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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06 사이에 머무르는 시선들 [놀다가 아트]

  사이의 공간은 치명적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의 공간. 때로 ‘사이’는 친구이거나 혹은 친구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를 일컫기도 하고, 댄스라고 하기엔 뭔가 덜 신나고 발라드라고 하기엔 그래도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애매한 노래를 이를 때에 쓰이곤 한다. ‘결국 그 사람과 무슨 사이냐고’ 우리는 깔끔하게 정의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모든 것이 명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피할 수도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그 ‘사이’의 공간을 받아들일 수 밖에. 게다가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기에, 사실 이 ‘사이’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도리어 치명적인 공간. 때문에 끼인 모양새로 간주되기 십상인 ‘사이’를 대변하고자, 오늘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머무는 시선들을 소개한다. 백남준의 <촛불 하나>와 수-메 체의 <메아리>가 바로 그 것이다.


백남준, <촛불 하나 One Candle>, 1989, MMK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촛불 하나>, 가상과 실제 사이에서


   백남준1932-2006의 <촛불 하나 One Candle>는 제목 그대로 하나의 촛불로부터 시작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삼각대 위에 설치한,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작은 양초의 이미지는 초를 촬영한 카메라와 그 이미지를 다시 삼원색으로 투광시키는 삼광식 프로젝트를 거쳐 결국은 하얀 벽 위에 다양한 빛깔로 촛불의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혹은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촛불을 향해서 입김을 불어볼 때면 실제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미술관 공간을 메운 거대한 촛불들도 제각기 흔들리게 된다. 화이트 큐브 미술관 안에서 벽을 흔드는 바람이 조용히 스쳐간다..


   백남준은 흔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바, 사람들은 그의 예술에 대해 차가운 고철 기계와 텔레비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 사유하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은 한국의 현대예술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나, 그만큼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제외하고선 제대로 이해되어지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음악에서 시작하여 영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그가 집중했던 주제 중 하나는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의 어우러짐이었다. 단순히 기계문명의 발달과 확산에 따라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를 통해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빅브라더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술과 인간 정신, 문명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촛불 하나>는 그런 사유의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작품은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촛불에서 시작하지만,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통해서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가상의 이미지로의 촛불 이미지를 창조하여 이윽고 공간을 뒤덮어버리는 것이다. 실제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 작품이 위치한 공간은 프로젝터를 통과한 가상의 이미지로 채워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촛불이 흔들릴 때에 가상의 촛불 이미지들 역시 그 바람에 함께 흔들리게 된다. 때문에 단순히 기계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지만 하나의 촛불로 시작하였지만 순수한 자연의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촛불 하나>의 풍경은 실제와 가상, 그 사이 어디 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앞에 서면 구형 삼광식 프로젝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물감을 한껏 푼 것처럼 형형색색을 이루는 촛불의 풍경 앞에서 바람의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가을의 갈대밭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가상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 그 사이에서 <촛불 하나>는 어느 한쪽에 머무는 것보다 더욱 더 증폭된 풍경으로 펼쳐진다. 심해를 헤엄치듯 너울거린다. 작은 양초에서 시작한 것이 이윽고 화이트 큐브 미술관의 환경을, 보는 이의 경험을 빚어낸다. 그 사이를 마구 유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메 체의 <메아리>,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는데


메 체, <메아리 L’echo>, 2003, 비디오, 사운드, 5분 30초, 무담 룩셈부르크 소장


   두 번째 시선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작가 수-메 체(Su-Mei Tse 1973~)의 <메아리 L’echo>라는 비디오 작품이다. 이 작품은 6월 말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전에서 현재 전시 중인데, (자세한 전시 정보는 마지막에 있다.) 작품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보아도 선뜻 이것이 비디오 작품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거대한 알프스 산을 배경으로 하여 전면에는 푸른 풀밭, 그리고 풀밭과 강한 색채 대조를 이루는 붉은 드레스의 첼리스트(작가 본인), 이것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의 전부이다. 


   작가는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알프스 산은 곧 첼로 소리의 메아리를 낸다. 처음에는 외따로 존재하는 소리이지만, 이윽고 첼로 소리와 메아리는 일종의 합주를 이루게 된다. 돌림노래처럼, 질문과 대답처럼, 오순도순 나누는 대화처럼. 풍경에서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거대한 산 아래에 미약하게만 보이는 작가의 첼로 연주가 있을 뿐이다. 소리가 외따로 존재하던 작품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여도 작품의 이미지에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알프스와 작가 사이 공간의 밀도가 바뀐 것이다. 첼로 소리와 메아리 소리의 간격에서처럼 처음에는 텅 빈 정적으로 존재했던 시간을 지나 이윽고 조금씩 조응하기 시작한다. 첼로 연주, 메아리의 화답, 또 그에 대한 첼로의 다른 소리, 그리고 메아리의 또 다른 화답. 알프스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 뿐이고, 작가는 여전히 여기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첼로 연주와 메아리는 결국 대화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 사이 공간에 머무르는 일


   너무나 단정적인 문장들 사이에서, 이쪽 혹은 저쪽 이기를 강요하는 가름 사이에서 ‘사이’의 공간은 무력하게만 보인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 묻는다면 무어라 답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검정색과 흰색 사이의 회색 지대는 도무지 좋게 해석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이’의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 산과 첼리스트 사이의 대화, 실제와 가상 이미지 사이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풍경……


   최근 발간된 <시간의 향기>에서 저자인 한병철 교수 역시 기존의 시간 개념이 파괴된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하며,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모든 것은 없거나 지금 여기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존재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생은 모든 사이가 제거되고 나면 그만큼 더 빈곤해진다.” 


   삶의 풍성함이란, 관계의 놀라움이란 단순하게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도리어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하려 들었을 때에, 혹은 쉬이 얻으려 들 때에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모호하고 안개 같은 시간이 주는 번민의 때가 있으나, 또한 그러하기에 허락되는 경탄과 희열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사이’는 도무지 애매해서 싫다는 당신, 오늘은 이 치명적인 공간에 조용히- 머물러 보시기를 권한다. 

_꽤 애호가_





기타 참고 자료

_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njpartcenter.kr

_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www.artsonje.org

_한병철, <시간의 향기>, 문학과 지성사, 2013











수-메 체의 <메아리> 관련 전시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콜렉션」


전시일시: 2013년 4월 13일(토) 

              ~ 6월 23일(일)

전시장소: 아트선재센터

관람요금: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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