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문화잡지 <놀다가,> 4호 가 나왔습니다.

이번호는 8월과 9월의 합본호 이며,

나름 특집도 준비 했습니다.


즐겁게 읽어 주시고,

의견이나 하실 말씀은 방명록에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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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아리아(?)가 흐르고 전화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린다. 피에 젖은 손이 가늘게 떨리며 수화기를 향한다. 초점이 나간 채 면도날과 이겨진 담배꽁초가 비친다. 피가 번진 욕조 안에 누워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는 지금 욕조 안에 있다.

   몇 년간 교류가 없던 여동생이 협박과 애원을 뒤섞어 가며 오빠에게 부탁한다. 아이를 절대 혼자 둘 수 없으니 잠시만 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부탁할 사람이 오빠 밖에 없어서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전화했단다. 한동안 초점 없는 눈빛으로 천장을 응시하더니 이내 건조하게 ‘okay’로 답한다. 음악은 급변하고 그는 황급히 손을 뒤덮은 피를 씻어낸다.


   어째서 였을까. 그가 손목을 세로로 긋고(대개는 가로로 긋지 않던가, 그렇게 선명하게 세로로 그은 건 처음 본 듯) 욕조 안을 온통 피로 물들인 것은. 죽기를 작정하고서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하지 못한 것은. 기왕지사 죽고 나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지 죄다 궁금해진다. 죽기 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면도날과 욕조를 뒤로하고 리치(혹은 리처드)는 대충 열 살 정도(4학년이라니)일 조카 소피아와 만난다. 소피아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조숙하다. 어른들 특히, 지금 삼촌이랍시고 자신을 맡아주러 온 어른(?)의 꼴을 보니 더 한심하다. 어떻게 자신을 돌봐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만나자 마자 가이드 라인을 챙기는 똑똑한 조카를 마주하니 삼촌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 


   어른스러운 소피아와 철이 덜 나 보이는 리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지만 균형이 맞다. 삼촌을 수동공격형(passive aggressive)으로 정리해 버리는 냉정한 조카와 순간순간 현실에서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 지는 삼촌. 그 둘이 5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소녀는 욕조안의 삼촌을 세상으로 끄집어  내었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도 조카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에 그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아직까지는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에, 서로에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불안과 초조 속에 버려졌다가 상대로 인해 느끼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순함이나 진실한 어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일단 그 틈이 생기면 함께한 시간이 짧던 길던 그 틈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진다. 


   그 ‘틈’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상대를 알고 싶어 한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들이 궁금해지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내 상대를 걱정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되며 서로를 보호하고 싶어진다.


   19분의 짧은 시간동안 감독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삶이 달라지는 모습을 음악과 함께 잘 버무려낸다.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따르게 마련인데 볼링장에서 소피아가 레인 위를 걸어가며 추는 춤과 음악은 정말이지 절묘하고 신나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그 장면은 리치에게는 일종의 테라피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순간, 그의 세계에도 조금의 판타지가, 희망이 주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감독이 이 곡까지 썼다니 진짜 너무 매력적이다. 곡명은 “sophia, so far”, 유튜브에서 찾아보시길 권한다)


   다시 현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자신에게 기댄 어린 조카와 나란히 앉은 리치의 멍한 눈 속엔 무슨 생각이 자리했을까 계속 상상해 보았다. 어쩌지 못하겠는 감정이 그 멍한 눈동자 속에 회오리 치고 있었다. 타인과 연결된 삶, 그것에서부터 오는 위로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 위로를 통해 조금 더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위로를 건내 주고 싶은 욕구도 피어난다.


   소피아를 통금시간(curfew)에 맞춰 여동생에게 데려다 주면서 그는 그가 거저 받은 진짜 위로를 그의 동생 메기에게 전한다. 형제란 참 오묘한 것이다. 진저리나게 싫다가도 다시 기대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남편의 폭행으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동생에게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고, 너는 절대 변하지 않는 ‘쿨함’을 지닌 멋진 동생이며 그 증거로 소피아가 ‘쿨한 것’이라고 위로한다. 논거가 너무나 멋진 칭찬이지 않은가. 


   창밖으로 절묘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젖어든다.(영화에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피로 물든 욕조에 걸터앉아 다시 옷을 벗고 자기 자리라고 믿고 있던 그 욕조 속에 잠긴다. 붕대를 풀고 면도날을 세워들고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애원하는 듯 들리는 따뜻한 벨소리. 전화선을 뽑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든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동생의 제안, 그의 얼굴에 비친 미묘하게 엷은 미소가 그가 다시 한번 욕조에서 나올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흐르는  Alex Ebert 의 ‘truth’ !!


   주연을 맡은 숀 크리스틴슨(Shawn Christensen)은 <커퓨(Curfew, 2012, 미국)>의 각본과 연출도 맡았다. 그 섬세한 표정과 눈빛은 누구보다 감독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직접 주연을 맡은 것일지도). 이 단편으로 그는 아카데미와 끌레르몽 페랑, 스톡홀롬 영화제에서도 상을 휩(?)쓸었다. 영화를 보면 그럴 만 하군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너 지금 어디니’라는 질문은 마치 내게는 ‘왜 거기에 있니’ 라는 질문으로 들린다. 너는 왜 거기에 있냐고, 왜 욕조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삶에 제한 시간을(CURFEW)을 두느냐고 말이다. 


   나는 지금 텅 빈 사무실이다. 한쪽으로는 내내 영화의 오프닝과 음악을 떠올리고 한쪽으로는 내일까지 제출해야할 실적 정리표를 생각한다. 황폐하기는 나도 리치와 매한가지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그도 사실은 욕조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욕조에서 자신을 끌어낼 동기를 끝내 찾지 못해 그 무료하고 텅 빈 시간을 끝내려 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동기가 생겼으므로, 그 동기는 또 새로운 동기를 낳을 것이므로 더 이상 마른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사무실이고 관계의 밀고 당기는 일에 지쳤으나 어쨌든 동기가 있어 이곳을 지키고 앉았다. 문득 동기가 사라진 것 같아 허망한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울려주는 전화벨이 내게도 있어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_다르덴 자매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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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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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어디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먼저 할 일은 돌아보는 일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더라 하며 내가 자리한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질문에 따라 답변은 내가 막 도착한 지하철 역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일 수 있다. 때로 ‘지금 어디냐’는 물음은 지리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인 질문, 사회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때의 답변은 내 세세한 위치보다 내가 사는 사회의 맥락과 모습이 되어야 하겠다.


Pablo Picasso, the Artist’s Eyes, 1917, Pencil on vellum paper, 

Museo Picasso Málaga, Rafael Lobato © Museo Picasso Málaga


‘지금’을 꿰뚫는 예술가의 눈

   지금 나의 거한 곳을 보여주는 것, 때로는 사실을 고발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수긍해온 현실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은 문학과 함께 예술이 감당해 온 고유한 역할이다. 예리한 눈길로 표면적인 현실에 감추어진 욕망과 무지, 왜곡과 한계를 간파하는 것. 피카소가 그린 ‘예술가의 눈’은 사물의 정수를 다 뚫어볼 것 같은 눈으로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상의 먼지에 덮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실과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내 고발할 것 같은 눈빛으로. 


   예술 안에서도 여러 장르가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발견하는 이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하는 장르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너 지금 어디니? 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인 대답, 나 여기야 하고 보여주는 사진들. 사진에도 왜곡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적어도 보여지는 현실을 진술하고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눈으로 오늘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좀 더 새롭게 재-발견할 수 있지않을까? 때문에 이번에는 ‘저 서있던 자리에서, 어떤 것에도 눈 감지 않은 채로 시선을 던진’ 사진과 사진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요세프 코우델카 Josef Koudelka,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 Prague. August 1968. 

Warsaw Pact Troops invade Prague. In front of the Radio Headquarters, 1968 © Josef Koudelka/Magnum Photos


1968년 8월의 프라하, 요세프 코우델카

   사진의 제목에서 명백히 보여주듯 때는 1968년 8월, 이곳은 프라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68년의 봄이 지나고 소련이 프라하를 침공했던 당시를 사진에 담았다. 장소는 제목에 나타나듯, 프라하의 라디오방송국 본부 앞, 시내 한복판. 인적은 드물지만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이 감돈다. 하지만 너 어디에 있니? 라는 대답에 가장 적합한 대답으로 보이는 사진이다. ‘난 지금 프라하의 라디오 방송국에 있고, 지금은 정오를 갓 넘겼어, 여길 좀 봐’하는. 


   그러나 사진은 단순한 대답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진은 시계바늘 너머 삼엄한 프라하의 거리를 보여주고, 작가의 것으로 보이는 팔은 단순히 시계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이 사태를 지켜보는 한 사람의 결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 굳센 주먹을 보라. 


   이 사진을 찍은 ‘요세프 코우델카(Josef Koudela 1938~)’ 는 후에는 세계적인 보도사진작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에 소속되지만, 당시에는 막 전업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른 살의 젊은 작가였다. 68년 8월 당시 프라하에 있었던 그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눈 앞에서 보게 되고, 일 주일 동안 그 침공 현장을 쏘다니며 시민들의 저항과 소련군의 공격을 렌즈에 담게 된다. 결과물은 5,000여장의 사진들. 그야말로 그가 당시 거기에 있었으므로 찍을 수 있었던 사진들이자, ‘나는 여기에 서서 이 순간을 목도했노라’는 고백과 고발의 시선인 것이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부터 8월에 있었던 소련의 프라하 침공 이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체코슬로바키아는 68년 1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당 제 1서기를 맡게 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강령 아래에 새로운 개혁을 시도한다. 이전까지는 제한되었던 언론과 집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사회를 다시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시기가 이때이기도 하고, 소설의 여주인공인 테레사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것도 코우델카가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68년의 프라하 침공 때였다.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1979년 10.26 사건부터 80년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까지의 기간 역시 이 프라하의 봄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 민주화의 움직임은 당시 소련의 눈에 달가워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동유럽권에 영향을 주어 냉전 상황에서 공산주의권의 힘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여러 협상과 회담을 거쳤지만 결국 1968년 8월 20일,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군 20만 명을 앞세워 프라하를 침공하고 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새로운 개혁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찼던 프라하의 봄은 이렇게 쉽게 스러지고 말았다. 


   이 때 젊은 작가 코우델카의 눈은 긴급한 그 거리를 향하고, 후에 ‘68년 프라하 침공(Invasion Prague, 68)’이라고 명명되는 이 사진들을 남긴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이 길었지만, 사진에 대해 설명할 것은 별로 없다. 지금 그곳에 서 있었던 그의 시선과 프레임 안에 가득한 긴장을 보는 것 밖에는. 평화가 사라진 거리와 불안한 시선들, 이곳과는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평화의 부재와 불안한 시선들은 다른 모양으로 서울의 거리를 메우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서울, 최민식

   그런가 하면, 전후 한국을 바라보았던 또 하나의 치열한 시선, ‘최민식 작가(1928~2013)’ 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최민식 작가는 우리나라의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 작가로 195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을 렌즈에 담아왔다. 그를 수식하는 ‘가난의 얼굴을 찍는 예술가’, ‘빈민의 사진가’와 같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전후의 가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흑백사진으로 포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고백하건대,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이 글의 제목은 최민식 작가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독한 가난을 지독하게도 담아왔기에 간첩이라고 오해도 수없이 받아왔고, 독재정권 시대에는 나라망신 시킨다며 여러 음모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이러한 현실에 있다’고 하는 고발이자 정직한 대면으로써의 사진을 낳은 것이다. 그의 글 한 부분을 여기서 소개한다. 


최민식, 1965년 대구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나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진실한 창작을 위한 자기 도전이 있을 뿐, 후미진 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머무는 곳은 어디라도 내 사진의 영역이 된다. 그곳은 가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한다. 사진은 볼 때마다 깊이를 느낄 수 있고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마음으로 고통에 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 침묵 그리고 미소...... 이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아왔다. 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만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풍부함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통해 물질적 번영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려 했다. 나의 사진의 기조는 무엇보다 민중과 같이 하는 삶에 있다. ‘우리 삶의 진실한 이야기’를 민중에게 전하려는 사명감과 당위성, 이것이 내 사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휴먼선집』, 최민식, 눈빛출판사


   부산에 살며 자갈치 시장과 영도,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민중들을 찍어온 시선은 그저 누군가의 인물사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된다. 사진이란 그저 보이는 얼굴을 찍었을 뿐이지만 고단한 주름과 지친 몸, 어떤 몸짓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가 오늘날의 서울을 찍는다면 어떤 사진들이 나올까.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몇몇 SNS에 ‘체크인’이라는 기능이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장소를 태그해서 보여주는 방식이고 사진을 첨부하기도 하는데, 그게 어쩌면 ‘나는 여기에 있다’ 라는 오늘날 방식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묻든 묻지 않았든. 또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 덕에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지기도 했다. 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그러하듯. 그러나 요세프 코우델카와 최민식의 시선과 같은 치열함은, 대답하기 편리한 셋팅과는 별개의 문제. 너무나 쉬워진 생활에 혹은 일상의 먼지에, 정작 사람의 삶에는 너무나 자주 눈 감아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울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사건들에 대해, 더 가깝게는 내 주변의 사람과 장면에 대해서.


“ 사람이, 그것도 서럽고도 착한 사람이

거기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사진 속의 아득한 시절,

아득히 먼 사람들이 내 곁으로 와서 운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을 찍었다.”    - 최민식-

_꽤 애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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