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톨의 무게

0.5호 2013. 4. 5. 11:36 |



0.

이 글에서는 흔히 말하는 ‘찬양’ 이라는 단어들은 ‘노래’로 바꾸어 썼다. 이유는 ‘노래’는 ‘노래’ 이지만 ‘찬양’이 꼭 노래만은 아니니까.


1.

사실, 이글은 ‘부활절에 더 이상 듣지(혹은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노래들’ 이라는 주제로 쓰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교회를 20년 넘게 다닌 나에게, 교회 사역도 남부럽지 않게 해본 나에게도 부활절에 더 이상 듣고 싶지 혹은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는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다고 부활절 즈음에 들려지고 부르는 노래가 흠 잡을 데 없이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활절 노래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당신도 이 시점에서 잠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부활절’ 하면 딱 하고 떠오르는 노래가 몇 곡이나 되는지. 많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혹시 고난주간 노래를 부활절 노래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가 부활절 하면 쉽게 떠오르는 노래들은 대부분 고난주간의 노래들일 경우가 많다. 부활절 당일 날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몇 곡이나 되는가. 내 추억을 좀 더듬어 봐도 부활절 당일에 부를 수 있는 노래, 별로 없었다.


2.

생각해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우리는 부활을 별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교회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있다. 우리는 다이어트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가씨처럼 부활절 당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대 날을 기다리는 말년병장처럼 부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하긴..... 이렇게 간절하지도 않지....) 일단 부활절에 도달하면 결승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부활절이 되기 40일 전부터 우리에겐 고난의 옷이 씌워진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금식, 금주, 금연에 쇼핑과 TV, 인터넷 등등 소위 말하는 세상의 쾌락을 멀리 하기를 권유받는다. 우리는 40일 동안은 안했으면 하는 것들을 정확히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맘에 뭔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날들보다 ‘죄’ 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야 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부활절 당일은 그 모든 짐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짐이 한순간에 확 벗어지는 날이다. 무언가 끝이 나는 날이다. 부활이 새로운 시작이 아닌 무겁고 어두운 무언가에서 해방되는 날, 그동안의 쓴 고난을 끝내는 날이기에, 그날이 도달하면 그걸로 끝난다. 방학이 시작되면 더 이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3.

부활 전에 우리는 고난에 관해 쓰디쓰게 묵상하고 못이 박히게 이야기 듣지만 부활 후 에는 믿어야 하는 믿기 힘든 생물학적 부활만이 강조된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하고 끝인 거다. 마치 빚을 다 갚은 채무자처럼. 아무것도 없다. 삶은 계란이나 먹으며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나 듣는 것이다. 부활이 영광이고 기쁨이라면서 왜 부활이 영광이고 기쁨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수식어로 끝인 거다. 고난주간처럼 부활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권유 받는 행동이나 규약도 없다. 전도사님들과 교회 청년부 임원들은 부활절 행사를 끝내니 얼마나 좋을까. 그뿐이다.


4.

그러고 보면 교회는 해 보라는 건 없고 하지 말라는 것만 많다.


5.

그래서! 뭔가 해보라 말하고 싶다. 한 가지 제안하고 한다. 교회 높으신 분이 아니 하시니 낮고 비천한 내가 제안해본다. 이제는 고난의 길이와 부활의 길이가 같았으면 좋겠다. 부활절 전에 40일을 챙겼으면 부활절 후도 40일 챙기자. 너무 길면, 사순절의 기간을 단 한 주로 대폭 줄이고 부활절 후도 똑같이 한주를 챙기던지.

자, 그럼, 부활절엔 뭘 묵상할까? 나는 ‘생명’부터 묵상해 봤으면 좋겠다.(도대체 ‘생명’을 부활절에 묵상하지 않으면 언제 묵상하나?) 그저 무덤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도식화된 생명 말고, 우리 세상을 당신 주위를 흐르고 있는 수많은 죽음과 부활들을 묵상해 보자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삶들이 태어나고 죽어 간다. 인간은 물론이고, 식물, 동물, 자연 하늘의 별들 까지도 제각기 각자에 자리에서에서 살다가 죽어 간다. 심지어 당신 몸 안에 세포들도 당신의 생명을 위해 죽는다. 이런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고난-죽음-부활-승천-영생 같은 도식으로만 낭비하지 말자는 말이다.

한 가지 덧 붙여, 죽음이나 생명이 꼭 생물학적으로만 발생하는가? 우리시대에 편만한 돈 만능주의는(돈 파시즘?)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 혹은 ‘12년 동안 혈루 병 않은 여인’ 을 아주 손쉽게 ‘나면서부터 돈 없는 자’ 와 ‘12년 동안 빚더미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사람은 넘쳐 나는데 교회는 그 문제에 대해 무감각 하다. 마치 좀비처럼. 그리고 기도만 한다. 뭘? 어떻게 기도 하라고? ‘원컨대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6.

부활절에 묵상할만한 노래를 한 곡 추천한다. 홍순관의 [춤추는 평화]앨범의 수록곡 <쌀 한톨 의 무게> 라는 곡이다. 이 앨범은 현재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에서 [노래와 이야기 Live - 춤추는 평화 (엄마나라 이야기)]라는 앨범으로 음원을 다운 받을 수 있으며 그 음반 안에 이곡이 수록 돼 있다. 가사를 살펴보자. 최대한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쌀 한 톨의 무게 (홍순관 글/신현정 곡,편곡)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최대한 천천히 읽었기를 바라면서, 요즘 우리 가요는 물론 교회노래도 ‘시’를 잃어 버렸다. 요즘 노래들에서는 정말 시적을 가사를 찾기가 너무 드물다. 아니, 거의 불가능 하다. 그렇기에 이곡은 정말 보물이 아닐까 싶다.

이 아름다운 가사에 더 무언가를 보태고 싶지는 않다. 쌀 한 톨에서 시작해 생명, 평화, 농부를 거쳐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홍순관님의 묵상은 정말이지 깊다. 지금껏 살면서 쌀 한 톨의 무게를, 아니 쌀 한 톨을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 볼 생각조차 못해봤던 나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묵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가사처럼 우리는 우주를 매일 밥 먹듯이 먹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쌀 한 톨,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놔도 무게를 느낄 수도 없는 그 가볍고 조그만 쌀 한 톨이 지금 당신과 나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는 쌀 한 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 노래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니, 부활절이 되기 하루 전날 밤도 좋겠다. 3분 29초 동안의 무게는 또 얼마나 될까.


0′

그러니까, 밥 남기지 말자. 남길 것 같으면 애초에 덜고 먹던지!

_거의 편집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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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다르덴 자매, 그러니까 내가 어릴(?)적에는 어쨌든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고로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보기 보다는 닥치는 대로 무슨 영화든지 보았다. 어떻게든 더 많은 영화를 보려고 어디든 쫓아다녔더랬다. 취향이라는 것이 쌓이기 이전에 꾸역꾸역 그 기반을 쌓았달까. 그렇게 대학에 간 후로는 어려운 영화들이 좋았다. 뭔가 있어보였고 생각할 줄 아는 것 같았고 ‘나 영화 좀 봐’라고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현재, 일개 직장인이 된 후로는 쉽고 편한 영화, 보고 나서 기분전환이 되는 가벼운 영화가 한동안 좋더니, 이제는 “불편한 영화”에 마음이 기운다.


   '불편함' 이라니 이렇게 주관적인 표현을 영화에 끌어와도 될까 싶지만 그런 개인의 불편함을 끌어내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각자의 불편함을 끌어내어 불편해하고 그 불편함을 끝까지 지켜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가능하면 그 불편함 이 어찌되면 해소될지를 고민해 보는 것, 해소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의 부채를 같이 짊어지는 것.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조금 무겁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나 싶지만 앞으로 우리 꼭지가 하려는 이야기들이 그러하므로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불편한 것에도 종류가 있을까?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편한 것도 다 각각이라 각자의 불편함이 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지점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또 사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해도 인간이라서 상할 수밖에 없는 감정들이 있다.

모두의 불편함을 담아낼 수는 없으니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들을 풀어봐야겠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쓰고 보니 꽤 추상적이지만 나에게는 꽤 확실하게 와 닿는 실체가 있는 것들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를테면,

단순하지 않은 것, 명쾌하게 딱 떨어지지 않는 것들.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 선악이 불분명해서 구별이 힘든 것.

어떤 측면에서든 결핍의 상태에 놓이는 것.

영원하다고 믿는 것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숨기려던 비밀이 드러나는 것.

세상과 기준이 달라서 이해받지 못하는 것, 그래서 외로운 것.

선함이 오만함으로 전복되는 것.

균형이 깨진 것.

폭력과 멸시에 둔감한 것.

결국엔 자유하지 못한 것,

나를 어딘가 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


   대충 이러한데, 실은 무수히 많지만 이쯤에서 정리해야겠다. 와 닿지 않을 당신을 위해 이 불편하고 거슬리는 감정을 좀 더 풀어보자.

“나를 매이게 하는 모든 것” 예를 들면 “가족”, 가족은 나에게 힘이 되고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인 동시에 나의 결핍의 원천이요, 나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오로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진 나를 매이게 하는 것. 이런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세상으로 끌어낸 많은 작품들이 있다. 예술로 승화된 많은 작품들 중 여기에서는 영화만 다루려 한다. 구체적인 영화들은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하하하하


   “폭력과 멸시에 둔감한 것”, 예를 들면 내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가는 타인의 불편함들. 그 폭력의 형태가 너무도 다양하여 폭력인지 알아채지 못해서 더 불편한 세상의 진실들도 영화에 담겨있더라. 구체적인 영화는 그 다음호를 기대하시라. (흐흐흐흐) 그런 불편함을 끝까지 지켜보고 느끼고 멋대로 생각해서 떠들어보자는 것이 당신이 시간을 들여 읽어줄 이 글의 목적이다.


0.5호, 부활절 그리고 불편한 영화들


   성금요일이 지나고 부활절에 발간될 우리 “0.5호”를 위해 첫 호 발간의 워밍업으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을 모았다. 2004년 개봉이래로 부활절 단골 영화가 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제외하고 예수의 수난의 비극과 수난의 전복,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한 영화!는!


딱히 없더라.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인간의 수난과 부활(?)로 비견하는 일 역시 나에게는 불편해서 다른덴 자매의 또 하나의 가족, 다르덴 형제의 영화 두 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면피를 해보고자 한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말이다.


다르덴 형제의 초기작인 <로제타(1999)>는 나에게 가장 불편한 영화이자 가장 보물 같은 영화이다. 이게 바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구나’ 각인된 작품이랄까. 제일 처음 본 작품은 <아들(2002)>이었는데 그 불편함이야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로제타>에 대한 연민이 나에게는 더 컸다. 어린 소녀 로제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태도에 굴하지 않아야 하고, 허기짐과 차갑고 시린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어린 소녀. ‘소녀’로의 삶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가엾다는 말도 민망한 소녀의 삶. 채찍이 없는 수난이 거기에 있다.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부활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더 무겁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운 어린 소녀의 삶.


   

  

   감독의 카메라는 로제타와 딱 붙어서 숨을 헐떡이고 분주하게 흔들린다. 그런 감독의 시선은 로제타와 함께 하면서 로제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소녀의 삶을 위해 관객이 해줄 것 역시 그것 뿐 이리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는 시리고 아픈 배에 헤어드라이어의 작은 온기를 가져다 대므로 스스로를 보살핀다. 로제타는 지난 우리의 과거도 아니고 지난 추억의 회상도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로제타가 나 자신일수도 또는 그를 냉대하는 시선이 나로부터 비롯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수난이란 끊을 수 없는 결핍의 고리이며, 이 땅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 고단한 삶이다. 그녀의 수난은 자신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원죄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고) 그녀의 고단한 삶은 그저 주어진 자신의 생이다. 그 사실이 다시금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삶의 수난인 것이다.


   또 다른 영화 한편을 보자. 다르덴 형제의 최근작 <자전거 탄 소년(2011)>은 평소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매우 다른 따뜻한 영화다. 시릴이라는 소년을 끊임없이 믿어주는 사만다라는 여성을 통해 시릴의 삶이 새로운 ‘집’을 얻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초기의 다르덴 감독의 영화가 수난가운데 버려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그 수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따라다녔다면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은 사만다라는 이웃을 통해 구원받는다.



   부활이 왜 기쁜가. 부활의 기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쁨이라기 보다 또는 다시 태어남에 대한 기쁨이라기 보단 ‘나의 집, 본래 내가 속한 곳, 내가 돌아가야 할 진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이 아닐까 한다. 기독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미래는 이 땅에서 그곳에서 사는 것 같은 기쁨을 누리다 결국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 가정이란 그런 본향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그것’이다. 그것은 생육적으로 맺어진 가족의 의미가 아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정이 되어주는 약속이자 구원인 것이다. 시릴의 아빠는 아들을 낳았지만 진정한 ‘집’이 되어주지 않았다. 사만다는 시릴을 낳지도 기르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시릴을 만난 순간부터 관심과 애정으로 그를 돌보고 돌아갈 곳이 되어 주었다.


   우리의 수난은 돌아갈 곳, 의지할 곳이 있을 때에 구원받는다. 가여운 로제타의 수난은 세상 밖의 감독의 시선 외에는 어떤 위로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오로지 헤어드라이어의 온기만이 세상 속에서 그녀가 가진 모든 위안이다, 그 위안이 너무도 작고 볼품없어서 마음이 아리고 슬퍼서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다. 처절하게 가족에게서 가정을 요구하는 시릴은 사만다라는 쉴 곳을 얻으므로 구원받는다. 그 구원이 영원한 것인지의 여부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쉴 곳, 돌아갈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린 소년에게 쉴 곳이 되어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의 부활을 이뤘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영화를 떠올리니 다시 마음이 뭉클해진다. 어쨌든 이 두 영화를 보시라. 부활절과 연결하려는 억지가 드러나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불편함은 그러니까 불편해서 쓸모가 있다.


   불편한 지점에서 생각은 시작된다. 거기로부터 좋은 질문이 나오고, 좋은 질문으로부터 해답이 나온다. 제대로 된 질문은 언제나 해답을 갖고 있으니, 영화라는 완전하고 멋진 질문에서 나름의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우리는 정답이 아닌 나름의 해답을 원한다. 적어도 다르덴 자매는 그러하다. 영화를 대하고 그로부터 풀어낸 나름의 해답은 이왕지사 불편한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마치 불편함이라는 응축된 균을 미리 맞아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미리 정비하게 해주고 좀 더 제대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해주는 것. 그래서 안심(安心)하게 된다. 그렇게 함께 안심하고 또 다시 불편할 준비를 함께 해보자고 이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당신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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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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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기간의 마지막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장장 40일간을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사순절로 지키고 있다. 성탄과 함께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사순절과 수난, 부활에 관해 어떤 그림, 더 넓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느냐 하고 묻는다면 십자가라는 세 글자 대답 외에는 듣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절기의 예식에 대하여서는 특별새벽기도회나 고난주간의 금식, 미디어 금식, 성 금요일 예배와 부활절 예배, 달걀 나누기 등 사순절을 보내는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성경을 통해 가지고 있는 사순절의 이미지는 터무니 없이 제한적이다. 그뿐 아니라 획일적이기까지 하다. 올곧은 십자가의 형상, 부활절의 달걀 정도, 주일학교에서 보던 그림책자 정도의 수준에 굳이 하나를 더 한다면 몇 년 전부터 이 시즌만 되면 틀어주는 (게다가 특정부분만)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이미지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게 왜 문제인가? 물론 풍성한 저만의 상상이 없다고 해서,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는 사순절에 대해 이렇게 제한적이고 획일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풍성한 복음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상하고 제한적인 생각은 결국 예수님의 세상에 내려오심과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과 죽음, 그 계획의 풍성함과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쉬운 수난, 쉬운 부활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개신교 전통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우상숭배를 경계하기 위해 성상이나 성화를 신앙생활에 잘 활용하지 않고, 성경말씀 자체에 뿌리를 두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자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 중의 하나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 하여도, 한 사람을 보고서도 각자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이 사건에 대해 공장에서 찍은 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한적으로 묵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쉬운 수난과 쉬운 부활로 이어져 도리어 우리가 받을 은혜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성상과 성화에 대한 우려는 우상숭배를 막고 성경과 믿음의 본질에 천착할 것을 강조한 것이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과 감동의 표현이자 감상을 통해 오히려 묵상의 장을 넓히는 예술에 대한 제한은 아닐 것이므로.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상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서양미술사에서 이는 너무나 널리 쓰여온 주제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폭넓은 역사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모두 소개할 수 없기에, 20세기에 그려진 두 점의 작품을 골라보았다. 바로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와 아르툴프 라이너 Arnulf Rainer의 작품이 그것이다.

 

조르주 루오의 <Miserere>,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르주 루오 Georges Rouault(1871~1958)는 프랑스 태생의 화가로, 지난 2009년에 한국에서도 루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 바 있어 그 계기로 많이 알려지게 된 화가이다.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당대의 여러 화풍, 인상파나 야수파와 다양한 교류를 해왔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했던 화가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화풍에 옮겨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생소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이름이지만, 당시에는 전 국가적인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1945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그리고 48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흔히 루오를 종교 화가라고 분류하는 것과 다르게, 그가 종교적인 소재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광대나 창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주로 화풍에 담았던 그의 작품을 통해, 고상한 소재와 율법적 엄숙함에 집중하는 종교화가보다는 약자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그리스도인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세상이 끝날 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 Plate 35 from Miserere, Georges Rouault, Etching on paper, 1945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Plate 37 from Miserere, Georges Rouault, Etching on paper, 1945 

   

   

   <미제레레 Miserere> 판화 연작은 루오의 가장 위대한 시도로써 꼽히는 작품이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에 등장하는 구절인 불쌍히 여기소서의 라틴어 표현으로, 이 연작 작품은 58점의 판화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죄와 고통에 묶인 세상을 번갈아 보여준다. 1927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있었던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바로 전쟁에 대한 루오의 대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전쟁과 고통, 슬픔과 비관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해, 이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전후 유럽사회를 반영한 작품이었지만, 고통과 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루오의 깊은 통찰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루오의 판화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찬란하게 빛나지도, 영웅적인 성스러움을 뽐내지도 않는다. 한없이 슬플 뿐 아니라 버림받아 고통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루오는 특유의 거칠고 어두운 터치로 표현해낸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괴로움은 사순절 시즌에 우리가 많이 보곤 하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많이 다르다. 단순히 살갗의 찢겨짐, 흐르는 피와 같은 육체적 고통도 그리스도의 고통이었으나 그가 두려움과 고독의 한 가운데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았었다는 사실을 루오는 표현한다. <십자가에 달린 채 잊혀진 그리스도 아래에서 sous un Jésus en croix oublié là>, 그리고 <예수는 세상이 끝날 날까지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Jésus sera en agonie jusqu'a la fin du monde...>와 같은 작품에서 거칠게 표현된 외로움과 고통에는 이미지의 홍수라고 부르는 요즘에도 그저 넘길 수 없는 비통함이 있다.

 

   하지만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판화는 단지 고통 속의 그리스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전쟁과 탐욕에 매달리는 인류를 예수님과 교차하여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일회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행해졌던 오래된 퍼포먼스가 아니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극적인 역사적 개입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은 당시의 전후 사회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사회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천국에 자신을 위한 특석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왕처럼 여기지만 결국은 가면을 썼을 뿐이다.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변호인은 텅 빈 언어만을 내뱉는다. 어떤 의미에서 고통은 단순히 특정 시대와 상황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Homo Homini Lupus>라는 문장은 이 세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루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세상의 어둠, 이 양극단을 함께 표현한다. 높은 곳과 낮은 곳, 거룩함과 비천함,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기. 관념적이고 몽상적인 세계로 도피하지 않고, 이 극단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맨 얼굴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수난을 통해 그가 겪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너무 관념화하거나, 혹은 그가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악이 성행하는 이 세상에 오셨었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오늘날의 세상과 구원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에 그 문제가 있다. 하지만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대도시의 흉흉한 할렘가를 돌아다니시며 너무나 실제적인 고통을 겪으시나, 그 속에 빛나는 구원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여전한 전쟁의 위협과 탐욕의 유혹에서 살고 있으나, 연작의 마지막 작품의 문장처럼 <그의 고통으로 우리는 치유 받았다. C'est par ses meurtrissures que nous sommes guéris.> 임을 깊은 아픔과 슬픔 속에 발견하는 것이다. 루오 최후의 신앙고백이며 동시에 세계에 대한 그의 이해를 표현한 이 연작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고백을 다시 돌아볼 일이다(58 점의 판화를 모두 이곳에서 소개드릴 수 없으나, 참고자료 목록에 있는 사이트를 통해서 전체 연작을 모두 감상해보시기를 적극 권합니다J)

 

아르눌프 라이너의 뒤틀린 포도주 십자가

 

   두 번째로 살펴볼 작품은 아르눌프 라이너의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이다.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1929~)는 오스트리아 작가로, 현존하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틀과 기존의 인식을 파괴하는 추상작품을 주로 해왔으며, 이미 색칠을 된 페인팅이나 인화를 한 사진 위에 다시 덧칠을 하여 미완-완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직관과 무의식과 같은 주제에 집중하였으나, 이후에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하는 비엔나 행동주의 그룹(Wiener Aktionismus)과 함께 감정의 극단적인 상태를 표현하고 관객에게 그 경험을 전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오스트리아 바덴에는 그의 작업세계를 기념하고 연구하기 위해 아르눌프 라이너 미술관 Arnulf Rainer Museum’이 있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본 조르주 루오와 달리, 아르눌프 라이너는 기독교인도, 종교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십자가라는 소재에 집중하여 삶과 죽음, 육과 영, 그리고 구원과 희생과 같은 주제들을 연구해왔으며, 오늘 살펴볼 작품도 그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Wine Crucifix, Arnulf Rainer, Oil paint on Canvas, 1957/78, Courtesy of Tate Collection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는 워낙 강렬한 색감과 형상을 가진 탓에 언뜻 보아도 십자가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존에 우리가 표현하거나 보게 되는 형상, 네모 반듯한 나무 빛깔의 그것과는 너무 달라, 알아차리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십자가가 맞나 하고 다시 살펴보게 된다. 멀리서 보면 십자가이겠구나 생각하겠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게다가 검은 십자가의 형상 아래로 흐르는 듯한 붉은 물감은 피처럼 보여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기괴하고 뒤틀린 십자가는 아무래도 익숙치가 않은 것이다. 두터운 검정 수직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의 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카톨릭대학의 학생채플에 걸기 위해 주문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액자 틀도 없이 느슨하게 걸어, 맞은편의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십자가의 형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제목인 <포도주 십자가 Wine Crucifix>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포도주와 관련한 일화들이 몇 살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행하셨던 기적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던 일이었고,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권하며 말씀하신다.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 26:28, 새번역성경) 오늘날 성찬식을 통해 다시 기억하는 것은 바로 이 포도주에 빗대어 곧 당신의 피를 인간을 위해 흘리실 것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계획인 것이다. 하여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흘렀을 예수님의 피는 그때 말씀하시고 권하신 포도주로 비유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살펴본다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포도주의 빛깔과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와 그의 죽으심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을 보았을 때에 껄끄러웠다거나 혹은 너무 자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오히려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봐왔던, 때문에 머리 속으로 생각해왔던 십자가는 너무 네모 반듯하고 말끔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자연 어디에서도 기계적이고 엄밀한 의미의 직선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십자가 역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며, 더더욱이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대표되는 복음이 우리에게 감격적인 이유는 그가 초월적인 자세로 고상하게 우리와 거리를 두고 앉아 구원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철저히 우리가 사는 사회로, 그곳의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뒤틀리고 으스러지는 고통과 고독의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비유가 아니라 십자가 아래로 피를 흘리며, 군중의 야유와 멸시 속에서 오로지 그를 믿는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죽기까지 외치셨던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때문에 고통과 어둠이 제거된 십자가의 이미지는 그 구원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 그림으로 느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함보다 훨씬 더한 공포의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에 이 뒤틀리고 어두운 십자가의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포도주를 그의 피라 말씀하신 예수의 모든 기적과 모든 언어가 달렸던 십자가, 결코 반듯하고 말끔하지 않았던, 오히려 으스러지고 뒤틀린 형상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사순절 기간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오래간만에 하는 금식, 특별새벽기도회, 부활절 달걀? 여러 예식과 결심들이 성행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때에 맞추어 하는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잘 알아가는 것이며, 또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똑같은 이미지를 갖고 판에 박힌 예식적인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그 뜻을 이해하며 상상하고,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때문에, 그 걸어가는 길에 오늘 소개한 두 작가의 그림이 잠깐 멈추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의미 있는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


_꽤 애호가_

 

 

 


_참고서적 및 자료:

『조르주 루오』,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12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테오 순더마이어, 기독교사상 2004 10월호, 2004

조르주 루오의 <미제레레> 연작 판화를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곳

old.thirdmill.org/worship/rouault-l/default.asp/category/worshipsub1

 

아르눌프 라이너 뮤지엄 www.arnulf-rainer-museum.at

테이트 모던 홈페이지 www.tate.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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