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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수많은 ‘사이’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 만큼 공사다망한 사이가 또 있을까? 그 ‘사이’ 에 관해 생각나는 몇 곡을 골라 봤다. 내 맘대로.


1. oasis - let there be love


밴드 oasis. 담배 땡기시는게 형님, 맨 앞 선그라스가 아우님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참 많이도 들으면서 자랐던 말이다. 어릴 적 나는 한 살 터울의 동생과 정말 많이 싸웠다. 사춘기 즈음 가서는 서로 거의 말을 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때는 솔직히 동생보다 친구들이 더 좋았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부터 급속도로 다시 가까워 졌다. 같이 술 한 잔 하다 보니 그동안 감정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요즘은 싸우지 않는다. 뭐, 싸울 일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동생의 사이가 ‘친하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남자이고 내 동생도 남자이다. 나와 내 동생만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형제끼리 ‘친하다’ 고 말하기엔 좀 그렇다. 서로 살갑게 뭘 챙기는 것도 아니고, 서로 결혼하고 밥벌이 하러 다니니까 얼굴보기도 힘들다. 그저 가끔 전화해서 안부나 묻고 가끔 만나서 별 말 없이 소주나 한 잔 하고 그런 사이다. ‘친하다’ 고 말하기 좀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나쁜 건 또 절대 아니다. 정확하게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친한 관계’ 와 ‘안 좋은 관계’의 사이 어디쯤이 나와 내 동생의 관계다. 이것이 꼭 형제 사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당신은 당당하게 자매, 혹은 남매 관계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모님들과의 관계는? 피를 나눈 가족의 사이는 참 미묘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oasis (오아시스)’ 라는 밴드가 있다. 7,000만 장(95년경 한 언론사는 “영국에서는 3가구 중 한 가구 꼴로 오아시스 앨범을 가지고 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이 넘는 앨범을 팔아치우고, 8개의 영국 넘버1 싱글을 가진 슈퍼 록 스타다. 워낙 유명한 밴드


이니 따로 소개 하지 않기로 한다. 그보다 밴드의 주축이 되는 ‘노엘 갤러거’ 와 ‘리암 갤러거’ 형제는 음악적 성취 외에도 형제간의 잦은 다툼과 ‘불화(不和)’ 로 신문을 장식하는 일이 많았다. 2009년 8월경 형인 ‘노엘 갤러거’ 가 “리엄(동생) 과는 하루라도 더 함께 일할 수 없다” 며 밴드를 탈퇴 해 일단 해체가 되었는데(사실, 다시 합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 일 이란 게 모르는 거니까 나는 ‘일단’ 이라 표현 하겠다.) 그 해체의 이유에도 형제간 불화의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언론에서 호들갑 떨고, 부풀려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들 형제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던 거 같다. 그래도 91년 결성돼  20년이 가까워 오도록 같이 활동 하면서 서로에게 좀 너그러워 질 만도 한데 그게 참 쉽게 안 되나 보다. 서로 안 맞는 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본다. 덕분엔 우리는 커다란 록 밴드 하나를 잃었다.(ㅠㅠ ×100)

   이 밴드의 노래는 메인 보컬인 리엄 갤러거가 대부분 불렀는데(노엘 갤러거가 부른 곡들도 꽤 있다) 그중 <let there be love>란 곡은 매우 드물게 형제가 같이 불렀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는 건 아니고 앞부분 뒷부분 나누어서 따로 불렀다.가사도 말랑말랑하고 곡 자체도 느리고 조용한 곡이니 록음악 싫어하시는 분들도 좋은 팝송 듣는 샘 치고 시도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노엘의 어록 한 줄을 옮긴다. 부디 모두의 부모, 형제, 자매, 남매님들 사이에 사랑이 있으시길.


“어린 시절부터 나와 리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웠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


2. 윤상 - 벽 / 김윤아 - 담 































김윤아의 솔로 1집. 초판에는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 에세이집도 포함 돼 있었다. 이 앨범에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삽입곡 <봄날은 간다>도 수록되어 있다.


   


















윤상의 1996년작 [Renacimiento].이 앨범에서 <벽> 과 <배반>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윤상의 예전 곡들을 외국가수들이 외국어로 리메이크해 실었다. 익숙한 곡들을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게 했던 걸작 앨범이라 생각한다.



“Quelques rimes, pour vous dire  Je vous aime sans dilemne  미안해,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윤상 <벽>-


“우리사이엔 낮은 담이 있어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가닿지 않아요” 

-김윤아 <담>-

   삶을 살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벽(담)’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다. 


   2008년 6월에는 거의 전 국민이 벽을 맞이해야 했었다. 당시 대통령 이었던 이명박씨가 국민들을 상대로 담을 쌓아 올렸다. 이른바 ‘명박 산성’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시위하던 사람들을 막기 위한 물리적인 바리케이트 이상의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광화문에 건테이너 박스는 사라졌지만, 그때 쌓은 벽은 아직 허물어 질 줄 모른다.


   휴전선도 하나의 거대한 벽이다. 이미 너무 높은 벽이다. 풀기 힘든 숙제이고, 그 숙제는 다음 세대에게 떠 넘겨야 할 것 같다.


   이스라엘엔 분리장벽이 있다. 8m 높이의 견고한 콘크리트 벽은 분리 되어선 안 되는 인간성마저 분리시켜 버렸다.

   

   나는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벽을 느끼곤 한다.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 이 있을 거라는,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 이 있을 거라는 말은 적어도 나에게는 벽이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닥쳐!” 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라는 말은 결국 같은 말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웃는 얼굴로 “닥쳐!” 라고 말하고 싶다면 한 번 써먹어 보시길 추천한다. 참고로 “기도해 줄게” 라는 말도 효과 적일 것이다.


   긍정적인 벽도 있다. 회사의 파티션은 나의 자리, 나의 은밀한 안락을 보호해 주는 아름다운 벽이다. 그런 벽은 높을수록 좋지 않을까? 


3. Belle & Sebastian - Im waking up to us


2001년 <I’m waking up to us> 싱글 표지. 표지 자체는 러블리 하다 

   

   혹시 이 밴드를 아신다면 음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물론, 뭐 우연히 알게 됐을 수도 있지만.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이 밴드는 밴드라기 보단 작은 악단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멤버도 일반적인 밴드(주로 3명~5명)보다 많고(2010년 앨범 기준으로 7명) 악기 구성도 트럼펫이나 바이올린 같은 클래식 악기를 적극 활용하는 면도 독특하다 할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좀 슬픈 말 이기도 한 <Im waking up to us>란 곡은 이들의 2001년도 싱글앨범에 담긴 곡이다. 2005년에 나온 싱글 모음집 [Push Barman To Open Old Wounds] 앨범에서도 만날 수는 있지만 이 앨범은 품절돼 구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CD로 구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 근데, 진짜 좋다!! 이 앨범!!)


   이곡은 사연이 좀 있다. 밴드의 멤버인 스튜어트 머독이 연인 사이 ‘였던’ 같은 밴드의 맴버 이소벨 켐벨에게 주는 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곡의 내용이 러블리 하지 않다는 것이 반전이다. 이곡은 아마도 헤어지고 나서 이것 저것 정리하는 맘으로 쓴 것 같다. 아니면 헤어지기 거의 직전에 쓰였거나. 그러다 보니 곡 내용이 우울하고 삐딱하다. 찌질함마저 느껴지기도 하고. 대놓고 이렇게 만드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그 마음 존중해 주기로 하자. 솔직한 맘을 노래로 담는다는게 쉬운일은 아닐테니까. 재미있는 건 2002년에 팀을 탈퇴한 이소벨 켐벨은 2004년 자신의 솔로 앨범 [Amorino]를 발표 하는데, 그 앨범 안에는 <Im waking up to us>의 답가인 <Monologue For An Old True Love>가 실려 있다. 참으로 창의적인 남녀가 아닐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사후처리와 애도를 이런 식으로 하다니!!! 


   <Im waking up to us>는 가사가 긴 곡이므로(할 말이 많았나 보다) 곡 중에서 가장 찌질 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좀 옮기며 이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찌질 하긴 한데, 좀 슬프기도 하다.


i need someone to take some joy in something i do

you need a man who’s either rich or losing a screw


you know i love you here’s the irony

you’re going to walk away intact

i think you never liked me anyway

you like yourself and you like

men to kiss your arse

expensive clothes

please stop me there

i think i’m waking up to us  (하략)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나만큼 즐거워 해줄 사람을 원하는데 

너한텐 부자이거나 어딘가 망가지고 있는 남자가 필요하지

그리고 넌 내가 그런 널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지

그게 아이러니야

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떠나가겠지

어쨌거나 넌 애초부터 날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

네가 좋아하는 건 네 자신 그리고 너한테 아첨 떠는 남자들 

그리고 비싼 옷들

부탁인데 거기까지만!

나 이제 우리 관계가 어떤 거였는지 서서히 깨닫는 거 같아.

(하략)  번역 : 성문영

  _거의 편집장_




사진출처 :  http://www.oasisinet.com/  

                http://www.belleandsebastian.com/

참고한 자료 : oasis, belle and sebastian 앨범들 속 해설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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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의 공간은 치명적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의 공간. 때로 ‘사이’는 친구이거나 혹은 친구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를 일컫기도 하고, 댄스라고 하기엔 뭔가 덜 신나고 발라드라고 하기엔 그래도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애매한 노래를 이를 때에 쓰이곤 한다. ‘결국 그 사람과 무슨 사이냐고’ 우리는 깔끔하게 정의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모든 것이 명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피할 수도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그 ‘사이’의 공간을 받아들일 수 밖에. 게다가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기에, 사실 이 ‘사이’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도리어 치명적인 공간. 때문에 끼인 모양새로 간주되기 십상인 ‘사이’를 대변하고자, 오늘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머무는 시선들을 소개한다. 백남준의 <촛불 하나>와 수-메 체의 <메아리>가 바로 그 것이다.


백남준, <촛불 하나 One Candle>, 1989, MMK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촛불 하나>, 가상과 실제 사이에서


   백남준1932-2006의 <촛불 하나 One Candle>는 제목 그대로 하나의 촛불로부터 시작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삼각대 위에 설치한,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작은 양초의 이미지는 초를 촬영한 카메라와 그 이미지를 다시 삼원색으로 투광시키는 삼광식 프로젝트를 거쳐 결국은 하얀 벽 위에 다양한 빛깔로 촛불의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혹은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촛불을 향해서 입김을 불어볼 때면 실제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미술관 공간을 메운 거대한 촛불들도 제각기 흔들리게 된다. 화이트 큐브 미술관 안에서 벽을 흔드는 바람이 조용히 스쳐간다..


   백남준은 흔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바, 사람들은 그의 예술에 대해 차가운 고철 기계와 텔레비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은 한국의 현대예술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나, 그만큼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제외하고선 제대로 이해되어지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음악에서 시작하여 영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그가 집중했던 주제 중 하나는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의 어우러짐이었다. 단순히 기계문명의 발달과 확산에 따라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를 통해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빅브라더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과 인간 정신, 문명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촛불 하나>는 그런 사유의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작품은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촛불에서 시작하지만,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가상의 이미지로의 촛불 이미지를 창조하여 이윽고 공간을 뒤덮어버리는 것이다. 실제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작품이 위치한 공간은 프로젝터를 통과한 가상의 이미지로 채워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촛불이 흔들릴 때에 가상의 촛불 이미지들 역시 그 바람에 함께 흔들리게 된다. 때문에 단순히 기계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지만 하나의 촛불로 시작하였지만 순수한 자연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촛불 하나>의 풍경은 실제와 가상,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앞에 서면 구형 삼광식 프로젝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물감을 한껏 푼 것처럼 형형색색을 이루는 촛불의 풍경 앞에서 바람의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가을의 갈대밭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가상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 그 사이에서 <촛불 하나>는 어느 한쪽에 머무는 것보다 더욱 더 증폭된 풍경으로 펼쳐진다. 심해를 헤엄치듯 너울거린다. 작은 양초에서 시작한 것이 이윽고 화이트 큐브 미술관의 환경을, 보는 이의 경험을 빚어낸다. 그 사이를 마구 유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메 체의 <메아리>,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는데


메 체, <메아리 L’echo>, 2003, 비디오, 사운드, 5분 30초, 무담 룩셈부르크 소장


   두 번째 시선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작가 수-메 체(Su-Mei Tse 1973~)의 <메아리 L’echo>라는 비디오 작품이다. 이 작품은 6월 말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전에서 현재 전시 중인데, (자세한 전시 정보는 마지막에 있다.) 작품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보아도 선뜻 이것이 비디오 작품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거대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하여 전면에는 푸른 풀밭, 그리고 풀밭과 강한 색채 대조를 이루는 붉은 드레스의 첼리스트(작가 본인), 이것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전부이다. 


   작가는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알프스 산은 곧 첼로 소리의 메아리를 낸다. 처음에는 외따로 존재하는 소리이지만, 이윽고 첼로 소리와 메아리는 일종의 합주를 이루게 된다. 돌림노래처럼, 질문과 대답처럼, 오순도순 나누는 대화처럼. 풍경에서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거대한 산 아래에 미약하게만 보이는 작가의 첼로 연주가 있을 뿐이다. 소리가 외따로 존재하던 작품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여도 작품의 이미지에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알프스와 작가 사이 공간의 밀도가 바뀐 것이다. 첼로 소리와 메아리 소리의 간격에서처럼 처음에는 텅 빈 정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을 지나 이윽고 조금씩 조응하기 시작한다. 첼로 연주, 메아리의 화답, 또 그에 대한 첼로의 다른 소리, 그리고 메아리의 또 다른 화답. 알프스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 뿐이고, 작가는 여전히 여기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첼로 연주와 메아리는 결국 대화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 사이 공간에 머무르는 일


   너무나 단정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이쪽 혹은 저쪽 이기를 강요하는 가름 사이에서 ‘사이’의 공간은 무력하게만 보인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 묻는다면 무어라 답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검정색과 흰색 사이의 회색 지대는 도무지 좋게 해석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이’의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 산과 첼리스트 사이의 대화, 실제와 가상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풍경……


   최근 발간된 <시간의 향기>에서 저자인 한병철 교수 역시 기존의 시간 개념이 파괴된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하며,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모든 것은 없거나 지금 여기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존재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생은 모든 사이가 제거되고 나면 그만큼 더 빈곤해진다.” 


   삶의 풍성함이란, 관계의 놀라움이란 단순하게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도리어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하려 들었을 때에, 혹은 쉬이 얻으려 들 때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모호하고 안개 같은 시간이 주는 번민의 때가 있으나, 또한 그러하기에 허락되는 경탄과 희열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사이’는 도무지 애매해서 싫다는 당신, 오늘은 이 치명적인 공간에 조용히- 머물러 보시기를 권한다. 

_꽤 애호가_





기타 참고 자료

_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njpartcenter.kr

_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www.artsonje.org

_한병철, <시간의 향기>, 문학과 지성사, 2013











수-메 체의 <메아리> 관련 전시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


전시일시: 2013년 4월 13일(토) 

              ~ 6월 23일(일)

전시장소: 아트선재센터

관람요금: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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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라니 이렇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말이 있을까. 게다가 한국어 발음은 듣기에도 사랑스럽다. 


  ‘사이’라는 단어의 온도는 어떤가. ‘사이’는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말이다. 당신과 나 ‘사이’의 온도를 가늠할 수 없듯,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온도’ 차이를 감당할 수 없듯, 우리는 늘 ‘사이’에서 번민하고 만족한다. ‘사이’ 라는 단어에서 오는 친밀감은 때론 더 이상은 좁힐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 시간과 공간 사이의 거리가 되기도 하니 ‘사이’ 라는 의미만 잘 감당하며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은 관계와 시간 ‘사이’를 가장 잘 녹여낸 영화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제시 役), 줄리 델피(셀린 役)가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에 이어 18년의 시간을 녹여낸 작품이니까. 지난 금요일 미드나잇, 밤을 지새우며 이 영화를 보았다. 


   제시와 셀린은 이제 늙고 배나온 중년의 여느 부부와 같다. 빛나던 순간과 서로를 그리워하던 시간은 이미 우주 저편에 가있는 듯 현실을 살고 있는 입담 좋은 부부.  


   “Happinese is in the doing..Not in the getting what you want.” 라고 고백하던 그들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그 시간을 잡아채었다. 비행기는 떠나고 그들은 남았다.(비포 선셋) 이제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해가 아직 머물러 있음을, 그렇게 머물러 있다 저물어 갈 것임을 해질녁 그리스 카르다밀리의 해변에 앉아 이야기 한다. 


“still there, still there, ... gone.”

   지는 석양빛을 나란히 앉아 바라보며 던진 대사가 그들의 삶의 모습 같고 꼭 우리의 모습 같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빼앗긴 듯 서로를 갈망하던 그들도 삶이 라는 시간을 감당하니 ‘사이’를 실감하게 된 듯 보인다. 서로의 ‘사이’에 존재하던 간절함과 그리움은 이제 서로에 대한 익숙함과 견딜 수 없음으로 변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시간 ‘사이’를 정말이지 엄청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멋진 아침을 맞이하기 전 셀린은 말한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아. 그러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너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존재 할 것 같아.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은 너와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中에서)


   나 역시 우리가 믿는 신이 나와 당신의 사이에 존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 서로를 통해 자신의 신을 보지 못한다면 신을 믿는 우리의 삶이라는 게 너무 위선적인 셈이지 않은가. 그 ‘사이’를 존중할 수 있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믿는 신을 함께 읽는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다.


   그들은 그 푸른 향기로 터질 것 같은 시절 만나 그들의 불안과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해 쏟아내며 아침이 밝아오기 전 따분하던 삶에 생기를 되찾고 서투른 삶을 서투른 채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침이 오기 전까지 깊은 밤(미드나잇)을 함께 한다. 


   함께 밤을 지새우다 아침을 맞이하고 정오의 햇살을 즐기다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게 되는 동안, 그 ‘사이’에 우리는 어떤 ‘사이’ 로 익게 될까. 그렇게 다시 밤의 한가운데로, 어두움의 중앙으로 돌아오게 된 제시와 셀린은 그 기억을 자양분 삼아 삶을 이어간다.


‘사이’의 다른 말은 추억일 것 같다.  

   “Memory is a wonderful thing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비포 선셋 Before Sunset>中에서)

   우리가 그 기억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으면 현재와 잘 조율해 낼 수 있다면 , 우리도 아마 그 ‘사이’를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제시와 셀린 그들의 ‘사이’ 도 그렇게 존재한다. 설레임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 이제 함께 하며 그 추억과 현재를 영민하게 묶어가며 그들 ‘사이’를 지탱한다. 무너졌다 일어나고 추억과 현재를 비벼내며 다시 웃고 한 방향을 향해 나란히 앉는다.


   다만 삶의 ‘사이’들이 지나가도록. 그 모든 것이 석양 너머로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긋이 바라본다.


just passing through...

태양과 함께 우리의 삶이 저물도록.

_다르덴 자매님_



   

   덧,  글을 쓰면서 느는 건 변명뿐 인 것 같다. 숙고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지 못함에 대한 변명, 사색의 시간보다는 연애에 힘써야 한다는 변명까지. ㅋ

변명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읽을거리를 내놓는 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부담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숙고의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글이라 부끄러움에 몇 줄 더 첨언해본다. 다음 달엔 보다 재밌고 깊이? 있는 읽을거리를 내놓도록 숙고하리라 스스로 다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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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여름 사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또 여름이 왔다. 지난여름과 올여름 사이. 찬바람 쌩쌩 불었던 겨울의 기억들은 신기루 같다. 지나간 시간은 늘 모호하고, 안개처럼 뿌옇다. 사소한 것들이 계절을 알린다. 이를테면, 어느 순간 코끝을 찌르는 싸한 풀 냄새, 한낮의 태양에 달궈진 목덜미의 후덥지근한 느낌 같은 것들. 이런 기억들은 너무나 사소해서, 평소에는 떠오르지도 떠올릴 수도 없지만,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감각되는 기억이다. 

   ‘아! 올해도 벌써 여름이구나.’하는 찌르르한 감각. 우리들의 삶 속에는 의외로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 많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수많은 모호한 지점들, 사실 시간이야말로 모호한 것이다. 세계는 초 단위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초 단위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 모호함의 사이를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영역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의지하여 계절과 계절 사이를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한다. 때문에 우리의 이해 방식은 결코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지혜일 수도 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해답을 갈구한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질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답은 늘 충족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갈망하게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답은 언제나 단답형의 간결하고 짧은 대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히 이해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 아마도 해답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도.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위의 질문을 구글에 물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우리는 본 적도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 능력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상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장난 이지만, 우리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물론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 있다는걸 반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상력이란 것은 신비하다. 우리는 어째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인류가 상상해왔던 많은 일이 상상에 머무르지 않았던 무수한 사례가 존재한다. 물론 추상성과 구체성의 차이는 있겠으나,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온 역사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 아니겠는가.


   문학작품이나 미술 작품, 다양한 예술의 분야에서 우리는 상상력의 발현을 경험한다. 본 적도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 한다. 영화나 소설의 분야에서 나는 특히 SF라는 장르를 좋아하는데, 과학적 상상력의 요소보다는 어떤 가상의 상황을(사고 실험과 같은) 현실감 있게 묘사해내는 시도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사회의 어떤 요소들을 결핍시키거나 과장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회나 인간을 설계해보는 재미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현재 나와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사이’라는 모호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 ‘42’라는 숫자가 떠오른 것은 한 권의 책, 혹은 영화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은 글의 흐름은 사실상 여기까지 오기 위한 복선이었다고 말해두겠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과학소설 시리즈이다. 1978년 BBC의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한 이후 여러 다른 형태로 변형되면서, 몇 년이 지난 후 점차적으로 국제적인 멀티미디어 현상이 되어갔다.   

   이 시리즈는 많은 개작물을 남겼는데, 1979년과 1992년 사이의 소설(맨 첫권의 제목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1981년의 TV시리즈, DC코믹스에서 93년과 96년에 출판된 만화책, 팬들이 만든 타월, 2005년에 개봉된 동명의 영화<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등이 나오기도 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다른 버전들(소설, TV시리즈, 컴퓨터게임, 초기의 영화대본)등을 모두 애덤스 본인이 적었으며, 몇몇 연극은 더글러스 애덤스가 새로운 요소/제제를 갖고 썼다고 소개 되었다.


1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권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The Restaurant at the End of the Universe)

3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4권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5권 <대체로 무해함>(Mostly Harmless)

6권 <그런데 한가지 더> (And Another Thing...)   

http://ko.wikipedia.org/wiki/<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인용_

   

   

총 6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물 중에서 6번째 작품은 예외적으로 더글러스 애덤스의 작품이 아니라 이오인 콜퍼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애덤스 사후에 그 부인에게 허락을 얻어 동일한 시리즈물로 출판된 책이다. 어쨌든 이상의 총 6권의 작품을 모두 합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라고 부르고 있고, 처음 시작이 라디오 드라마였던 만큼,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파생되어 영국에서는 사회현상으로까지 자리 잡기도 했었다. 

   국내에는 2005년 애덤스의 작품인 5권까지의 시리즈만이 합본으로 된 거대한 양장본이 출판되었고, 현재는 시리즈 6권까지 각각 분리되어 있는 세트가 출간되어있다. 장담하건대 그 거대한 합본 양장본은 아마 누구라도 보면 갖고 싶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 2005년에 제작된 영화가 상당히 히트한 덕분에 국내에 출판되지 못했던 4권 이후의 내용이 포함된 합본이 출판될 수 있었고, 책도 국내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책의 내용이 다분히 영국식 말장난의 블랙 코미디와 꽤 난해한 철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인용하고 있어서, 영화만큼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 책은 재밌다. 2004년 이전에 이 책을 국내에 수입하던 출판사가 망하는 바람에 5권이 국내에 출시되지 않자, 국내의 SF 마니아들은 외국의 책을 직접 번역하여 그 내용을 교류하는 커뮤니티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1980년대에 지어진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진보된 SF인 동시에 당시 세계와 사회를 통렬히 비꼬는 블랙코미디 요소에 연신 감탄이 나온다. 


   “사물들이 겉보기와 항상 같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구 행성에서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이 돌고래보다 지능이 높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바퀴, 뉴욕, 전쟁 등 엄청난 일들을 성취해내는 동안 돌고래들이 한 일이라곤 물속에서 빈둥거리며 재미나 보는 것밖에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돌고래들은 자신들이 인간들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다고 항상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정확히 똑같았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돌고래들은 지구 행성이 곧 파괴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인간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사소통 노력은 대부분 재미있게 축구공을 차올리려고 한다거나 물고기 한 토막을 얻어먹어 보겠다고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경고하기를 포기하고, 보고인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자신들만의 수단을 통해 지구를 빠져나왔다. 돌고래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뒤로 두 번 공중제비를 돌아 고리를 통과하면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휘파람으로 부는, 놀라울 만큼 정교한 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인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_<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발췌_


42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궁금해할 것이 있다. 대체 ‘42’가 무엇인가? 그럼 아마 영화나 책을 본 사람들은 나와 같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지”      

   이 재미있는 기호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가운데, 과거 고도로 발달한 존재들이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심오한 생각’이라는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게 된다. 이 슈퍼컴퓨터는 너무나 뛰어나서 그 해답을 계산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750만 년이나 걸리게 된다. 이윽고 ‘심오한 생각’은 그들에게 자신이 계산한 답을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42라는 숫자였다. 여기에 대한 수많은 농담과 다채로운 해석들이 있지만, 작가 스스로 결국 ‘별 뜻 없는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42. 한국말로는 ‘사십이’ 혹은 ‘사이’가 되기도 하는 저 숫자가, 왠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한 걸음 더 성장한다. 우리네 인생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고, 거기엔 어떤 해답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당신이 찾으려는 해답은 대체 무엇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그거다. 우리는 삶의 어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존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대답이 42라고 해보자. 무엇이라 한들 납득할 수 있을까? 좀체 단순할 수 없는 인생이란 것에서 유일무이한 해답이란 결국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낳게 한다. 그 답이 대체 무슨 뜻인가? 바로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책 속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인(42라는 답을 계산했던) ‘심오한 생각’은 그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질문을 알아야만 내가 말한 해답의 의미를 알 수 있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한 질문을 하고, 적절한 대답들을 찾는다. 우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질문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그 자체로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창밖은 밝아오고, ‘책 소개’와 ‘오늘의 일기’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긴 글을 마치는데, 어떤 마무리가 적절한지 도무지 적당한 문구가 떠오르질 않는다. ...sigh.

_대충 소설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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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바늘두더지 딜레마’ 란 얘기 아니?  

바늘두더지의 경우, 상대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하려 해도 

몸을 대면 댈 수록 온몸의 바늘로 서로를 상처입혀 버리지

인간에게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어. 


지금의 신지군은 마음의 어딘가에서 아픔을 두려워 해서 겁이 많아진 거겠지. 


그러다 알게 되겠지.

어른이 된다는 건


다가가든가, 멀어지든가 하는걸 반복해서,

서로가 그다지 상처입지 않고 사는 거리를 

찾아내는 것 이란걸...


                                                                                                 _신세기 에반게리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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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다가,> 2호가 나왔습니다.

이번호의 주제는 여러가지 '사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럼 오늘도 많이 노셔요~~!!


차례

2호 - 사이

여는글 ----- 7

주제파악 ----- 8

<놀다가 책> -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 9

<놀다가 음악> - 나는 우리 사이를 깨달았어 ----- 15

<놀다가 아트> - 사이에 머무르는 시선들 ----- 22

<놀다가 영화> - '사_이_' 그 멀고도 가까운거리 ----- 28

쓸데 없는것 배우기 - 손뜨게 가방 ----- 32

산초의 방구석 탐방 ----- 42


(* 파일을 분할압축 했습니다. 두개의 파일을 모두 다운받으셔야 압축을 푸실수 있습니다.)

놀다가, 2호-사이.z01


놀다가, 2호-사이.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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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어떤 한 사람의 관심사와 취향, 성격 등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축소판 이라 생각한다. 신기한 나라, 신기한 세계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친구에 집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토끼를 따라 구덩이로 들어간 앨리스처럼 누군가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_놀다가_ 


   

나는 일반인이다. 조그마한 책장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 나는 적지 않은 책과 적지 않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다른 일반인의 책과 관심사에도 흥미가 많다. <산초의 방구석 탐험>은 사진으로 읽고 보는 소소한 메모장이다. 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한때 시를 많이 읽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시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헌책방에서 틈틈이 사서 모으고 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창비 시선 그리고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좋아한다. 소설의 경우, 지금도 많이 좋아하지만 특별히 사서 읽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최인훈, 황순원, 도스또예프스키,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좋아한다. 옛날 세로 읽기 책을 모으고 있다.



80년대 학생운동 조직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의 역사를 찍은 사진책이다. 이미 내가 학교다니던 시절엔 한총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어떤 이름의 조직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지났다. 앞 커버는 소위말해 팔뚝질을 하는 모습. 지금봐도 그때의 신념과 패기가 느껴지는 멋진 포스의 사진이다.



역사와 문화는 오랜 관심사였지만, 여행은 다른 분야에 비하면 오래된 편은 아니다. 특히 전문 여행서적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되지 않았다.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세계 오지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최근에 아름다운 가게 헌책방에서 <북극탐험>이란 책을 득템했다. 중앙일보가 1981년도에 초판 발행한 책으로 주간중앙을 구독하는 독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표지사진과 글꼴이 아주 옛스럽다.




예술은 모든 분야, 영역을 가리지 않고 관심 갖고 있으며 좋아한다. 사진, 만화, 영화, 클래식, 미술사, 음악사, 미학, 한국 리얼리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안도 타다오, 영화 <말하는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 그리고 한옥. 인테리어, 캘리그라피, 땅콩집, 목공예, 식물, 장난감...


   

그밖에 분류하고 정리 할 수 없는 수많은 책, 사전, 수첩, 사전, CD, 레코드판... 


   

대학교선배형이 선물한 시집앞의 메모. 그때는 선배가 후배에게 책선물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는 그 전통을 잘 잇지 못한 것 같다.  _산초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생일은 의외로 꽤 쓸쓸하다. ‘당연한 기쁨’ 이 강요된 덕분에 ‘외로움’ 이 더 두드러진 탓이다. 언젠가는 생일을 맞을 당신을 위해(이미 맞았거나, 아무튼) 여기 한편의 꽤 쓸쓸한 영화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작품. 전작으로는 <불량공주 모모코(下妻物語 Kamikaze Girls, 2004)>가 비교적 유명하다. 영화는 강렬하고 다채로운 색감,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 덕에 무아?의 경지, 나를 잊는 경험을 선사한다.(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마츠코는 사랑받고 싶은 어린소녀다. 병약한 동생 덕에 집안에서는 늘 순위가 밀린다. 근심 가득한 아빠를 밝게 웃게 하고픈 어린 소녀는 인생은 아마도 디즈니 동화의 다른 모든 공주들의 삶처럼 반짝일 거라 믿는다. 가족이 바라는 대로 교사가 된 23살의 마츠코는 사소한? 실수와 오해로 인생의 모든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나.락.을.


   생일에 느끼는 쓸쓸함은 인생으로부터 전해지는 쓸쓸함과 맞닿아 있다. 생일이니까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그다지 기쁘지 않은 나 자신과의 괴리로부터 오는 쓸쓸함 말이다. 태어났으니까, 살아 가야 하니까, 아마도 행복한 생(生)일 꺼라 기대하지만, 나와 당신의 삶이 막상은 그다지 신나지 않아서 아마도 더 외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마츠코의 삶이 그렇다. 인생은 아마 즐거울 것이며 적어도 나의 삶은 기대보다 더 빛날 것이라는 그녀의 꽃빛 공상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지의 현실로 바뀌었다. 


마츠코의 쓸쓸함


“쓸모없는 인생이었어.”

   

   자기 누이 마츠코의 죽음을 두고 그녀의 남동생은 말한다. 타인의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덜컹거린다. 동생이 보기에 삶의 나락을 기어 다니다 죽어버린 누이는 쓸모없는 생을 살다간 먼지 같은 여인네일 뿐이다. 혐오스럽다 불렸던 누나, 마츠코.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살아갈 동기가 필요했다. 나락에 던져진 후에는 그 동기가 더욱 간절해진다.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그 무엇. 어떤 고난과 역경도 절대 나 자신을 꺽지 못하게 할 그런 동기, 생을 버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마츠코에겐 살아갈 동기란 사랑 이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병약한 여동생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어서 그녀는 사랑을 더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전혀 회복될 수 없는 나락들이 에워싼 순간에도 무엇이 삶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사랑.


   사랑에 목을 매는 마츠코의 모습이, 타인의 멸시와 폭력, 지독한 태도들을 견뎌내며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키려는 그녀는 한심하고 비참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여성비하적이라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혐오스럽고 처절한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다만 자신의 사랑에 답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될 수 없으며 더욱이 내면의 기준을 흔들 수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철저하게 사랑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택한 여인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소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청년 류. 사랑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마츠코의 후회 없고 미련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 두렵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친 그로 인해 그녀는 다시 한번 절망한다. 


   뒤늦게 류는 도망의 끝에서 마츠코를 통해 신을 만난다. 신의 사랑이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마츠코의 한없는 사랑이 꼭 그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코 버리지 않는, 뒤돌아서지 않는 그런 사랑.

   

   늘 고향의 강을 그리던 그녀, “다녀왔어” 라는 인사에 “어서와” 로 맞이해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바랬던, 평생 사랑을 주기만 하다 스러져간 마츠코는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한 어느 밤, 고향을 닮은 강을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의 삶은 쓸쓸할지언정 쓸모없지는 않았다. 태어나서 죄송한 삶,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나의 외로움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생일이 특별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가만히 보니 기쁨에 대한 감각은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쓸쓸함이나 외로움의 감각들은 날로 예민해진다.


   개인적으로 생일이 불편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삶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크리스천의 ‘강요받은 기쁨’ 에 기인한다. 생명, 그분의 희생은 나에게도 무엇보다 귀하지만 세상이, 또 내가 속한 교회의 환경이라는 것이 스스로 생명의 기쁨을 묵상하고 기뻐할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기쁨’ 이라는 감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 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참’ 기쁨을 누리라니. 기뻐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범하는 것 같아서 영 그렇다. 안 그래도 죄 될 것이 많은 세상 아닌가. 생일의 기쁨도 이와 비슷한데,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왠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든 달까.

   

   생일은 왠지 더 쓸쓸하고 생(生)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마츠코의 그토록 지독한 외로움이, 그녀의 처절한 삶이 그 외현은 아닐지라도 나의 속 깊은 외로움과도 닿아있다.


   근본적으로 외로운 족속인 우리는 스스로가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마츠코는 자신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온 몸으로 내뱉고 철저하게 인정한다. 때문에 그녀는 더 처절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쏟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는 것은 자기를 배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는 극단에서 궁극의 삶에 도달할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는가 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느낀다. 현재의 나의 외로움은 나 자신을 더 이해하고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할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이 착각 역시 또 다른 ‘디즈니 월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꿈을 꾸는 건 자유지만 어디로 가도 앞은 깜깜하기만 하더라고. 하지만 그 깜깜함을 빛낼 단 하나를 마츠코는 찾았다.

   생일, 우리가 태어난 이 토양은 이미 너무 상해버렸지만, 계절도 불분명하여 늘 상 몸을 사리게 만들지만, 우리는 여기서 깜깜함을 빛낼 밝은 빛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극중에서 주인공 마츠코를 연기한 나카타니 미키(中谷美紀)는 “구부리고 펴서(まげてのばして / 마게테 노바시테)”라는 곡을  노래하는데 맘이 오묘하게 슬퍼진다. 가사는 이러하다.


구부리고 펴서 별님을 잡자

구부리고 발돋움해서 하늘에 닿아보자


조그맣게 구부려서 바람과 이야기하자

활짝 팔을 벌려 해님을 쬐어보자


모두들 안녕

내일 또 만나자


구부리고 펴다 배가 고프면 돌아가자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가자

     

   사랑을 향해 구부리고 펴기를 쉬지 않았던 그녀와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는 별님을 잡을 수도, 하늘에 닿을 수도 없지만 바람과 이야기하고, 해님을 쪼이며, 지치고 힘들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기쁨’ 의 강요, ‘두드러진 외로움’ 을 우리는 잘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_다르덴 자매님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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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에 묘한 불편함이 생겼다. 물론 여러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절친한 이들에게는 절친한 대로,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기억해줬다는 소심한 기쁨이 있다. 선물이나 케이크도 마다하지 않는다. 선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기쁜 일이니. 하지만 이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불편함은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생일이 사실 내가 축하를 받을 날인가 하는 물음에서 스물스물 피어 올랐다.


   ‘생일 축하한다’ 는 메시지는 무슨 뜻인가? 물론 어렵게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온 데에 신생아였던 나의 노력이 없었다고는 못할 테다. 뭔가 용을 썼겠지. 하지만 여러 표현에서 나타나듯 내가 태어나게끔 된 것은 어머니가 나를 배고 태에서 키워 낳으신 덕분이니, 사실 기억도 안 나는 그 시절에 나는 거저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을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건가 싶어서, (물론 축하하는 이는 이런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겠지만) 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래, 사실 우리말에서 ‘태어나다’ 는 표현은 확실히 내가 축하를 받을 만 하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그 어릴 적 온갖 애를 써서 태어났었노라 라는 성취의 느낌이 잔뜩 묻어난다. 열 달이 다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를 가르고 태어났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맥더프 정도가 된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만. 실제로 다른 언어의 경우를 찾아보면 ‘태어나다’ 는 동사는 우리말과 달리 수동태로 표현될 때도 많다. 나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이며 혹은 신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어찌됐든 내가 축하를 받을만한가 라는 지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생일 축하를 마다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생일을 기회로 간만에 나누는 상투적인 안부인사와 온갖 난리들이 싫지만은 않다. 이 글을 근거로 생일 축하하는 것을 멈추지는 말아달라. (어차피 내 올해 생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이를 테면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가장 큰 기념일이 생일일 필요가 그다지 없다면, 다른 의미의 생일, 혹은 다른 의미의 기념일을 발견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것이 내가 기억지도 못하는 출생의 기억보다 진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생일에 대한 시와 그림을 각각 한 편씩 소개하고 싶다. 상투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혹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새 다이어리를 샀을 때 내 생일을 가장 먼저 체크하고 있다면, 일 년 달력에 내 생일만 눈에 번쩍 뜨인다면, 다른 의미깊은 날이 나한테는 없던가 한 번 돌아보는 재미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로제티의 생일, 내 사랑이 찾아온 날


생일  -  크리스티나 로제티


내 마음은 물가의 가지에 둥지 튼

한 마리 노래하는 새입니다.

내 마음은 탐스런 열매로 가지가 

휘어진 한 그루 사과나무입니다.

내 마음은 무지갯빛 조가비,

고요한 바다에서 춤추는 조가비입니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A Birthday  -  Christina Rossetti


My Heart is like a singing bird

Whose nest is in a watered shoot:

My Heart is like an apple-tree

Whose boughs are bent with thickest fruit:

My Heart is like a rainbow shell

That Paddles in a halcyon sea:

My Heart is gladder than all these

Because the birthday of my life

Is come, my love is come to me....

(번역: 장영희)

   

   생일에 대한 여러 예술적인 해석들이 이렇게 존재한다.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생일>이라는 이 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는 사랑이 내게 찾아온 날이 생일이라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수 많은 연인들의 기념일이 여기에 속할 것도 같지만, 사귀기로 시작한 날이라든지 결혼한 날이 어떤 결심을 동반하는 날이라면,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내게 온 날은 이를 테면 내가 어머니에게로부터 ‘태어나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출생하게 됨으로 내가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사랑이 내게 왔기에 새로이 태어나게 된 것, 때문에 그 사랑이 오기 전에는 내겐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시인은 이야기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태아이던 우리는 출생의 순간과 그 환희를 우리의 부모님만큼 느낄 수 없었지만, 사랑이 오는 그때의 기쁨은 시인이 노래하는 새로, 한 그루 사과나무로, 무지갯빛 조가비로 빗대어 표현하듯 온 몸으로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생일’ 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기도 한 것이겠다. 화사한 봄의 꽃마냥 시인이 스물 일곱 살 때에 썼다는 이 시는, 사랑타령은 질리게 들어서 새로울 것 없을 것도 같지만, 과연 ‘생일’이라고 부를 만큼의 눈부신 사랑의 날이 있었던가 하고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봄은 타지 않기로, 조심하기로 해요 우리.) 


   사실 시인은 이 시를 쓰고 그 사람과 헤어졌을는지도 모르겠다. 예순 일곱도 아니고, 스물 일곱에 썼다니까 사실 모를 일이다. 생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환희에 찼던 것이지, 결과적으로도 시인에게 그 날은 생일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을 어느 날,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선 주름진 손으로 연필로 사각사각 ‘돌아보니 이 날이 내 또 다른 생일이었지, 이 사람이 내게 왔던 그날’ 하며 주름 패인 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생일이라면 하나 더 있다면, 오래 축하하고 싶을 것이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샤갈의 생일, 우리는 하늘을 날아올라서


   로제티의 시 <생일> 을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사랑을 만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환희와 기쁨은 어떤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을까. 여기, 사랑스러운 연인들과 낭만의 대기를 표현해낸 마르크 샤갈의 <생일> 이 있다. 로제티는 19세기의 영국시인, 샤갈은 20세기 러시아 출신의 화가, 각각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았던 이들이나 묘하게 어울리는 또 다른 생일을 감상해보자. 필시 21세기의 우리의 생일 혹은 우리의 사랑에 이어지는 지점이 있을 테니.

   

   마르크 샤갈의 <생일>이다. 샤갈1887-1985 은 러시아 국경마을인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나서 화가가 되기 위해, 혹은 조국의 현실 문제로, 혹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와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80여 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왔던 작가이다. 인상파와 입체파, 추상화 등 20세기의 주요한 예술 운동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만의 스타일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렸으며, 특히 러시아의 민속적인 색채와 더불어 시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하여, 세계적으로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2010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캔버스에 유채, 80.5x99.5cm, 뉴욕, 현대미술관


   사실 샤갈의 <생일>은 앞서 로제티가 썼던 ‘사랑이 찾아온 날’의 생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일>은 샤갈이 그의 연인이었고 아내였던 벨라와 결혼식을 올리기 몇 주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초상으로, 실제로 벨라가 샤갈의 스물 여덟 번째 생일을 위해 꽃다발이며 케익을 준비하고, 방 곳곳에 숄을 걸어놓아 그를 위한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정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이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결혼을 자축하는 결혼기념화이면서 일종의 관계의 초상이니, 로제티의 시에서 보여지는 맥락과도 일맥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 샤갈의 인생에서 벨라는 30여 년 동안 부인이자 영혼의 동반자였고, 그리고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샤갈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으니 이 생일은 결국 이 결혼은 생일 만큼의 혹은 그 이상으로 기념할 만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재미난 점은 샤갈이 그리는 연인들이다. 그들은 중력의 법칙을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생일>이라는 작품에서도 그렇고, 2년 후에 그린 <산책>에서도 그들은 하늘을 붕붕 떠다닌다. 마치 생일이나 놀이공원에 가면 들고 다니는 헬륨 풍선처럼, 언제나 축제인 것처럼 그들은 하늘을 날아 다닌다. 현실의 연인을 그린 것이겠지만, 관계의 초상 안에서 그들은 함께이며, 그들뿐이며, 그들의 세상을 산다. 때문에 샤갈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분명‘생일’이라 부를만하다. 출생의 기억보다 진한 기억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래 살아갈 이를 만났으므로.


시간의 발견, 사건의 발굴


   생일은 아무리 그래도 기억하게 되는 날이다. 달력을 볼 때 내 생일이 번쩍 뜨이는 것은 별 다른 기대가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선물과 축하를 받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생일을 제외하고서 누구보다 먼저 깊게 기념할 날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있는가? 굳이 지금의 연인을 만난 날이 아닐지라도, 잊을 수 없는 하루 하루가 있다면 기억 속에서 한 번 다시 발굴해보자.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고, (불교의 승려들은 불문에 들어간 날을 그들의 생일로 기념한다 한다.) 어떤 인식의 깨짐, 충격의 날일 수도 있겠다. 잊을 수 없는 만남의 순간, 혹은 불편했던 진실을 직면했던 날도 또한. 


▲ 마르크 샤갈, <산책>, 1917-18, 마분지에 유채, 170x183.5cm,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와 유사하지만 더 나아가서 ‘진리 사건’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진리에 깨우치게 되었던 체험을 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난 후 회심하여 바울이 되었던 사건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68혁명 역시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면서 바디우는 충실하게 우리의 진리 사건과 이 시기에 임하라고 이야기 한다.


   고로 다시 돌아오면 ‘생일 축하한다’ 는 즐거운 인사 속에 우리의 기념할 것들을 다 흘려 보내지 말자는 것이다. 365일을 모두 기념하며 살아갈 순 없지만, 사랑을 만난 날이든 혹은 중요한 만남이 있었던 날이든, 혹은 인식이 깨졌던 날이든, 혹은 영적인 체험을 했던 날이든. 생일의 개념을 넓히고 새로운 생일을 발굴해보자. 더 나아가 알랭바디우의 표현대로 ‘진리 사건’ 의 때를 마주하자. 그리고 설령 그날에 누구도 ‘너의 새로운 생일을 축하해’ 라고 해주지 않아도 기념하자. 그렇게 알알이 시간을 조각해 보자. 로제티의 생일처럼 혹은 샤갈의 생일처럼, 혹은 생을 흔드는 ‘진리 사건’ 의 그날처럼. 

_꽤 애호가_






참고서적 및 자료:

 『샤갈』, 재키 울슐라거, 민음사, 2010.

『그늘』, 김응교, 새물결플러스, 20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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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원래 매사가 삐딱하여, 생일도 아름답게 안 보인다. 우리 솔직해 지기로 하자. 당신의 생일은 몇 살까지 아름다웠나? 


1. 생일풍경 1

   어릴 때 난 선물보다는 생일 케이크를 더 좋아 했다. 지금이야 흔하게 먹는 케이크 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케이크는 생일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생일케이크에 나이만큼 초를 꽂고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고, 촛불 끄는 걸 정말 해보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우리 가족이 더 가난해 생일 때도 케이크 한 번 제대로 못 먹었었는데, 어느 날 내 생일에(5~6살 쯤 으로 기억한다) 엄마가 생일 케이크를 사는 것이었다. 밤에 아빠가 오시면 같이 촛불을 끄자고. 나는 정말 잘 참았다. 아빠가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아빠는 오지 않았다. 그때는 그 흔한 핸드폰도 없던 시절, 그냥 기다려야만 했다. 엄마는 화가 났고 나와 동생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내 생일은 저물었다. 아빠는 아주 늦은 밤, 술에 취해 들어오셨고 다음날 나는 촛불도 끄지 못한 케이크를 그냥 잘라 먹어야 했다. 케이크가 맛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2. 생일풍경 2

   생일 케이크에 초가 켜 있고 옆에는 탄산음료수와 과자들. 가운데 생일 맞은 사람이 머리에 고깔모자를 쓰고 서있고 그 주위를 원을 그리며 사람들이 서 있다. 눈웃음, 혹은 미소, 혹은 이빨을 환히 내보이고 웃으며 양손은 생일 맞은 사람에게로 내민다. 생일 맞은 사람 역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내밀어 화답한다. 그리고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런데,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3. 생일 풍경 3

   요즘도 생일 맞은 친구와 함께 케이크를 사들고 술집, 혹은 커피숍으로 가는 일은 흔한 일이다. 십여 년 전. 커피숍이나 술집에서 생일 축하를 할 때면 대한민국 20세기 문화시민으로 가져야 하는 미풍양속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케이크는 최대한 큰 것으로 준비한다.

  (2) 친구들은 최대한 많이 모은다.

  (3) 술집이나 커피숍 카운터에 생일 축하 노래를 신청한다. 단! ‘터보’ 의 생일축하곡 이어야 한다. (하긴 그 당시 알바들은 모두 ‘터보’ 의 생일 축하곡을 틀었다. 그건 센스가 아니라 진리였다.) 

  (4) 노래가 나오면 술집이나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박수를 쳐야 한다. (뭐,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있다. 음악이 스피커 찢어져라 터져 나오니......시끄러워 대화를 할 수가 없다.)

  (5)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생일 맞은 사람은 노래가 끝나면 촛불을 끄고 축하를 받으며 생일케이크를 한 조각씩 자른 후 앞 접시에 담아 주위에 가까운 테이블에 최대한 많이 서비스한다. 이때! 알바들에게는 가장 큰 조각 하나를 갖다 주는 걸 절대 잊지 말도록 한다.(이렇게 하면 꽤 높은 확률로 서비스 안주 혹은 메뉴가 나온다.)


4. 관점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혹은 보여준다)’ 라는 말은 얼핏 보면 상하좌우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완전히 객관적인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 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관점이다. ‘있는 그대로’ 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 를 ‘있는 그대로’ 를 보여줄 것인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5. 가난한 사랑노래  

   UMC의 <가난한 사랑노래> 라는 곡이다. 가사를 먼저 보기로 하자. (가사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맞춤법을 무시했음.)


vrs 1

잊혀질만하면 나타나

너의 자취 방안을 담배연기와 소주의 쓰디쓴 습기로 가득 채우고는

곧바로 쳐다보지 않고 피곤한 듯 충혈 된 눈으로

나를 외면하는 거부하는 몸짓을

굵은 팔뚝으로 꼭 붙들어놓고 사랑한다고

준비했던 수식어나 농담 같은 것들

결국 모두 잊은 채로 터프한척 딱 한마디


오빠가 생각해 봐도 그런 것 이제 정말 지겨울것 같아

여기서 일하면서 보니까 말이야

샴페인 안에 반지를 넣어둔다거나

아니면 꽃을 만땅 채워놓고 차 트렁크를 열게 하거나

정말로 멋진 방법들이 많고 많던데

꽃을 그렇게 살려면 이 달 방세는 포기야

차는 빌려 쓴대두 방은 빼줘야 되는데

같이 살고야 싶지만 먼저 고백을 멋지게 해야지

그치만 시간이 있을까 싶어

너는 하루에 열 시간

오빠는 하루에 열두 시간을 일하면서 지나가고

한달에 이틀을 쉬는데

누워서 TV를 보던지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게 되더라

어쨋건 마음만은 제발 받아달라는

구질구질한 말들은 이제 하고 싶지도 않다

친구들 만나면 재밌게 잘 놀아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chorus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기를 

돌아서서 흘리는 눈물이 기억에 남게 되지 않기를


vrs 2

니가 직장을 얻게 된게 오빤 너무나 기뻐

원래 그 회산 이쁜 경리를 좋아한다는데

사진성형 같은 건 생각도 안해 봤지만

니가 채용된건 정말 당연한거라고 봐

부장님이 자꾸 눈길 줘도 신경 쓰지마

원래 너처럼 이쁜 애들은 팔자가 다 그래

오죽하면 부대 앞에 식당에서 오빠가 널 꼬셨겠니?

서울 따라온거 후회는 않지?


특별히 니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밥만 먹어도 느낄 수 있는게 있어

니가 별로 안 좋아하는 반찬을 내가 먹어치우면

웃길것도 없는데 미소가 스쳐 지나가

추석날 너 고향 내려갈 때 줄까하고

선물하나 산 적이 있었어

지갑인데 역 앞에서 오토바이가 채갔다

포장지가 비싸길래 포장 못했던 게 문제였어

안에 편지를 잔뜩 써놨더니

돈이 많이 들어간줄 알고 털었나봐

세탁소에서 빌려 입었던 정장이 어울리기는 했나 보드라

부티가 났나봐.. 별로였나?


가난은 남자를 심각하게 약해지도록 만들지만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더욱 나약하다는거 알고는 있지만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chorus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 

돌아서서 흘리는 눈물이 기억에 남게 되지 않기를


vrs 3

눈이 꽤나 많이 오는 바람에

지난 겨울엔 걷기만 해도 분위기 괜찮았었는데

넌 잠깐 운적이 있었지

먹고살기 위해서만 사는게 이젠 지겹다고

오늘 너한테 술 꼬장만 진탕하고 아무것도 못 내밀고

집으로 돌아올래니까 니 생각이 또 난다

그치만 우리한테 자유가 없진 않아

우린 잡일하는 기계는 아니야


작년여름 피자집에서 일하고 있을때

배달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날 끌어안고 미친듯이 소리치던 넌 정말 예뻤어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를 순 없어

남자라면은 누구나 자기 여자에게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을 주고 싶어해


옥상에서 빨래를 너는 니 옆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알고 있어도 그래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6. 가난한 사랑노래 

   UMC의 첫 앨범 [XS1]에 수록된 이 곡은 지금 내 주위를 있는 그대로,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랑노래 중 이 노래 보다 현실적인 노래는 없다고 본다.(있다면 추천해 보시길!)      

   너무 현실적이고 너무 적나라해서 섬뜩할 정도다. 이 노래는 바로 나의 이야기 이며 우리 동네 누나, 동생, 형들의 이야기, 내 친구의 이야기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고 내가 비슷하게 겪어왔던 모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청춘들이 이런 풍경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니고? 


7. 사랑노래

   지금 당신의 MP3 안에 들어 있는 사랑노래 몇 곡을 뒤져봐도 바로 알 수 있는 것. 흔히 듣고 있는 사랑노래 들은 ‘감정’ 을 표현하는 노래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대중가요가 정작 대중의 ‘이야기’ 를 담고 있지 않다.

   <가난한 사랑노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현실과 속 마음을 잔인할 정도로 섬세하게 보여 주는 노래는 거의 없다. 지금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랑 노래들은 “그대가 너무 좋아 미치겠어” “그대가 너무 멋있고(혹은 예뻐/섹시/멋져서) 미치겠어” “그대가 없으면 내 삶은 없어(혹은 그러므로 널 갖겠어)” 정도로 요약 할 수 있다. 

   이런 노래들이 전혀 쓰잘데기 없다는 게 아니라 이런 노래들만 있으니 쓰잘데기 가 없다는 거다.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이 당신과 나의 ‘이야기’이고 서로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끝없이 부딪치고 출렁이는 상호 작용인데 대부분의 사랑노래들엔 ‘이야기’ 도 ‘상황’ 도 ‘상호작용’도 없다. 그냥 격한 감정만 있다. 

   그런데 좀 살아 봐서 알잖은가? 어쭙잖지만, 사랑이란 것이 ‘감정’만으로만 구성 된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 노래는 더욱 빛나고 이채롭다.


8.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다시 한 번 위의 가사를 묵상 해 보시길 바란다. 나는 이 가사를 천천히 읽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이 노래의 진정한 킬링라인은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짧은 말 속에는 무수히 많은 생략을 담고 있다. 비루하고, 어쩌면 찌질 하기도 하고 뭐 하나 제대로 정해 진 것 없는 쓰나미 앞에 촛불 같은 주인공의 상황을 단칼에 정리하는 말이다. 노래의 주인공은 왜 생일을 연인과 함께 보낼 수 없었을까? 야근 때문일 수도 있고 쓸데없는 자존심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내 생일, 혹은 연인(친구)의 생일에 야근을 해야 하는가? 왜 세상은 우리에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가지게 만드는가? 왜 세상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혼을 비참하게 만드는가? 이유를 알려 하지는 말자. 단지 질문을 던지자. 예술의 기능중 하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고 세상 모든 행동의 시작은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니까.


8′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오늘은 니 생일 이잖아” 같은 말이지만 다른 느낌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부모님과 내 주위에 나를 아끼던 어른들도 내게 곧잘 이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평소에 잘 놀아주지 못하고, 갖고 싶은 것 다 사주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다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안쓰러움. 또 해주지 못하는(안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질책들. 그 수많은 생략들을 오직 생일날엔 속 시원히 말씀 하셨던 것 같다.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하고. 

마치 창조주가 인간에게 이야기 하듯.



(퍼가기 허용이 안돼 아쉽지만, 꼭 클릭해서 보시길 권합니다. 제 생각엔 원곡보다 이 라이브 버전이 더 좋군요.)


_거의편집장_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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