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평생에 이번 여름처럼 더위와 습도를 온 몸으로 경험하는 계절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서울엔 폭염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다는데, 최근 처한 상황 덕에 절절히 더위와 습도를 겪어내는 여름이다. 나 이 정도로 여름을 타지는 않는데. 절대 보지 않는 공포영화 처방이라도 내려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니 사실 말 다했다.


   그런 맥락에서 ‘4’는 이 여름의 내게 불운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원래는 괜히 오싹해 했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무서워서라도 서늘함을 좀 가져다 주지 않으련?’ 하는 바람, 혹은 ‘새벽 4시는 그래도 좀 시원하겠지 않을까?’ 정도의 안도가 먼저 떠오른다. 아 이쯤 되면 좀 슬퍼진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서늘한 그림, 혹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작품을 소개해보려 한다. 사실은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더위에 취한 머리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이니 아니라고 해도 이해를 구한다. 나처럼 축축한 공기에 절여진 마음들에 공감을 구한다. 아…… 습도. 

 

칼을 나의 붓 삼아

   처음 이 작품 앞에 섰을 때에도 그렇고 여전히, 이 작품을 보면 소리가 들린다. 슈악! 종이의 단말마 비명소리가. 종이에 숨을 끊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여름, 서늘한 그림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이 먼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a>, 

1960, Tate Collection


   굳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골머리를 앓다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서늘한 정적을 만들어버리는 한 마디 말이 더 효과 있는 것처럼, 폰타나의 작품은 칼집 하나로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슈아악 하는 종이의 비명을 상상해보면 효과는 더 배가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무서운 이야기라고 해도 고전적인 풍으로 풀어낸그림들은, 무서워도 뭔가 한 여름에 몇 겹 긴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간 것처럼 답답하다. 반면 폰타나의 그림은 저 칼집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곧 뒤통수를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이.


   하지만 그게 무엇이건 간에 일단 이게 뭐길래 액자 프레임에 곱게 넣어 벽에 걸었나 하고 의아해지는 게 사실 가장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볼 때 온갖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작품들에 둘러 쌓여있던 터라, 상대적으로 별 충격이 없었더랬다. 그러나 여전히 캔버스에 칼집을 내어서……뭐? 그걸 내가 못할까봐? 할 수 있다. 충분히.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는 아르헨티나에서 자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조각가이자, 화가이고 이론가이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집중해서 공간주의(Spatialism, Spazialismo) 선언문을 다섯 차례 내어가며 공간주의를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였고, 2차원을 벗어난 회화를, 3차원을 벗어난 조각을 구상하고 고민했었던 작가이다. 이를테면, 흔히 회화와 조각을 다른 종류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점, 즉 전자는 2차원적 캔버스에 머무르고 후자는 무게와 덩어리가 느껴지는 3차원의 소재에 머문다는 바로 그 통념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앞서 소개한 <공간개념 ‘기다림’>도 마찬가지다. 저 찢겨진 자국으로 종이가 앞뒤로 벌어져서 생긴 저 공간, 그리고 그 구멍으로 인해 뒤에 나타나는 배경까지도 생각하면 이 작품을 전통적인 회화로 볼 수는 없다. 평면을 벗어났으니 분명 조각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또 조각이라고 하자니 뭔가 애매하다. 프레임에 든 건 종이 한 장인걸. 결국 작품의 제목처럼, 회화도 조각도 아닌 그만의 ‘공간개념’을 만든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화는 현실이나 상상의 무언가를 표상해야 하고, 그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기를 사람들은 바랐다. 그러나 당시 개념미술의 다양한 작가들이 그러했듯, 폰타나 역시 이미지의 반영, 선적 내러티브를 부정하고선 그만의 추상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선이야 쉽게 긋는 것이라 하여도, 캔버스 앞에서 칼로 쭉 선을 긋는 데까지 이르는 건, 또 공간을 창조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칼을 손에 쥐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캔버스를 찢었다’니, 이쯤되면 그마저도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폰타나의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연작으로 계속된다. 평면을 칼질로 쭈욱 찢기도 하고 이후에는 구멍을 뚫기도, 초크와 금속, 잉크, 돌을 이용한 작업도 선보인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공간개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이 2천여 점에 이른다. 그 중에 가장 알려진 것이 앞서 보았던 찢기 작업과 구멍 뚫기 작업인 것이다.

   

   더워서 그런가? 작품의 미학적 의미나 미술사적 중요성 이전에, 난 일단 시원하고 후련하다. 많은 고민과 실패, 연구가 있은 후이겠지만, 캔버스를 찢은 저 틈새가 영화 ‘트루먼쇼’에서 나오는 것처럼, 뜨거운 햇살을 피할 출구 같기도 하고, 목덜미에까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올 것도 같다. 종이 참 두꺼웠을 텐데, 그 소리는 얼마나 또 시원했을까. 쉬이익- 그리고 캔버스를 찢음으로써 2차원적인 평면에 머물던 개념을 찢은 셈이니, 대단하다. 


   매일매일 캔버스를 앞에 두고서, 우리는 여러 고민을 한다. 어떻게 칠을 해야 사람들이 예쁘다고 할까, 내 부끄러운 이 검은 점을 가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내 캔버스는 이미 너무 더러워서 이젠 붓을 잡고서 이 앞에 서 있는 것 조차 힘들 때가 있구나 등등. 평면에 머무르는 일상의 잡념과 연민으로부터 일종의 전환이 필요하다, 폰타나의 칼질처럼. 그저 찢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을 3차원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시원한 전환, 좁은 고민으로부터 깊이와 시야를 바꾸어버리는 그런 칼질. 구태여 안고 살아가기는 하나, 찢어버릴 잡념은 사실 또 얼마나 많은지. 폰타나의 단순하나 차원을 다르게 했던 공간 앞에서, 내 번잡한 공간을 돌아본다. 음 전환이 필요하다. 다시 또 다시.


그런데 사실 제일 무서운 것은 말야

   그 와중에 다른 작품 하나 더 얹어본다.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 사실 ‘4’라는 숫자 하나로 무섭다느니 부정의 기운이 있다느니 하는 건 이젠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다만 숫자 4로 표상되는 어떤 공포나, 무서움의 이미지가 있을 뿐. 그럼 내가 진짜 무서워하는 건 뭘까. 그래, 내가 어떤 공포 괴담보다 무서워하는 건, (숫자 4를 연관 지어 말하자면) 마음이 떨리는 새벽 4시에 전화가 되었든 문자가 되었든 그에 대해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서운 새벽 4시보다, 무서운 새벽 4시에 대해서 속 깊이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 더 무섭다. 일종의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단절감(disconnectedness), 부재. 그래 더위에 취해 진심을 말해보자면, 나는 그게 무엇보다 무섭다. 


막스 에른스트, <숲과 비둘기 Forêt et colombe>, 1927, Tate Collection


   단절감을 되뇌어 보다 떠오르는 그림은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이다. 거대한 숲에 에워싸인 새 한 마리, 게다가 새는 새장에 갇혀있다. 작품의 톤이 어두운 탓에 새가 땡그란 눈으로 마주하는 빽빽한 숲의 거대함, 어둠이 내릴 때의 막막함, 새장이 주는 답답함이 보는 내게도 이내 다가온다. 나무는 성글게 긁은 듯 표현되어서, 평화롭거나 포용하는 숲이 아니라 도대체 저 성근 가지 사이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숲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도통 막막하기만 하다.


   이 작품을 만든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는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초현실주의 특유 ‘자동기술법(Automatisme)[각주:1]’을 통해’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으며, 특히 위의 작품에서 거친 표면으로 나타나는 나무에서도 볼 수 있듯, 종이를 거친 표면 위에 대고 문질러 독특한 질감표현을 내는 ‘프로타주(Frottage)’와 같은 기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비둘기’로 나타나는 새는 에른스트에게 자아를 상징하는 일종의 분신(Alter Ego)으로, 에른스트는 이 새를 ‘로프롭(Loplop)’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나.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해서 분석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앞서 폰타나 작품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늘어뜨리기도 하였고, 에른스트의 다른 작품이라면 모를까 이 작품에서 내가 느끼는 일종의 공포는 지적인 분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앗아간 어두운 풍경과 고립된 비둘기의 모습에 유래하는 것이다. 더위에 지친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작품에‘대해’이야기하기보다는, 그저 이 작품을 들여다 보고 싶다. 이 작품에 투영된 나의 공포를 들여다 보고 싶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공포에 대해서 혹은 두려움에 대해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더구나 이러한 포맷에서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므로 여기까지. 

   더위가 가시기 보다는 조금 스산한-바람이 마음에 잠시 머문다.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픈 여름 밤이나 아직 나는, 더위에서 헤어나오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_꽤 애호가_



  1.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엄밀하게 《초현실주의 선언》에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는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견 없이 행하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 이라고 되어 있듯이, 의식 하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히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자연히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 또는 말은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출처: 자동기술법,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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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피가 모자라??

4호 - 4 2013. 8. 28. 14:10 |

0.
   아직도 피가 모자라?? 그게 헌혈로 해결 되는 문제야??

 

1. <Sunday Bloody Sunday> - U2  / [ war ] 1983년

 


   아직도 선명하다. 기관총 소리가 났었다. 앨범 재킷도 아주 인상적이지만, 앨범의 첫 곡 <Sunday Bloody Sunday>의 인트로 드럼 소리는 나에겐 기관총 소리처럼 들렸다. 샷건을 장전하고 쏴대는 소리. 고1때 였던 것으로 기억 하는데, 교회 후배에게 카세트테이프로 빌려 들은 ‘U2’의 [war] 앨범은 나에게 진정 충격이었다.

   시간을 조금 돌려 보면 지금이야 어이가 없어 웃고 넘길 이야기지만, 90년대 초중반에 소위 기독교 문화서적이라고 들고 나왔던 서적들에서 ‘U2’는 ‘사탄 밴드’ ‘적 그리스도’ 밴드였다. 그 이유는 ‘U2’가 ‘폭격기 이름’이기 때문이란다.(당연히 말이 안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Sunday Bloody Sunday>의 노래 제목도 한 몫 거들지 않았나 싶다. ‘피의 주일’ 이라니!! 믿음 없게 시리!! 하지만 이젠 세계가 다 안다. ‘U2’는 가끔 보면 록 밴드가 아니라 완전 NGO 아닌가!!!! 하긴 우리나라 어딘가엔 아직도‘U2’를 사탄의 밴드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좀 더 시간을 돌리자. 1972년 1월 30일. 나는 태어나기도 전이다. 북 아일랜드 ‘데리’라는 곳에서 시민권 운동 중이던 비무장 가톨릭교도에게 영국군이 발포하여 14명의 사망자와 13명의 중상자를 낸 유혈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사건이라 부르는데, 현대 북아일랜드 분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로 IRA의 재무장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된 사건이라 알려져 있다. 그들의 여러 가지 복잡한 역사적, 지역적 맥락이 있겠지만, 이 사건만 단순하게 놓고 볼 때 군대가 비무장 시민에게 총을 쏜 것을 용납할 사회는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것을 용납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1980년 5월 18일 광주 말이다.
   ‘U2’의<Sunday Bloody Sunday>는 1972년 1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을 노래한 곡이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72년 그날 이후 끝이 났을까? 8년 뒤에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났으며,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 노래는 1972년의 희생자를 위한 노래인 동시에, 지금 현재 우리의 노래이기도 하다. 

 

<Sunday, Bloody Sunday> - U2

I can’t believe the news today
Oh, I can’t close my eyes
And make it go away
How long...
How long must we sing this song
How long, how long...
cause tonight...we can be as one Tonight...

Broken bottles under children’s feet
Bodies strewn across the dead end street
But I won’t heed the battle call
It puts my back up
Puts my back up against the wall

Sunday, Bloody Sunday (X3)
And the battle’s just begun
There’s many lost, but tell me who has won

The trench is dug within our hearts
And mothers, children, brothers, sisters Torn apart
Sunday, Bloody Sunday (X2)

How long...
How long must we sing this song
How long, how long...
cause tonight...we can be as one
Tonight...tonight...

Sunday, Bloody Sunday (X2)

Wipe the tears from your eyes
Wipe your tears away
Oh, wipe your tears away
Oh, wipe your tears away  (Sunday, Bloody Sunday)
Oh, wipe your blood shot eyes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X2)

And it’s true we are immune
When fact is fiction and TV reality
And today the millions cry
We eat and drink while tomorrow they die
(Sunday, Bloody Sunday)
The real battle just begun
To claim the victory Jesus won On...

오늘의 그 뉴스가 믿기질 않아요
눈을 감아도 떨쳐버릴 수가 없네요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린 이 노래를 불러야 하나요
언제까지, 언제까지?
오늘밤... 우린 하나로 맺어질 수 있으니까요
오늘밤

아이들의 발아래 깨진 병조각들
막다른 거리 곳곳에 흩어진 시신들
그래도 전 전투신호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게 자꾸만 나를 벽으로 밀어 붙이고 또 밀어 붙일 뿐이죠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그리고 바로 싸움이 시작 되었네요
많은 이들이 죽었죠. 허나 말해봐요, 누가 승자인지?
우리가슴속에 깊이 패인골들
어머니, 아이, 형제, 자매들이 서로 찢어지고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린 이 노래를 불러야 하나요.
언제까지, 언제까지?
오늘밤... 우린 하나로 맺어질 수 있으니까요
오늘밤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눈 속에 고인 눈물을 닦아요
눈물을 닦아내요
내가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게요
내가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게요
내가 당신의 충혈된 눈을 닦아줄게요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맞아요, 우린 너무 무감각해 졌어요
사실이 허구가 되고 TV가 현실이 된 지금
오늘도 수백만 명이 울부짖고 있네요
우리는 먹고 마시는데 내일이 오면 그들은 죽겠지요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에요
예수께서 쟁취했던 승리를 선언할...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일요일, 피로 물든 일요일
(번역 : 이상헌in ‘Deafening street’)
     

2. <피가 모자라> - 달빛요정 역전 만루 홈런 /  [ 전투형 달빛요정 - Prototype A(EP) ] 2010년  

 


   헌혈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이 공포스러운 점은 대한민국이 정말 으스스한 이유는 검색어 순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포탈의 검색어 1위는 거의 대부분 여자 연예인이 차지 한다. 꼭 1위가 아니더라도 10위 안에 반드시 꼭 여자 연예인은 있다. 그리고 그 여자 연예인이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내용은 거의 똑같다. “OOO, 섹시화보 아찔” “OOO, 치마길이가, 헉!” “OOO, 아슬아슬...” 등등.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온 국민이 여자 연예인 몸매만 보고 사는 것 같다. 여자 연예인 몸매에 감탄 할 수 있다. 좋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클릭 수가 오를 수도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목숨보다, 비관 자살하는 사회적 타살자 들의 목숨보다, 기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보다, 아닌걸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위보다, 한 뼘도 안 되는 여자 연예인의 치마 길이가 더 화제인건 분명히 비정상인거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정의로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서 비정상인거다. 그렇다면 여자연예인을 검색어 1위가 되도록 클릭하고 검색하는 사람들은 단체로 미쳐서 그런 걸까? 아니!!! 나는 다시 묻고 싶다. 검색하는 사람이 많아 여자연예인이 검색어 1위를 차지할까, 아니면 검색어 안에 있으니까 검색하는 사람이 많아진 걸까?
   ‘성찰(省察)’이란 말은 왠지 철학 적이고 어려운 말 같지만 뜻은 단순하다. 국어사전에는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핌”이라고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나온다. 2010년 세상을 떠난 ‘달빛요정 역전 만루 홈런’의 <피가 모자라>는 바로 그 단순하고 명료한 성찰이 담긴 곡이며 이 시대를 정확하면서도 쉽게 ‘통찰(洞察)’한 노래다.

   흡혈귀 같은 세상은 여자연예인의 스커트길이 만도 못한 우리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런데, 이 흡혈귀 같은 세상은 결국 우리 탐욕의 대가다.  영화 ‘설국열차’의 대사 한마디가 떠오른다. 벽이 라고 생각 되었던 저 문을 열고 싶다던.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에서 나는 이 곡보다 더 철학적인 곡을 만난 적이 없다. 


<피가 모자라> -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친구들의 걱정하네 그러다 잡혀간다고
무서운 세상이라고 몸조심해야 한다고
뒤 끝이 장난이 아냐 쩨쩨하고 오만하지
천박한 너의 웃음은 우리들 탐욕의 대가
알아서 꺼져주면 안 되겠지 정녕 이렇게 피를 봐야겠니?

모자라 피가 모자라 하지만 그 피가 내 것은 아니길
난 비겁해 너와 똑같아 숨어서 이렇게 노래만 부르네
난 비겁해

더워서 나가기 싫어 오래 서 있기도 싫어
하지만 책임져야지 추악한 욕망의 대가
그만큼 해 먹었으면 안 되겠니 정녕 이렇게 피를 봐야겠니?
모자라 피가 모자라 하지만 그 피가 내 것은 아니길
난 비겁해 너와 똑같아 숨어서 이렇게 노래만 부르네

난 비겁했어 어제까진 하지만 이젠 하지만 이젠
물러서지 않겠어 물러서지 않겠어 두 번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모자라 피는 모자라 하지만 그 피가 우리의 것이 아니길 

 

3. 노래를 찾는 사람들 - <광야에서> / [2집] 1989년

 


   군대 있을 때, 소위 운동권 출신으로 추정되는 선임이 있었다. 그 선임은 군종병 이었는데, 어느 날 종교행사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그 선임이 이런 말을 한 적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과 소위 운동권에서 부르는 ‘민중가요’는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고. 그러니까 찬양을 부르며 은혜를 받는 마음과 민중가요를 부르며 피가 끓는 감정이 매우 유사하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이 말을 이해 못했는데 몇 년 후 곧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있었다. 나도 촛불집회에 나갔었는데, 그곳에서 <광야에서>를 부르며 행진을 했었다. 수많은 민중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며 같은 곳을 향해 행진 하는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그때 느꼈다. 찬양 부르며 은혜 받는 것과 민중가요를 부르며 피가 끊는 느낌은 완전히 똑같다는 걸.

   이곡은 꼭 시위나, 정치와 연결하지 않더라도 듣고 있으면 피가 끓는 뭔가가 있다. 가사가 촌스럽다 말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가요 들으며 피가 끓지는 않지 않나? ‘이름이 뭐예요, 전화번호 뭐예요’ 들으며 피가 끓는 것도 웃기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에 수록된 곡이지만 이 곡은 워낙 유명해서 여러 가수 들이 많이 불렀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물론 부르고 ‘김광석’ ‘안치환’ 님도 심지어 ‘기쁨의 교회 문화사역팀’에서 부른 버전도 있더라.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이 노래는 ‘안치환’님의 버전이 제일 멋진 것 같다. 안치환님의 목소리와 이 노래는 정말 완벽한 조합이라 생각한다. 피 끓는 노래에 피 끓는 목소리.

   요즘은 왜 이런 피 끓는 노래들이 없을까? 이런 노래들이 정말 안 나오는 걸까? 아, 요즘 틴에이저 분들은 <이름이 뭐예요>를 들으면 피가 끓으시나?

 

0.
   헌혈로 해결 안 되니까 막 죽이고 그러겠지. 근데도 모자라지? 여전히?
   아마, 영원히 그럴걸?

_거의 편집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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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Essay 4 Les Essais

4호 - 4 2013. 8. 20. 11:34 |




思  사색과 수필

   개인적으로 명상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 사색에 빠지곤 한다. 어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것은 주로 어떤 ‘가능성’을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꿈을 꾸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면서 목적지 없이 표류한다. 자유롭게 흘러가는 생각들을 따라 가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다. 간혹 그 안에서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찰나의 반짝이는 영감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생각들을 실제 글로 옮겨보면, 대부분 하찮고, 정신 사납고, 알 수 없는 글이 되기 쉽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질서정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정돈된 글로 옮길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들을 찬찬히 뒤돌아보고, 기록하여 조금씩 다듬어 나가다 보면, 그 기록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시도를 통해 내어놓은 결과물을 나 자신이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시도의 결과물을 흔히 수필, 혹은 에세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던 위대한 수필집 한 권, 아마도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수필집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한다.


“독자들이여, 이 책은 제법 정성을 기울여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단지 나의 집안일이나 사삿일을 이야기하려는 것일 뿐, 그 밖의 다른 의도는 없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독자를 위해서거나 나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은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다. 다만 나의 일가권속이나 친구들이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조만간 그렇게 될 테지만- 이 책에서 나의 어떤 모습이나 감정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더욱 올바르고 생생하게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이 세상 사람들의 호의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면,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꾸미고 조심스럽게 검토한 다음 세상에 내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여기서 생긴 그대로의 나 자신을,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채로의 나 자신을 보아주기 바란다. 내가 묘사한 것은 곧 나 자신이다. 따라서 나의 온갖 결점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나는 되도록 숨김없이 타고난 나 자신을 그대로 내놓고 싶다.” 

- 몽테뉴‘수상록’서문 -


   단언컨대, 다양한 글쓰기의 구분 중에서 가장 그 범주가 넓고, 사실상 정의하기 어려운 분야가 수필일 것이다. 나는 굳이 구분하자면, 수필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매우 자유롭지만, 분명히 작가와 독자가 존재하고 작가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야 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누가 써도 상관없는 글이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은 우리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수많은 독자를 대면시켰다. 우리는 이제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꺼내 보이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보통 독자가 존재하는 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 채로, 글을 쓰는 것 같다. 


   수상록이란 말 자체가, 수필(essay)이라는 말이다. 이 수상록이라는 것은 하나의 명사로서 몽테뉴의 수필을 의미하기도 한다. 몽테뉴는 수필이라는 장르를 대중화시킨 첫 번째 인물로 알려졌다.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를 그만둔 직후부터 1592년 죽을 때까지 수많은 첨삭을 거쳐 탄생시킨 3권짜리‘수상록’은‘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원조가 됐다. 몽테뉴가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에세(Les Essais)’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시도, 경험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몽테뉴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사색의 결과물을 담았다는 집필 의도를 표현하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었고, 그것이 언젠가부터‘수필’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문학작품과 실용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글을 의미하는 뜻으로 확장된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두서없이 흘러가는 대화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돈되고 꾸며진 글에서는 그의 안에 숨겨진 생각의 파편들을 해석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잘 써진 수필들이 우리에게 친절한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몽테뉴의 수필에도, 몽테뉴가 던진 화두들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의 흐름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좀 더 쉽게 그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세계 속에서 나의 세계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이 독자에게 있어 수필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좀 더 치열하게 생각하고, 읽기와 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수필을 읽자! 그리고 수필을 쓰자! (이 무슨 선동 구호 같네)



死  죽음에 대하여

   한동안 빗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면, 온갖 것들이 다 가라앉는다. 먹먹한 기분에 잠겨 질식할 것만 같았다. 축축한 날씨, 눅눅한 공기는 나를 쉽게 아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함이나 고통은 나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지기 쉽게 만들어 준다.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삶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과 삶의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은 내가 유한한 인간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진다. 나는 오늘도 그저 살아가고 있고, 그것은 전혀 놀랍지도, 감동적이지도, 심지어 독창적이지도 않다. 나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한숨을 쉬고, 어쨌든 다시 그 사실을 가슴 깊숙이 묻어버린다. 그러나 인생에서 죽음만큼이나 명백한 것이 또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자각되는 순간 죽어가고 있다. 죽음은 나의 유일한 목적지, 존재가 도달하는 종착역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당연히 나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상상할 수도 없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많은 두려운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 노후의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에 대해서, 삶의 수많은 불행을 생각할 때, 또한 그것들을 견뎌낼 또 다른 삶의 희망들을 상상해 낼 수 있다. 절망적인 상상은 희망적인 상상으로 상쇄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사고가 존재로부터 출발한 바,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하는 일과도 같다. 거긴 어떤 기분도 없다. 그리고 어떤 기분도 아닌 기분이란 것은 없다. 그 불쾌함은 정말이지, 묘사하기 어렵다. 

   나는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나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는 아주 다른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타인의 경우에 비추어 반성하거나 본받을 수 없다. 이러한 불안은 나로 하여금 손쉽게 종교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믿는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이러한 방식으로 해소한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한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각주:1]


   종교의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종종 ‘사후세계’를 상상하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상상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잠에서 깬 내일의 일과를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죽음을 죽음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내가 믿는 종교에는 죽음이란 없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강력하지만, 폭력적인 선택지. 파스칼의 내기다.[각주:2] 하다못해 이것만으로 죽음에 대한 모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진다면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보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불안이 더 있다. 삶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로부터, 절망하거나 혹은 위안받는다. 그것을 통해 위안받는 사람들은 우리가 죽음을 통해 온전한 세계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죽음을 통해 온전해진 나는, 과연 나 자신일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불완전하므로, 그리고 바로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나 자신인 것 아닌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다면, 그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나’인가? 나는 결국 죽음의 공포가 망각의 공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망각의 일상을 통해서, 죽음의 단면을 엿본다. 삶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과거의 나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어쩌면, 내 삶의 잣대는 기억함에 있다. 나는 기억하기 때문에 ‘나’로서 살아있다. 어느 순간 내가 ‘나’라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가 나라는 존재의 죽음과 동일하다. 때문에,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망각이라는 가정이 더해졌을 때, 별로 다르지 않은 선택지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필에서, 죽음에 대해서도 긴 이야기를 했다. 사실 몽테뉴의 수필 중 많은 것들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노년에 이 수필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도 존재의 근원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생애의 목표는 죽음이다. 죽음만이 우리가 겨누는 필연적인 대상이다. (중략) 어떻게 사람이 죽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고, 어느 순간이건 죽음이 우리 목덜미를 잡고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몽테뉴‘수상록’중-

   

   몽테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도 좋으니 그리 해보라고 말한다. 비겁을 무기로 써도 좋다. 죽음을 외면하고, 죽음 자체를 망각해도 좋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소용 있을까? 결국, 몽테뉴는 죽음 그 자체에 당당히 맞서서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죽음을 범상하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음과 친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테뉴는 ‘지금부터 백 년 뒤에 우리가 살이 있지 않으리라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부터 백 년 전에 우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고 슬퍼하는 것과 같은 바보 같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없는 것들,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해 오히려 필요 이상의 걱정과 공포를 느낀다. 쇠약이나 질병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보다는 건강했을 때 훨씬 병을 두려워한다. 몽테뉴는 죽음도 역시 그렇기를 바란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간다면,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철학은 이미 ‘나’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서, 이제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안에서 몸부림 치고 있다. 뻔한 말이지만, 이럴 때 독서가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아직도 죽음에 대해 잘 정리된 무언가를 써내려갈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며, 여전히 마주 대하기가 껄끄럽다. 어쨌거나,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죽음은 시시각각 내 주위를 도사리고 있다. 망각의 공포와 쇠약의 공포, 외로움의 공포가 죽음과 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어쩌면 몽테뉴의 말처럼, ‘사실 우리는 죽음을 둘러싼 저 무서운 얼굴과 모든 형상을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결국 죽음 주위를 도사리고 있는 공포들일 뿐이며, 죽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_대충 소설가_




이미지 출처

http://www.culturetheque.org.uk/



  1. 고린도전서 15장 51-55절 (공동번역) : 나는 개신교 신자지만, 현재 대한 성공회와 한국정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이 공동번역은 참 맘에 든다. 같은 내용을 우리가 흔히 보는 성경에서 찾아보면 쉽게 동의할 것이다. [본문으로]
  2. . ‘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내기를 한다면, 파스칼은 신이 존재하는 쪽에 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었건 믿지 않았건 간에 결과는 똑같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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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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