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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4 Les Essais

4호 - 4 2013. 8. 20. 11:34 |




思  사색과 수필

   개인적으로 명상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 사색에 빠지곤 한다. 어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것은 주로 어떤 ‘가능성’을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꿈을 꾸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면서 목적지 없이 표류한다. 자유롭게 흘러가는 생각들을 따라 가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다. 간혹 그 안에서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찰나의 반짝이는 영감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생각들을 실제 글로 옮겨보면, 대부분 하찮고, 정신 사납고, 알 수 없는 글이 되기 쉽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질서정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정돈된 글로 옮길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생각들을 찬찬히 뒤돌아보고, 기록하여 조금씩 다듬어 나가다 보면, 그 기록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시도를 통해 내어놓은 결과물을 나 자신이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시도의 결과물을 흔히 수필, 혹은 에세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던 위대한 수필집 한 권, 아마도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수필집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한다.


“독자들이여, 이 책은 제법 정성을 기울여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단지 나의 집안일이나 사삿일을 이야기하려는 것일 뿐, 그 밖의 다른 의도는 없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독자를 위해서거나 나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일은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다. 다만 나의 일가권속이나 친구들이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조만간 그렇게 될 테지만- 이 책에서 나의 어떤 모습이나 감정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더욱 올바르고 생생하게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이 세상 사람들의 호의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라면,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꾸미고 조심스럽게 검토한 다음 세상에 내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여기서 생긴 그대로의 나 자신을,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채로의 나 자신을 보아주기 바란다. 내가 묘사한 것은 곧 나 자신이다. 따라서 나의 온갖 결점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나는 되도록 숨김없이 타고난 나 자신을 그대로 내놓고 싶다.” 

- 몽테뉴‘수상록’서문 -


   단언컨대, 다양한 글쓰기의 구분 중에서 가장 그 범주가 넓고, 사실상 정의하기 어려운 분야가 수필일 것이다. 나는 굳이 구분하자면, 수필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매우 자유롭지만, 분명히 작가와 독자가 존재하고 작가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여야 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누가 써도 상관없는 글이어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은 우리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수많은 독자를 대면시켰다. 우리는 이제 특정,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꺼내 보이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보통 독자가 존재하는 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 채로, 글을 쓰는 것 같다. 


   수상록이란 말 자체가, 수필(essay)이라는 말이다. 이 수상록이라는 것은 하나의 명사로서 몽테뉴의 수필을 의미하기도 한다. 몽테뉴는 수필이라는 장르를 대중화시킨 첫 번째 인물로 알려졌다.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를 그만둔 직후부터 1592년 죽을 때까지 수많은 첨삭을 거쳐 탄생시킨 3권짜리‘수상록’은‘에세이`라는 글쓰기 장르의 원조가 됐다. 몽테뉴가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에세(Les Essais)’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시도, 경험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몽테뉴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사색의 결과물을 담았다는 집필 의도를 표현하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었고, 그것이 언젠가부터‘수필’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문학작품과 실용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글을 의미하는 뜻으로 확장된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두서없이 흘러가는 대화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돈되고 꾸며진 글에서는 그의 안에 숨겨진 생각의 파편들을 해석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잘 써진 수필들이 우리에게 친절한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몽테뉴의 수필에도, 몽테뉴가 던진 화두들에 대한 몽테뉴의 생각의 흐름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좀 더 쉽게 그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세계 속에서 나의 세계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이 독자에게 있어 수필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좀 더 치열하게 생각하고, 읽기와 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수필을 읽자! 그리고 수필을 쓰자! (이 무슨 선동 구호 같네)



死  죽음에 대하여

   한동안 빗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면, 온갖 것들이 다 가라앉는다. 먹먹한 기분에 잠겨 질식할 것만 같았다. 축축한 날씨, 눅눅한 공기는 나를 쉽게 아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함이나 고통은 나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지기 쉽게 만들어 준다.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삶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과 삶의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은 내가 유한한 인간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진다. 나는 오늘도 그저 살아가고 있고, 그것은 전혀 놀랍지도, 감동적이지도, 심지어 독창적이지도 않다. 나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한숨을 쉬고, 어쨌든 다시 그 사실을 가슴 깊숙이 묻어버린다. 그러나 인생에서 죽음만큼이나 명백한 것이 또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자각되는 순간 죽어가고 있다. 죽음은 나의 유일한 목적지, 존재가 도달하는 종착역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당연히 나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상상할 수도 없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많은 두려운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 노후의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에 대해서, 삶의 수많은 불행을 생각할 때, 또한 그것들을 견뎌낼 또 다른 삶의 희망들을 상상해 낼 수 있다. 절망적인 상상은 희망적인 상상으로 상쇄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사고가 존재로부터 출발한 바,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하는 일과도 같다. 거긴 어떤 기분도 없다. 그리고 어떤 기분도 아닌 기분이란 것은 없다. 그 불쾌함은 정말이지, 묘사하기 어렵다. 

   나는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나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는 아주 다른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타인의 경우에 비추어 반성하거나 본받을 수 없다. 이러한 불안은 나로 하여금 손쉽게 종교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믿는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이러한 방식으로 해소한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한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각주:1]


   종교의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우리는 종종 ‘사후세계’를 상상하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상상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잠에서 깬 내일의 일과를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죽음을 죽음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내가 믿는 종교에는 죽음이란 없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강력하지만, 폭력적인 선택지. 파스칼의 내기다.[각주:2] 하다못해 이것만으로 죽음에 대한 모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진다면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보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불안이 더 있다. 삶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로부터, 절망하거나 혹은 위안받는다. 그것을 통해 위안받는 사람들은 우리가 죽음을 통해 온전한 세계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죽음을 통해 온전해진 나는, 과연 나 자신일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불완전하므로, 그리고 바로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나 자신인 것 아닌가?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다면, 그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나’인가? 나는 결국 죽음의 공포가 망각의 공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망각의 일상을 통해서, 죽음의 단면을 엿본다. 삶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과거의 나는 끊임없이 죽어간다. 어쩌면, 내 삶의 잣대는 기억함에 있다. 나는 기억하기 때문에 ‘나’로서 살아있다. 어느 순간 내가 ‘나’라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가 나라는 존재의 죽음과 동일하다. 때문에,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망각이라는 가정이 더해졌을 때, 별로 다르지 않은 선택지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필에서, 죽음에 대해서도 긴 이야기를 했다. 사실 몽테뉴의 수필 중 많은 것들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노년에 이 수필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도 존재의 근원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생애의 목표는 죽음이다. 죽음만이 우리가 겨누는 필연적인 대상이다. (중략) 어떻게 사람이 죽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고, 어느 순간이건 죽음이 우리 목덜미를 잡고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몽테뉴‘수상록’중-

   

   몽테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도 좋으니 그리 해보라고 말한다. 비겁을 무기로 써도 좋다. 죽음을 외면하고, 죽음 자체를 망각해도 좋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소용 있을까? 결국, 몽테뉴는 죽음 그 자체에 당당히 맞서서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죽음을 범상하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음과 친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테뉴는 ‘지금부터 백 년 뒤에 우리가 살이 있지 않으리라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부터 백 년 전에 우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고 슬퍼하는 것과 같은 바보 같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없는 것들,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해 오히려 필요 이상의 걱정과 공포를 느낀다. 쇠약이나 질병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보다는 건강했을 때 훨씬 병을 두려워한다. 몽테뉴는 죽음도 역시 그렇기를 바란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간다면,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철학은 이미 ‘나’라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서, 이제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안에서 몸부림 치고 있다. 뻔한 말이지만, 이럴 때 독서가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아직도 죽음에 대해 잘 정리된 무언가를 써내려갈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며, 여전히 마주 대하기가 껄끄럽다. 어쨌거나,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죽음은 시시각각 내 주위를 도사리고 있다. 망각의 공포와 쇠약의 공포, 외로움의 공포가 죽음과 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어쩌면 몽테뉴의 말처럼, ‘사실 우리는 죽음을 둘러싼 저 무서운 얼굴과 모든 형상을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결국 죽음 주위를 도사리고 있는 공포들일 뿐이며, 죽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_대충 소설가_




이미지 출처

http://www.culturetheque.org.uk/



  1. 고린도전서 15장 51-55절 (공동번역) : 나는 개신교 신자지만, 현재 대한 성공회와 한국정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이 공동번역은 참 맘에 든다. 같은 내용을 우리가 흔히 보는 성경에서 찾아보면 쉽게 동의할 것이다. [본문으로]
  2. . ‘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내기를 한다면, 파스칼은 신이 존재하는 쪽에 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었건 믿지 않았건 간에 결과는 똑같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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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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