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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29 날 꺼내줘, 이 더위에서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평생에 이번 여름처럼 더위와 습도를 온 몸으로 경험하는 계절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서울엔 폭염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다는데, 최근 처한 상황 덕에 절절히 더위와 습도를 겪어내는 여름이다. 나 이 정도로 여름을 타지는 않는데. 절대 보지 않는 공포영화 처방이라도 내려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니 사실 말 다했다.


   그런 맥락에서 ‘4’는 이 여름의 내게 불운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원래는 괜히 오싹해 했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무서워서라도 서늘함을 좀 가져다 주지 않으련?’ 하는 바람, 혹은 ‘새벽 4시는 그래도 좀 시원하겠지 않을까?’ 정도의 안도가 먼저 떠오른다. 아 이쯤 되면 좀 슬퍼진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서늘한 그림, 혹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작품을 소개해보려 한다. 사실은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더위에 취한 머리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이니 아니라고 해도 이해를 구한다. 나처럼 축축한 공기에 절여진 마음들에 공감을 구한다. 아…… 습도. 

 

칼을 나의 붓 삼아

   처음 이 작품 앞에 섰을 때에도 그렇고 여전히, 이 작품을 보면 소리가 들린다. 슈악! 종이의 단말마 비명소리가. 종이에 숨을 끊어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여름, 서늘한 그림을 떠올릴 때 이 작품이 먼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치오 폰타나, <공간개념 ‘기다림’ Concetto Spaziale ‘Attesa>, 

1960, Tate Collection


   굳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골머리를 앓다가 해주는 이야기보다 서늘한 정적을 만들어버리는 한 마디 말이 더 효과 있는 것처럼, 폰타나의 작품은 칼집 하나로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슈아악 하는 종이의 비명을 상상해보면 효과는 더 배가된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무서운 이야기라고 해도 고전적인 풍으로 풀어낸그림들은, 무서워도 뭔가 한 여름에 몇 겹 긴 옷을 입고 거리에 나간 것처럼 답답하다. 반면 폰타나의 그림은 저 칼집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곧 뒤통수를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이.


   하지만 그게 무엇이건 간에 일단 이게 뭐길래 액자 프레임에 곱게 넣어 벽에 걸었나 하고 의아해지는 게 사실 가장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볼 때 온갖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작품들에 둘러 쌓여있던 터라, 상대적으로 별 충격이 없었더랬다. 그러나 여전히 캔버스에 칼집을 내어서……뭐? 그걸 내가 못할까봐? 할 수 있다. 충분히.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는 아르헨티나에서 자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조각가이자, 화가이고 이론가이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집중해서 공간주의(Spatialism, Spazialismo) 선언문을 다섯 차례 내어가며 공간주의를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였고, 2차원을 벗어난 회화를, 3차원을 벗어난 조각을 구상하고 고민했었던 작가이다. 이를테면, 흔히 회화와 조각을 다른 종류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점, 즉 전자는 2차원적 캔버스에 머무르고 후자는 무게와 덩어리가 느껴지는 3차원의 소재에 머문다는 바로 그 통념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앞서 소개한 <공간개념 ‘기다림’>도 마찬가지다. 저 찢겨진 자국으로 종이가 앞뒤로 벌어져서 생긴 저 공간, 그리고 그 구멍으로 인해 뒤에 나타나는 배경까지도 생각하면 이 작품을 전통적인 회화로 볼 수는 없다. 평면을 벗어났으니 분명 조각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또 조각이라고 하자니 뭔가 애매하다. 프레임에 든 건 종이 한 장인걸. 결국 작품의 제목처럼, 회화도 조각도 아닌 그만의 ‘공간개념’을 만든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화는 현실이나 상상의 무언가를 표상해야 하고, 그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기를 사람들은 바랐다. 그러나 당시 개념미술의 다양한 작가들이 그러했듯, 폰타나 역시 이미지의 반영, 선적 내러티브를 부정하고선 그만의 추상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선이야 쉽게 긋는 것이라 하여도, 캔버스 앞에서 칼로 쭉 선을 긋는 데까지 이르는 건, 또 공간을 창조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칼을 손에 쥐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캔버스를 찢었다’니, 이쯤되면 그마저도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폰타나의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연작으로 계속된다. 평면을 칼질로 쭈욱 찢기도 하고 이후에는 구멍을 뚫기도, 초크와 금속, 잉크, 돌을 이용한 작업도 선보인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공간개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이 2천여 점에 이른다. 그 중에 가장 알려진 것이 앞서 보았던 찢기 작업과 구멍 뚫기 작업인 것이다.

   

   더워서 그런가? 작품의 미학적 의미나 미술사적 중요성 이전에, 난 일단 시원하고 후련하다. 많은 고민과 실패, 연구가 있은 후이겠지만, 캔버스를 찢은 저 틈새가 영화 ‘트루먼쇼’에서 나오는 것처럼, 뜨거운 햇살을 피할 출구 같기도 하고, 목덜미에까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올 것도 같다. 종이 참 두꺼웠을 텐데, 그 소리는 얼마나 또 시원했을까. 쉬이익- 그리고 캔버스를 찢음으로써 2차원적인 평면에 머물던 개념을 찢은 셈이니, 대단하다. 


   매일매일 캔버스를 앞에 두고서, 우리는 여러 고민을 한다. 어떻게 칠을 해야 사람들이 예쁘다고 할까, 내 부끄러운 이 검은 점을 가리면 문제가 해결될까, 내 캔버스는 이미 너무 더러워서 이젠 붓을 잡고서 이 앞에 서 있는 것 조차 힘들 때가 있구나 등등. 평면에 머무르는 일상의 잡념과 연민으로부터 일종의 전환이 필요하다, 폰타나의 칼질처럼. 그저 찢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을 3차원으로 이해하는, 일종의 시원한 전환, 좁은 고민으로부터 깊이와 시야를 바꾸어버리는 그런 칼질. 구태여 안고 살아가기는 하나, 찢어버릴 잡념은 사실 또 얼마나 많은지. 폰타나의 단순하나 차원을 다르게 했던 공간 앞에서, 내 번잡한 공간을 돌아본다. 음 전환이 필요하다. 다시 또 다시.


그런데 사실 제일 무서운 것은 말야

   그 와중에 다른 작품 하나 더 얹어본다.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 사실 ‘4’라는 숫자 하나로 무섭다느니 부정의 기운이 있다느니 하는 건 이젠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다만 숫자 4로 표상되는 어떤 공포나, 무서움의 이미지가 있을 뿐. 그럼 내가 진짜 무서워하는 건 뭘까. 그래, 내가 어떤 공포 괴담보다 무서워하는 건, (숫자 4를 연관 지어 말하자면) 마음이 떨리는 새벽 4시에 전화가 되었든 문자가 되었든 그에 대해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서운 새벽 4시보다, 무서운 새벽 4시에 대해서 속 깊이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이 더 무섭다. 일종의 친밀한 관계로부터의 단절감(disconnectedness), 부재. 그래 더위에 취해 진심을 말해보자면, 나는 그게 무엇보다 무섭다. 


막스 에른스트, <숲과 비둘기 Forêt et colombe>, 1927, Tate Collection


   단절감을 되뇌어 보다 떠오르는 그림은 막스 에른스트의 <숲과 비둘기>라는 작품이다. 거대한 숲에 에워싸인 새 한 마리, 게다가 새는 새장에 갇혀있다. 작품의 톤이 어두운 탓에 새가 땡그란 눈으로 마주하는 빽빽한 숲의 거대함, 어둠이 내릴 때의 막막함, 새장이 주는 답답함이 보는 내게도 이내 다가온다. 나무는 성글게 긁은 듯 표현되어서, 평화롭거나 포용하는 숲이 아니라 도대체 저 성근 가지 사이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숲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도통 막막하기만 하다.


   이 작품을 만든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는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초현실주의 특유 ‘자동기술법(Automatisme)[각주:1]’을 통해’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으며, 특히 위의 작품에서 거친 표면으로 나타나는 나무에서도 볼 수 있듯, 종이를 거친 표면 위에 대고 문질러 독특한 질감표현을 내는 ‘프로타주(Frottage)’와 같은 기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비둘기’로 나타나는 새는 에른스트에게 자아를 상징하는 일종의 분신(Alter Ego)으로, 에른스트는 이 새를 ‘로프롭(Loplop)’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나. 


   그러나 이 작품에 관해서 분석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앞서 폰타나 작품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늘어뜨리기도 하였고, 에른스트의 다른 작품이라면 모를까 이 작품에서 내가 느끼는 일종의 공포는 지적인 분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앗아간 어두운 풍경과 고립된 비둘기의 모습에 유래하는 것이다. 더위에 지친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 작품에‘대해’이야기하기보다는, 그저 이 작품을 들여다 보고 싶다. 이 작품에 투영된 나의 공포를 들여다 보고 싶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공포에 대해서 혹은 두려움에 대해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더구나 이러한 포맷에서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므로 여기까지. 

   더위가 가시기 보다는 조금 스산한-바람이 마음에 잠시 머문다.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픈 여름 밤이나 아직 나는, 더위에서 헤어나오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_꽤 애호가_



  1.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엄밀하게 《초현실주의 선언》에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는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견 없이 행하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 이라고 되어 있듯이, 의식 하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즉 모든 습관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히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가 좋은데, 여기서 자연히 표출되는 선이나 형태 또는 말은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 (출처: 자동기술법,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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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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