'est par ses meurtrissures que nous sommes guéris.> 임을 깊은 아픔과 슬픔 속에 발견하는 것이다. 루오 최후의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세계에 대한 그의 이해를 표현한 이 연작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고백을 다시 돌아볼 일이다(58 점의 판화를 모두 이곳에서 소개드릴 수 없으나, 참고자료 목록에 있는 사이트를 통해서 전체 연작을 모두 감상해보시기를 적극 권합니다J)

 

아르눌프 라이너의 뒤틀린 포도주 십자가

 

   두 번째로 살펴볼 작품은 아르눌프 라이너의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이다.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1929~)는 오스트리아 작가로, 현존하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틀과 기존의 인식을 파괴하는 추상작품을 주로 해왔으며, 이미 색칠을 된 페인팅이나 인화를 한 사진 위에 다시 덧칠을 하여 미완-완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직관과 무의식과 같은 주제에 집중하였으나, 이후에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하는 비엔나 행동주의 그룹(Wiener Aktionismus)과 함께 감정의 극단적인 상태를 표현하고 관객에게 그 경험을 전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오스트리아 바덴에는 그의 작업세계를 기념하고 연구하기 위해 아르눌프 라이너 미술관 Arnulf Rainer Museum’이 있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본 조르주 루오와 달리, 아르눌프 라이너는 기독교인도, 종교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십자가라는 소재에 집중하여 삶과 죽음, 육과 영, 그리고 구원과 희생과 같은 주제들을 연구해왔으며, 오늘 살펴볼 작품도 그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Wine Crucifix, Arnulf Rainer, Oil paint on Canvas, 1957/78, Courtesy of Tate Collection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는 워낙 강렬한 색감과 형상을 가진 탓에 언뜻 보아도 십자가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존에 우리가 표현하거나 보게 되는 형상, 네모 반듯한 나무 빛깔의 그것과는 너무 달라, 알아차리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십자가가 맞나 하고 다시 살펴보게 된다. 멀리서 보면 십자가이겠구나 생각하겠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게다가 검은 십자가의 형상 아래로 흐르는 듯한 붉은 물감은 피처럼 보여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기괴하고 뒤틀린 십자가는 아무래도 익숙치가 않은 것이다. 두터운 검정 수직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의 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카톨릭대학의 학생채플에 걸기 위해 주문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액자 틀도 없이 느슨하게 걸어, 맞은편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십자가의 형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제목인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포도주와 관련한 일화들이 몇 살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행하셨던 기적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일이었고,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권하며 말씀하신다.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 26:28, 새번역성경) 오늘날 성찬식을 통해 다시 기억하는 것은 바로 이 포도주에 빗대어 곧 당신의 피를 인간을 위해 흘리실 것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계획인 것이다. 하여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흘렀을 예수님의 피는 그때 말씀하시고 권하신 포도주로 비유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살펴본다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포도주의 빛깔과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와 그의 죽으심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을 보았을 때에 껄끄러웠다거나 혹은 너무 자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오히려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봐왔던, 때문에 머리 속으로 생각해왔던 십자가는 너무 네모 반듯하고 말끔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자연 어디에서도 기계적이고 엄밀한 의미의 직선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십자가 역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며, 더더욱이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대표되는 복음이 우리에게 감격적인 이유는 그가 초월적인 자세로 고상하게 우리와 거리를 두고 앉아 구원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철저히 우리가 사는 사회로, 그곳의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뒤틀리고 으스러지는 고통과 고독의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비유가 아니라 십자가 아래로 피를 흘리며, 군중의 야유와 멸시 속에서 오로지 그를 믿는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죽기까지 외치셨던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때문에 고통과 어둠이 제거된 십자가의 이미지는 그 구원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 그림으로 느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함보다 훨씬 더한 공포의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에 이 뒤틀리고 어두운 십자가의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포도주를 그의 피라 말씀하신 예수의 모든 기적과 모든 언어가 달렸던 십자가, 결코 반듯하고 말끔하지 않았던, 오히려 으스러지고 뒤틀린 형상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사순절 기간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래간만에 하는 금식, 특별새벽기도회, 부활절 달걀? 여러 예식과 결심들이 성행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때에 맞추어 하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잘 알아가는 것이며, 또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똑같은 이미지를 갖고 판에 박힌 예식적인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그 뜻을 이해하며 상상하고,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때문에, 그 걸어가는 길에 오늘 소개한 두 작가의 그림이 잠깐 멈추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의미 있는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


_꽤 애호가_

 

 

 


_참고서적 및 자료:

『조르주 루오』,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12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테오 순더마이어, 기독교사상 2004 10월호, 2004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판화를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

old.thirdmill.org/worship/rouault-l/default.asp/category/worshipsub1

 

아르눌프 라이너 뮤지엄 www.arnulf-rainer-museum.at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 www.tate.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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